글. 조은희 대전가정법원 논산지원 조사관
기온이 높아지니 마음에서 무언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그 기분을 담담하게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이 글은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들의 이야기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가정불화가 심했던 우리 집에서 나는 어린 시절 마음이 자주 헛헛했다. 부모님은 당신들의 문제에 집중하느라 내 마음은 안중에 없었다. 슬픔의 크기는 몸집에 비례하는 것이 아닌데, 몸이 작은 어린 내 슬픔은 작아 보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누구와 속마음을 나눌 곳이 없었던 나는 혼자 견디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시간들을 보냈고, 어린 나이의 결정이 늘 옳을 수는 없었기에 좌충우돌하며 다양한 경험들을 했다. 모르고 살아도 될 것들을 남들보다 많이 겪으며,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나던 시절이 있었다. 니체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라고 한 것처럼, 나의 그런 시간들은 지금 조사관으로서 일을 하는 데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눈이 되었고, 아이들을 품어줄 수 있는 가슴이 되어 주었다.
그러던 나에게 언제부터인가 점점 아이들의 아픔이 내 안에 와 콕콕 박히는 것을 느꼈다. 아이들의 아픔이 고스란히 나에게로 스며들어 내 안의 어린 나를 만났다. 그 아픔은 점점 작아지거나 사라졌지만,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며칠씩 길게 머물기도 했다. 어른 인간으로서 아이들에게 무언가 해줄 게 없다는 마음이 주는 허무함은 안타까움과 답답함까지 밀려들게 하기도 했다.
마음 한편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에게, 2020년 겨울에 남편이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결혼 전에 말했던 것을 실천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며 우선, 모교인 충남대학교에 기부를 해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바로 동의했고 금액을 물었더니 ‘천만 원’이라고 했다. 나는 고학생이었던 남편의 학창 시절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금액에도 동의를 했고, 남편은 바로 학교 담당자에게 연락을 하고 만남을 약속했다. 우리 부부는 대학교 총장실로 방문했고, 남편이 재학할 당시 수학했던 교수님도 만나 함께 티타임을 하며 남편의 학창시절 얘기를 잠깐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덤덤했는데 오히려 많은 기부를 받아본 총장님이 우리를 더 신기하게 여겼다. “자신이 받았던 장학금이 큰 도움이 된 것처럼 후배들에게도 도움을 주라며 졸업한 지 12년 만에 찾아와 장학금을 기부하는 것은 처음이다”라며 감동하셨다.
어쩌면 우리의 나눔의 시작은 그때부터 급발진을 하게 된 것 같다.
당시 대기업에 중간 관리자로 일하고 있던 남편은, 얼마 후 “돈 버는 일은 그만하고 나눔의 삶을 살고 싶다”고 했고, 물론이지만 나는 바로 동의하였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장학재단을 만드는 게 꿈이었고 우리 둘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장학재단의 이름을 만들고 싶어 했다. 이런 꿈을 알고 있던 터라 남편의 이야기에 그리 놀라진 않았고, 다만 ‘생각보다 좀 빠르게 시작하네?’ 정도의 생각은 했었다. 그리고 남편이 원하는 것을 하는 걸 보고 싶었다. 당시 내 눈에 남편은, 회사의 업무 스트레스로 점점 본래의 따뜻했던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에, 가난했던 가정형편상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없었던 남편이 지금부터라도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해보게 하고 싶은 내 마음도 더해졌다.
남편은 시원하게 사표를 던지고, 국제 아동구호 NGO 단체에 들어가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10개월 후 국내 아이들을 돕고 싶다며 청소년들의 자립을 돕는 사단법인을 6개월 만에 만드는 기적 같은 일을 해냈다. 주변에서 좋은 뜻을 함께 공감해 주고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렇게 (사)희망커넥트가 탄생했다. 설립한 지 올해로 만 3년이 되었다. 여러 정기후원자들과 기관, 기업이 함께해 주고 있어 3년간 여러 나눔과 교육활동을 할 수 있었고, 여러 명의 아이들에게 경제적·심리적 도움을 주고 있다(www.hopeconnect.com 참고).
