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발견1] 책 속 그곳으로 여행떠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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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 그곳으로 여행 떠나기


글. 김수정 판사(안산지원)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행복한 활동을 해야 하고, 행복한 활동을 하려면 먼저 무엇이 행복한 활동이고 무엇이 불행한 활동인지 구분해야 한다. 행복 전문가 서울대 최인철 교수가 쓴 『굿라이프』에는 행복한 활동과 불행한 활동을 정량적으로 구분하여 정리한 ‘행복 칼로리표’가 실려 있다. 미국의 연구팀이 행복을 재미와 의미의 영역으로 구별하여 일상의 많은 경험이 주는 행복감을 측정한 것인데, 조사 대상이 된 수십 개의 활동 중 의미와 재미 모두 가장 높은 활동이 바로 여행이었다. 최인철 교수는 “행복한 삶이란 여행을 자주 하는 삶이다”라는 선언이 가능할 정도라고 설명한다. 행복 칼로리표에 따르면 여행 외 재미와 의미를 추구할 수 있는 활동은 데이트(여행 다음으로 의미와 재미가 높았다), 산책, 운동, 대화, 쇼핑, 먹기이다.
그런데 여행이야말로 위 모든 활동이 포함된 종합 활동이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떠나(데이트), 걷고(산책, 운동), 쇼핑하고(쇼핑), 이야기하고(대화), 맛난 현지 음식을 사 먹는다(먹기). 그렇다면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야말로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는 법을 아는 지혜롭고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했었다-만 20개월의 ‘아가님’을 모시기 전까지. 지금은 여행이 그립다가도 비행기에서, 이동하는 차량에서, 분위기 좋은 고즈넉한 식당에서 “내 맘마를 내놓아라! 졸리다! 여기는 어디냐, 싫다! 당장 나가자, 응애!”라고 목 놓아 외칠 아기의 모습을 상상하면 신속하게 생각을 돌려 이번 주말에는 어느 키즈 카페를 갈까 라며 건설적이고 현실적인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지금은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쳐 집 밖으로 나가는 생각 자체가 어렵게 되었지만.
이렇게 내외적 요인으로 더 이상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된 지금 기분전환이 되는 것은 책과 영화 등 영상물 시청이다(둘 다 행복 칼로리표상 순위가 높다). 늦은 밤 책을 읽거나 넷플릭스에서 <더 크라운>, <빨강머리 앤>을 볼 때면 나는 내가 지금 있는 곳이 새근새근 자는 아기 옆이라는 것, 그 아기가 조금 전에는 결단코 잠들지 않겠다고 주장하면서 두 시간 동안 악을 쓰면서 울었다는 것, 혹시 아기가 독서등 불빛에 깨어나기라도 했다가는 나는 그날 밤 잠은 다 잔 것이라는 엄중한 현실을 잊어버릴 수 있다. 내 마음은 책과 영상물의 배경이 되는 어느 먼 나라, 내가 어린 시절부터 꿈꾼 나라로 달려가곤 한다. 이하에서는 필자의 버킷리스트 최상단에 있는 책 속 배경 여행지와 그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와  채스워스 하우스(Chatsworth House) 
 - <오만과 편견>, <공작부인:세기의 스캔들>, <피터 래빗>의 배경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알게 된 것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덕이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오만과 편견』을 시작으로 『엠마』, 『설득』, 『감성과 이성』, 『노생거 사원』 등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빠졌었는데, 『오만과 편견』은 남자 주인공 다아시에 대해 자신이 편견을 가졌음을 깨닫고, 의기소침한 여자 주인공 엘리자베스가 기분 전환차 외숙모 부부와 함께 호수 지역(Lake District)으로 여행을 떠나는 데서 분위기가 전환된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여행 중 외숙모 부부와 함께 다아시의 저택인 펨벌리를 방문하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다아시를 만나게 되고 해피엔딩으로 급전개가 이어진다. 『오만과 편견』을 읽을수록 레이크 디스트릭트와 펨벌리에 대한 낭만적 환상은 점점 커져간다. 펨벌리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저택을 구경하던 엘리자베스가 다아시를 마주쳤을 때의 묘사란. 어른이 되어 영화 <오만과 편견>에서 펼쳐진 레이크 디스트릭트와 펨벌리를 보았을 때도 로맨스와 그 배경에 대한 설렘과 동경은 옅어지지 않았다.
영화에서 펨벌리의 촬영지는 영국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귀족 가문 데본셔 공작의 본거지 채스워스 하우스이다. 이곳을 배경으로 한 유명한 영화가 더 있는데, 2008년 아카데미 의상상 수상작 <공작부인:세기의 스캔들>이다. 주인공인 조지아나 캐번디시는 현 소유자인 12대 공작의 조상인 제5대 데본셔 공작의 부인이고, 채스워스 하우스는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조지아나의 집이었다.
조지아나는 고(故) 다이애나비의 5대조로(다이애나비는 조지아나 남동생의 후손), 남편의 정부가 공개적으로 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먼 후손인 다이애나비와 유사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빅토리아 여왕 시절 총리를 지낸 찰스 그레이 백작과 깊은 연인 관계가 되어 딸까지 낳았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홍차 얼 그레이(Earl Grey)의 이름은 바로 그 그레이 백작에게서 유래되었다(채스워스 하우스의 티룸에서 얼 그레이를 팔지 궁금하다). 만화 『흑집사』에 나오는 찰스 그레이는 그레이 백작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채스워스 하우스의 소유주 데본셔 공작가는 미국 케네디 가문과도 인척 관계가 있다. 제10대 데본셔 공작의 후계자 해링턴 후작은 J. F. 케네디의 넷째 동생 캐슬린 케네디의 남편으로 결혼식 얼마 후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전사하였다. 후작의 죽음은 영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모범 사례로 꼽힌다.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피터 래빗의 배경이기도 하다(기념품도 구입 가능하다). 아쉽게도 피터 래빗이 인기를 끌 때 나는 막 학용품의 세계를 졸업한 상태였다. 그런데 혹시 나중에 아기가 커서 학용품을 살 나이가 되었을 때, 피터 래빗을 좋아하면 같이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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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                    채스워스 하우스(Chatsworth House)

