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순간들1] This Little Light of Mine

this little light of mine 

 

This Little Light of Mine

글.  김동현 부장판사(사법정책연구원)

 

 나는 지금 1년 기한으로 미국에 갔을 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는 제목에 게시된 Odetta Holmes의 노래 “This Little Light of Mine”을 함께 들으시길 권하고 싶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던 때는 2월이었다. 떠나기 직전까지 이어진 형사재판에 밤샘을 해가며 몰두해 있어야 했는데, 덕분에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비행기를 타기 며칠 전 몇 사람의 피고인을 법정구속하고, 또 몇 명의 보석신청은 기각하였다. 형사재판을 담당하는 입장에서는 늘 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왠지 그때는 내가 내리는 결정이 심히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인신구속의 결정을 언제 평온한 마음으로만 한 적이 있었겠는가마는, 비행기가 곧 떠나는 시점에 쫓기는 심정으로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는 결정들을 하고 있노라니, 그 안에서 고통받을 사람들의 심정이 왠지 강박적으로 증폭되어 다가오는 것 같았다. 비행기를 타고도 내가 내린 결정의 여운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곧 내 앞에 다가오고 있는 휴식과 옥중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의 고통이 더 극적으로 대조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에 건너가 차를 사고 나서 처음으로 한 일은 여행을 떠난 것이었다. 마치 그 어떤 어둠의 마수로부터 도망치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가족을 이끌고 나는 북부 버지니아를 출발하여 남쪽으로 차를 달렸다. 미국은 큰 땅이었다. 뺨을 스치던 2월의 찬바람은 점차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온화해져 갔고, 가지가 앙상하던 나무들도 점차 푸르른 잎사귀들을 품에 안더니 어느덧 그 모습이 야자수들로 변해 가고 있었다. 새벽에 출발하여 한낮을 지나 날이 다시 어둑해졌지만, 길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미국은 큰 땅이었다.
 처음으로 짐을 푼 곳은 서배나(Savannah)라는 곳이었다. 잘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조지아 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 역사의 정취가 많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시내는 다른 오래된 도시들이 그런 것처럼 고풍스러운 건물들 사이로 벽돌길이 깔려 있었고, 항구에는 크고 작은 배들이 오가고 있었다.
 서배너 근교에는 웜슬로(Wormsloe Historic Site)라는 명소가 있었다. 과거에는 노예노동으로 운영하던 대형 플랜테이션 농장이었는데, 400그루 정도의 오크트리로 우거진 1.5마일 진입로의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긴 오크트리 길이라고 알려져 있다.
 지금은 농장으로 운영되지 않고 관광객의 입장료 수입으로 유지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엄청나게 큰 목화농장이었다고 한다. 농장 이곳저곳을 거닐면 옛 집터와 남북전쟁 때의 요새 터가 남아 있고, 흑인 노예가 생활하던 오두막도 재현되어 있었다. 지금은 비어버린 들판과 습지에는 갈대가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흑인 노예들이 뙤약볕 아래 땀 흘려 목화를 따고 있었을 것이다. 땀을 닦는 흑인 노예, 감독관의 채찍질, 그리고 쓰러지는 흑인 노예의 모습, 도망치다 붙잡힌 노예들에 대한 가혹한 체벌 같은 장면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고된 하루 노동의 피로와 노예 생활의 설움을 탄원하는 흑인들의 기도와 노래까지도. 왠지 마음이 애잔해졌다. 흑인들의 고통을 낭만화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아니다. 그 장면들은 엄연히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재현된 것들이었다. 나는 역사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흑인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감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기억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한 것은 하나의 복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이후로 미국에 있는 동안 나는 줄곧 고통받았던 흑인들의 삶을 생각하곤 했다. 남북전쟁의 역사에 대해 공부했고, 그것이 미국의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얼마나 많은 이들을 파멸로 몰고 갔는지, 그 이후 분열과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미국의 역사가 비틀거린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미국의 역사를 알고 나면 미국의 노래들에 묻어 있는 애수의 정체가 어떤 것이었는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미국의 역사에는 흑인들의 고통의 삶이 녹아있었다. 헌법 수업 시간에 알게 된 미국 헌법의 역사는 흑인들이 인간다운 삶을 조금씩 회복해 나간 역사이기도 했다.
 흑인들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참혹한 것이었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흑인 노예들은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여전히 백인들을 위해 궂은 노동을 하면서 살았다. 백인들과 같은 학교에 다닐 수도 없었고, 흑인을 받지 않는 모텔과 술집이 허다했으며, 백인들의 동네에 집을 살 수도 없었다. 많은 영화와 책들이 무수히 이런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기도 하지만, 또한 그 모든 이야기들이 미국의 헌법 교과서에 등장한다. 나는 미국의 헌법이 차별받고 소외받던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인간됨을 회복해 가는 과정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Loving 부부 사건(Loving v. Virginia)은 그때 읽었던 판례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었다. 백인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 백인과 유색인종의 결혼을 금지했고, “피 한 방울 규칙(one drop of blood test)”에 따라 흑인의 피가 조금이라도 섞였으면 그를 법적으로 흑인으로 보았다. 버지니아의 인종보전법(Racial Integrity Act of 1924)은 백인과 유색인종의 결혼은 물론이고 성관계마저도 범죄로 보았다. 인간의 야만이 이 지경에 이를 수가 있을까 기가 막히기도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겨우 한 세기도 지나지 않은 일이다. Loving v. Virginia 사건은 인종 간 결혼을 금지하는 인종보전법을 위헌으로 선언한 기념비적 판결이었다. 1967년의 일이었다. 민권법(Civil Rights Act)이 제정되고 3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1964년 민권법이 제정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차별이 금지될 때까지, 아니 사실은 그 이후로도 미국의 흑인들은 가혹한 차별과 학대 속에서 고통받았다. 흑인남성들은 본능에만 지배를 받는 잠재적 강간범으로 그려졌고, 백인우월주의자들은 흑인들을 납치하여 린치를 가하고 나무에 피를 흘리는 흑인들의 시체를 내걸었다. 백인들은 그 모습을 보고 악마를 퇴치하는 양 환호했다.
 미국 재즈의 3대 디바로 불렸던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는 그 광경을 빗대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s)”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남녘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려있네
 나뭇잎에도 뿌리에도 피가 흐르고
 검은 몸뚱이가 남녘의 미풍 속에 흔들리네
 이상한 열매가 포플러 나무에서 흔들리고 있네
 Southern trees bear a strange fruit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
 Black bodies swingin’ in the Southern breeze
 Strange fruit hangin’ from the poplar trees