돕는 아이들 중 어느 한 명의 이야기가 이 글의 제목이 되었다. 주인공 소년은 남자 청소년인데, 2년 전 그 청소년은 범죄소년(만 14세 이상)이었고 나는 가정법원의 소년조사관으로서 그 소년을 만났었다.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어릴 때부터 보육원에서 자란 그 소년은 보호자가 없어서 돈이 있음에도 휴대폰을 개통할 수 없는 처지였다. 당연하게 누릴 수 있는 소소한 것도 누구에게는 이루지 못하는 바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은 차가운 칼바람이 관통하는 듯 시렸다. 그 소년의 쓸쓸함의 온도였을까... 그 소년에게 마음이 쓰였고, 어두운 성장배경을 딛고 밝게 자란 소년을 보고 있자니 왠지 더 서글퍼졌고, ‘어른들이 미안하다’라고 이야기하고 싶게 만드는 소년이었다. 그 소년과 무슨 인연이었을까? 1년 후 남편은 그 소년의 ‘삼촌’이 되었다. 그 배경은 이렇다.
그 소년은 6호 처분을 받고 시설에 입소하였는데, 시설장이 그 소년의 가능성을 보았는지 (사)희망커넥트에 제보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오갈 곳 없고 관심 줄 어른 하나 없는 그 소년에게 마음이 갔던 모양이다. 남편은 그 소년과 가끔 만나서 밥을 먹거나 학교생활 얘기도 들었고, 최근에는 진로상담을 위해 내가 상담사로서 그 소년을 만나기도 했다. 남편이 만나는 청소년들은 대부분 남편을 부를 때 ‘쌤~’이라고 하는데, 그 소년은 ‘삼촌’이라고 불렀다. 남편은 그렇게 소년의 하나뿐인 삼촌이 되었다.
이름을 불러주는 행위가 존재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메시지가 있는 김춘수 시인의 <꽃>의 내용이 떠오른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그 소년은 그렇게 자기 스스로 가족을 만들고 있었고 우리는 따뜻하게 감싸안았다.
유명한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의 일화로 마무리를 하고 싶다. 어느 날, 한 학생이 “문명이 시작된 증거가 무엇이냐”고 마거릿 미드(Margaret Mead)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 대해 미드는 “문명이 시작된 첫 증거는 치료된 대퇴골이다(The first sign of civilization is a healed femur).”라고 답했다. 그 이유로, “동물의 세계에서는 뼈가 부러지면 움직이지 못하고 결국 죽게 되지만, 인간 사회에서는 누군가가 그 사람을 보살피고, 상처가 아물도록 도우며, 회복될 때까지 먹여주었기 때문에 대퇴골이 회복될 수 있었다”라고 덧붙였다.
본디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유약한 존재이고 연대할수록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 나는 남을 돕고 연대하는 것이 인.간.다.움 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사)희망커넥트의 심리자문위원으로 청소년들을 무료 상담하면서 오히려 내가 채워진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 관계가 다 그러하듯이 나눔 역시 상호작용을 일으키는 것 같다. 따뜻한 에너지가 오고가며 점점 연결감이 강해져 서로가 심리적으로 단단해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치열한 경쟁을 경험하며 본성의 선함과 이타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크다. 어른인 우리부터 의도적으로 잠재된 이타성을 깨워 주변인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조금씩 미치는 본보기가 되어주면 좋겠다. 그리고 가끔은 이 어려운 시절을 살아가는 주변의 아이들에게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유를 내어 보시기를 부탁드리고 싶다. 끝으로, 조병화 시인의 <나 하나 꽃 피어>를 읊조리고 싶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 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도 말하지 말아라
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 온 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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