 

빨간 머리 앤과 프린스 에드워드 섬(Prince Edward Island)
『빨간 머리 앤』은 주로 한 권짜리 아동 소설로 알려져 있다. 빨간색 머리의 앤이 머릴러 커스버트와 매슈 커스버트에게 입양되어 성장하고, 길버트와 그 유명한 석판 사건 이후 앙숙으로 지내다가 매슈의 죽음을 계기로 결국 화해하는 것으로 끝나는 바로 그 이야기. 그러나 원제는 ‘그린 게이블스의 앤(Anne of Green Gables)’으로, 앤과 앤의 자녀들, 앤의 주변 사람 이야기를 다룬 총 10권짜리 소설 중 첫 번째 권이다.
대강의 흐름만 보면, 앤은 학비를 모아(2권) 대학에 진학하여 요새 말로 ‘인싸’로 대학 생활을 즐기고(3권), 졸업 후 길버트와 약혼하였다가(4권) 2년 후 결혼하여(5권) 일곱 아이를 두며(6, 7권), 1차 세계대전의 종전(8권)으로 끝이 난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에이번리 역에서 매슈를 기다리던 열 살짜리 고아 소녀 앤은 이야기의 끝 무렵에는 아들들을 군대에 보낸 50대의 어머니가 되어 있다. 앤의 위치와 역할은 어린 소녀에서 대학생, 직장인, 아내, 자녀를 둔 어머니로 변화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성숙해지지만,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삶의 자세, 참신한 유머 감각, 엉뚱하면서도 새로운 상상력이라는 앤의 내면은 변하지 않는다. 열 권이라는 길이가 전혀 지겹지 않은 이유이다. 다만 이 책에 빠져들었던 고등학교 때에는 앤 같은 상큼한 대학 생활이 펼쳐질 줄 알았건만, 머지않아 책은 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앤 시리즈의 주된 배경은 앤의 대학 생활을 다룬 3권을 제외하고는 캐나다의 동쪽 끝, 대서양 언저리에 위치한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다. 제주도 크기의 3배, 인구는 제주도의 1/4인 14만 명에 불과한 작은 섬이지만, 빨간 머리 앤의 배경이 되는 그린 게이블스, 저자인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생가, 에이번리 마을을 재현한 곳, 퀸스아카데미의 실제 배경인 샬롯타운 등 빨간머리 앤을 기억하고 먼 길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덕심’을 채우기에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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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 게이블스(Green Gables)