 그러나 백인들은 그 노래조차도 조롱했다. 그 시절의 흑인들은 모두가 절망을 안고 살았다.
 뉴욕을 여행할 때 브루클린에 있는 한 흑인 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교회 안은 온통 흑인들로 가득했고 드문드문 나와 같은 관광객들이 보일 뿐이었다. 흑인들은 저마다 반가운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악수와 포옹을 하며 떠들썩했다. 부산스러운 신도들의 예배당 입장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장내가 잠잠해질 무렵, 예배가 시작되고 가스펠이 울려 퍼졌다. 그러자 순간 내 주위의 흑인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꺼번에 일어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엄숙한 예배에 익숙해 있던 나에게는 놀라운 장면이었다. 그것은 한편 축제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는 왠지 그들 속에 감출 수 없는 슬픔의 감정이 들어있다고 느꼈다. 그 춤에는 차별받고 소외받는 이들의 회한 같은 것들이, 그러나 이 땅의 고통이 사라질 영원한 천국에 대한 소망과 환희 같은 것들이, 물결이 몸을 뒤집듯 감정과 감정을 오가며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신앙에 대해서는 약간의 냉소를 가지고 있다. 신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신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들은 대체로 믿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냉소적인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신비를 깊이 느끼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흑인들의 노래를 들을 때이다.
 “This little light of mine”은 종교적 메시지가 가득한 가스펠곡이지만, 20세기 초중반에 전개되었던 흑인민권운동의 주제가와도 같은 노래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가수이자 민권운동가였던 오데타 홈즈(Odetta Holmes)는 이 노래를 부르며 사람들과 함께 저항했다.

 

 “내 안의 작은 빛. 비치게 하리라.”
 This little light of mine. I’m gonna let it shine


 오데타 홈즈는 이 노래를 부르며, Marianne Williamson의 시를 대중에게 읽어주곤 했다.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은 무능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두려움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어둠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빛입니다.
  우리는 모두 빛을 비추도록 부름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러한 것처럼.”
  Our deepest fear is not that we are inadequate.
  Our deepest fear is that we are powerful beyond measure.
  It is our light, not our darkness, that most frightens us.
  We are all meant to shine, as children do.

 

 한때는 나도 그 시절 백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 본 적이 있다. 윤리의 기준이라는 것은 시대상황에 의존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고, 나는 그들을 이해하려고 해 본 적이 있다.
 그러나 흑인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 시절 백인들은 용서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매주 교회에 갔겠지만, 아마도 천국에 들어가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구원이란 그의 삶이 신의 은총으로 변화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시절 백인들이 흑인들의 노래를 들었다면, 들었는데도 깨닫지 못했다면, 그들의 삶과 신의 은총이 양립가능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흑인들은 고통 속에서 노래를 불렀다. 암흑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 신이 허락할 한 줄기 빛과 같은 은총과 구원을 기다리면서.
 그들은 이미 그 빛을 가지고 있다고 노래했다. 그리고 암흑 같은 이 세상을 비추겠다고 했다. 그 노래가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그 속에서 신의 신비를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어쩌면 시적이라고 말할 만하다. 신앙의 본질을 희망의 능력으로 보았던, 그리하여 사후와 피안이 아닌 지금 현재 발 딛고 서 있는 여기를 마침내 변혁해내는 희망을 이야기했던 신학자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이들의 노래를 통해 현현해 오고 있다.
 이 노래를 두고 신을 공방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아니, 신을 공방할 필요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노래 속에 구원이 임하고 있으므로.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과 믿음으로, 이미 그 나라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고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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