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음악이 선사하는 낭만 가을

트렌드에 주목하라

클래식음악이 선사하는 낭만 가을

2018.09.03

트렌드에 주목하라

9월이 돼도 여름 끝자락은 여전히 길지만 그래도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가을이 성큼 다가왔음을 느끼게 한다. 여기저기 정열적인 한여름의 음악축제로 들떴던 마음도 계절을 따라 조금은 차분해지니 어느덧 클래식음악이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를 낭만 가을로 이끈다.

가을 클래식의 대명사, 비발디 4계 ‘가을’
무엇보다 가을은 곡식이 익고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풍요로운 시기이자 고즈넉한 정취를 누리는 낭만이 충만한 때이지만, 떨어진 낙엽을 밟으며 인생을 돌아보는 삶과 죽음, 채움과 비움의 변화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사색의 계절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을의 색깔에 따라 어울리는 클래식음악도 각각 따로 있다. 단연코 가을의 풍요로움을 대표하는 작품은 비발디 4계의 ‘가을’이다. ‘비발디’ 하면 자동으로 4계가 떠오르듯, 계절이 바뀔 때마다 들을 수 있는 비발디 음악은 언제 들어도 생생한 클래식음악의 고전으로 사랑받고 있다.
바로크 후기 J. S. 바흐(1685~1750)와 동시대인인 비발디(1678~1742)는 공식적으로 가톨릭 사제의 직함을 갖고 음악가로 활동한 18세기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사제 직무만 수행하기에는 몸이 약해 베네치아 피에타 여자 고아원 원장으로 가게 된 것이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많은 협주곡을 남기게 했다. 작곡가로서 음악적인 재능과 교육자로서 안목이 뛰어났던 비발디는 고아원을 운영하며 바이올린, 첼로 등 현악기를 가르쳤다. 당연히 많은 아이들이 다양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도록 여러 협주곡을 작곡할 수밖에 없었고 이들의 연주실력은 베네치아를 넘어섰다. 그 결과 당대 종교음악과 오페라 작곡가로서도 상당히 명성을 날린 비발디가 현재 우리에게 500여개의 작품을 남긴 바로크 협주곡의 대가로 남아있으며, 그 중의 백미가 바로 4계이다.
비발디 4계는 「화성과 창의에의 시도」라는 작품집 12곡 중 첫 네 곡에 해당한다. 작자 미상의 서정시 소네트에 기초해 위대한 자연이 아닌 소박한 자연을 충실하고 유쾌하게 묘사했다. 3악장으로 이루어진 바로크 협주곡에서 1악장, 3악장은 빠르고 2악장은 느리다. 비발디는 독주악기에 독립성을 부여하면서 독주와 합주간의 긴장과 대비를 부각시켰고 2악장의 아름다움을 중요시했다. 그렇기 때문에 비발디 4계는 명쾌하고 생동감 있는 음악표현을 지닌 대표적인 바로크 협주곡으로 손꼽힌다.

가을의 낭만을 고스란히 담은 선율,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20세기 초 러시아 작곡가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피아노협주곡 2번은 우수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특유의 서정성으로 낭만적인 정취가 그윽하다. 본인 자신이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라흐마니노프는 20세기에 새로운 음악을 추구했던 다른 현대음악 작곡가와 달리 낭만주의 전통의 연장 선상에서 자신만의 개성을 담은 작품으로 승부를 걸었다. 4개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중에서도 2번은 화려하고 독창적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작품의 실패와 좌절에서 비롯된 정신적 고통을 딛고 일어나 다시 음악을 향한 열정으로 협주곡 2번을 작곡했듯이, 1악장의 정염은 불꽃같이 활활 타오른다. 그러나 2악장으로 넘어가 잔잔한 음악이 흐르면 클래식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마음이 촉촉이 젖고 3악장이 지닌 우수와 서정성에는 저절로 눈을 감게 된다. 대담한 화성과 아름다운 선율로 누구나 한 번 들으면 쉽게 잊을 수 없는 매혹적인 피아노 음악은 라흐마니노프를 규정짓는 대표적인 특징이다.

고독의 향기를 품은 곡, 슈베르트 현악4중주곡 ‘죽음과 소녀’
떨어진 낙엽을 보며 겨울 문턱에 선 가을은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 쓸쓸함과 외로움, 고통과 회한은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과도 같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슈베르트(1797~1828)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그의 현악4중주곡 14번(D.810) ‘죽음과 소녀’는 슈베르트가 느꼈던 인생에 대한 허무함과 근원적인 슬픔을 그대로 담고 있다.
낭만주의 시기 가곡의 왕이라는 호칭에 걸맞게 작곡가 슈베르트에게는 노래가 중요했다. 그의 교향곡과 소나타에도, 악흥의 순간, 즉흥곡 장르의 피아노 작품에서도 슈베르트의 노래는 빛을 발했다. 나아가 실내악곡에도 가곡을 넣었다. 그 유명한 슈베르트 ‘송어’ 피아노5중주곡에 가곡 ‘송어’(Die Forelle)가 4악장에 들어가 있듯이, 현악4중주곡 ‘죽음과 소녀’ 역시 가곡 ‘죽음과 소녀’(Der Tod und das Mädchen)가 2악장에 등장한다.
독일 시인 마티아스 클라우디우스(M. Claudius)의 시 ‘죽음과 소녀’는 죽음의 신과 소녀의 대화를 암울하게 적고 있다. 나는 아직 젊다고, 저리 가라고 외치는 죽음의 공포에 떠는 소녀의 절박한 부르짖음과 자신의 팔 안에서 편안히 잠들 수 있다고 유혹하는 죽음의 신. 슈베르트는 그 스스로 죽음이 영원한 안식이라고 믿었던 것일까. 클라우디우스 시에 음악을 붙여 가곡을 만들고 기악곡에도 집어넣었다. 현악4중주곡 1악장 첫 시작부터 베토벤 운명 교향곡의 운명의 동기를 연상케 하는 셋잇단음표 진행이 강렬하게 등장하고 2악장에서는 ‘죽음과 소녀’ 주제가 변주곡으로 어둡게 흐른다. 그러나 비극성이 강하게 내포된 작품의 3악장조차 슈베르트 음악이 지닌 낭만성은 노래하는 서정적 선율을 통해 아름답게 흐른다. 마지막 4악장에서 춤곡을 연상케 하는 역동적인 에너지는 죽음의 운명을 딛고 일어선 긍정적인 결말을 기대하지만, 결국 단조로 마무리됨으로써 비극적 결말을 암시한다. 마치 음악에 대한 열정과 노래가 주는 밝은 힘이 슈베르트의 고통과 그의 짧은 삶을 이기지 못했듯이.

비발디 4계의 가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2번, 슈베르트 현악4중주곡 ‘죽음과 소녀’는 각각 가을의 풍요와 낭만, 쓸쓸한 이미지로 강렬하게 마음을 뚫고 들어온다. 위 세 곡은 시기적으로 바로크 후기에서 후기 낭만에 걸쳐있고 편안히 음악을 감상하기에는 슈베르트 현악4중주곡이 듣기에 다소 까다로울 수 있다. 하지만 비발디와 라흐마니노프를 거쳐 슈베르트 작품 단 세 곡을 집중적으로 듣는 것만으로도 가을은 이미 충만하게 다가온다. 곡 자체의 완성도가 높기 때문에 음악만으로도 다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글 오지희(음악평론가, 백석문화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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