 

미국 연방대법원
 - 『지혜의 아홉기둥』, 『더 나인』, 『최후의 권력 연방대법원』의 배경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존 볼턴(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제임스 코미(전 FBI 국장), 존 폴 스티븐스의 공통점은? 전혀 공통점 없어 보이는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 공직 생활에 대한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썼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고위 공직자가 물러나거나 사망하면 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회고록이나 자서전이 나오는 것 같다. 정치인이야 그렇더라도 법조인의 경우에까지 직접 다룬 사건과 동료들과의 관계, 법철학을 외부에 드러내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 문화와는 차이가 있다. 연방 법관으로 한 번 임명되면 사망하거나 자발적으로 은퇴할 때까지 수십 년 종신으로 근무하기 때문에 경험의 기회와 폭이 넓고, 사회의 발전과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판사의 가치관과 법철학도 변화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지 추측할 뿐이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관의 변화가 주로 공화당 지명 보수 성향의 대법관에게서 주로 관찰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분리된 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고 선언한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Brown v. Board of Education)와 그 미란다 판결을 주도한 얼 워런 대법원장은 공화당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지명하였다(나중에 아이젠하워는 워런의 변심을 보고 워런을 대법원장으로 지명한 것이 ‘자기 인생 가장 큰 실수’였다고 공개적으로 후회했다). 그 유명한 낙태 허용 판결 ‘로 대 웨이드(Roe v. Wade)’의 주심 대법관 해리 블랙먼도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 의해 대법관에 지명되었으나 결과적으로는 민주당 빌 클린턴 대통령 때 은퇴를 선언하여 민주당에 후임 대법관 지명 기회를 주었다.
그 외에도 부시 대 고어(Bush v. Gore)에서 소수의견을 쓴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공화당 포드 대통령 임명)과 성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한 수터 대법관(공화당 아버지 부시 대통령 임명) 모두 진보 성향을 보이다가 민주당 대통령 재임 시절 은퇴를 선언했다. 이러한 배신의 역사(?) 때문에, 최근 양극화된 미국에서는 연방대법관의 신규 지명 시 법적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것을 강조하면서 후보자가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충성심을 보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 건물은 생각보다 늦게, 1930년대 윌리엄 태프트 연방대법원장 시절 건축이 시작되어 1935년 완성되었다. 윌리엄 태프트는 1913년 대통령직을 마치고 1921년 연방대법원장이 되었는데,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우리에게는 달갑지는 않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미국 역사상 행정부와 사법부의 수장을 모두 지낸 유일한 인물로, 대통령으로서의 평판은 별로지만 연방대법원장으로서의 평판은 매우 좋다고 한다. 본인도 대통령보다는 연방대법원장이 되는 것이 꿈이었다고 말하고 다녔다고. 태프트 대법원장은 과거 경험(?)을 살려 여러 차례 예산 단계에서 거절되었던 연방대법원 건축 예산을 따낸 것으로도 사법부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연방대법원 건물은 워싱턴 D.C.의 중심부, 국회의사당과 의회 도서관 사이에 위치해 있다. 연방대법원을 방문하기 전 이곳에 있었던 연방대법관들과 그들의 이야기, 연방대법원의 역사에 대한 책을 읽어보는 것도 즐거움을 더할 요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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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연방대법원(Supreme Court of the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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