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신재 판사 (서울남부지방법원)
『지영』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영이라는 사람이 자기 젊은 날의 이야기를 그린 책입니다. 지영은 모던바와 키스방에서 성노동자로 일했고, 호스트바에서 성을 매수하기도 했으며, 경계성 인격장애(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를 앓으며 남자 친구인 정호를 사랑했습니다. 책에는 그런 내용이 투박한 손 글씨와 그림으로 가득 그려져 있습니다.
『지영』을 읽은 제 감상은 다소 사적이고 내밀합니다. 이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지영』이 말하는 방식, 또는 ‘말하는 법’입니다. 2023년 2월 25일에 열린 『지영』의 출간기념회에 참여한 패널은 이렇게 말합니다.1) “성노동자는 욕을 먹기에 굉장히 좋은 사람들이다. 그 때문에 전략적으로 피해자로서 말하기, 특정한 피해자 상황을 재연해서 말하는 방식을 취해 왔고, 그것이 ‘성노동자의 말하기’로 관습화되는 현상이 있었다. 또는 성노동을 건강하고 주체적인 행위로 긍정하는 대항적인 말하기의 방식이 있었다. 그런데 『지영』은 그 틈새를 공략한다.”
또 다른 패널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영』은 특정한 목적을 가지지 않은 작품이고, 그러한 점에서 용감하다. 삶의 바깥에 있는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하나의 목적만을 가진 채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그런 복잡성을 계속 드러내면서 말하고 있다.” 『지영』을 보면 이게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책 속의 지영은 자신이 보고 들은 세상의 모습과 이에 내밀히 얽힌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말합니다.
지영의 생각과 욕망은 서로 모순되고, 복잡하며, 어느 면으로 뒤집어 보아도 칭찬받을 만한 구석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사회집단의 구미도 당기지 않는 말들입니다. 성을 구매하는 사람도, 구매하지 않는 사람도, 성매매 합법화에 찬성하는 사람과 찬성하지 않는 사람도,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던 사람도 모두 이 만화를 보며 조금씩은 마음이 불편할 것입니다. 지영은 뻔히 예견된 타인의 불편함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를 공격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영은 자기 자리에서 자기 말을 할 뿐입니다.
말하기의 어려움과 자기방어
우리는 모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일기장에서조차 솔직하기 어려운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일상 속에서 만들어진 평범한 마음을 전할 때에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자연히 보게 됩니다.
껄끄러운 부분은 살짝 건너뛰고, 나쁜 말을 하기 전에는 변명을 덧붙이고, 좋은 부분은 조금 부풀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고 싶은 내 모습을 조금씩 창작해 가는 것이 보통의 ‘말하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손가락질할 만한 일을 소리 내 말해야 하는 상황은 얼마나 무서울까요? 그런 자리에서 스스로 방어하기를 포기한다면 우리는 크게 다칠 것입니다.
저는 천만다행으로 아직까지 그런 위기에 처해 본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위기에 처한 사람을 자주 보는 자리에 있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 형사 법정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사람이 범죄(혐의를 받는 행위)에 연루된 자기 과거를 말할 때 얼마나 힘겨워하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증인들은 곤란한 질문을 던지는 검사와 변호인 앞에서 움츠러들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뻔히 기억이 날 부분까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거나, 아주 기본적인 자료에 어긋나는 잘못된 이야기를 호언장담하기도 합니다. 피고인들은 수사와 공판에서 오랫동안 되뇌어 이제 하나의 단단한 줄거리로 굳어져 버린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줄줄이 반복합니다. 내가 어쩌다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내 잘못은 무엇이고 잘못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검찰이 무엇을 오해하고 있는지. 나는 누구이고, 누가 되어야 하는지. 많은 피고인들이 그 단단한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피고인의 솔직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엿보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법정에서의 진심과 용기
증인과 피고인들이 마음먹고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손가락질받을 위험에 처한 채 자기 이야기를 말해야 하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단지 너무 많이 다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방어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씩 법정에서 아주 솔직한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법정에 선 사람이 마치 자리에 털썩 주저앉듯이 솔직한 마음을 내보일 때면 깜짝 놀라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지영』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모순되고 뾰족하며 손가락질받을 만한 진심을 그대로 꺼내어 놓는 솔직함입니다. 무엇이 저들에게 그렇게 용감히 자신의 마음을 꺼내 놓을 수 있게 하였는지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용기는 언제나 제게 귀한 선물처럼 느껴집니다.
누군가의 진심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기회는 정말 드물기 때문입니다. 빌리 조엘의 오래된 노래에 나오듯이, 솔직함이란 참 외로운 말입니다.
정성스레 듣는 법을 배워야
저는 듣는 자리에 있습니다. 증인과 피고인이 선 자리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안전한 자리입니다. 언젠가 제가 말해야 할 때도 오지만, 그 말 또한 듣는 자리의 연장입니다. “하루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소설가는 많이 듣고 적게 판단한다.’ 저는 법관도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재판연구원 시절에 함께했던 한 부장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일주일에 세 번, 한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의 말을 듣노라니 부장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제 일을 무사히 마치려면 저는 ‘정확히 듣는 법’을 익혀야 할 것입니다.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고, 믿어야 할 말고 믿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끔씩은, 사람으로서 의무를 다하려면 ‘정성스레 듣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피고인과 증인들의 정직한 마음을 듣게 될 때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지영』을 읽을 때 자세를 고쳐 앉고 열심을 다해 그 말을 들었던 것처럼, 증인과 피고인들의 말도 그렇게 들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듯이 나오는, 사람들의 모순되고 연약한, 정직한 마음들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용감함에 걸맞은 존중과 감사를 가지고 싶을 따름입니다.
『지영』을 통해 용기의 중요성 깨닫다
『지영』은 참 좋은 책입니다. 하지만 옆 사람에게 ‘이것 참 좋은 책이야’라고 추천하기는 쉽지 않은 책이기도 합니다. 소재도 점잖지 못하거니와, 딱히 교훈과 깨달음을 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어지럽게 흩어지는 온갖 이야기들 속에서 제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지영이라는 한 사람의 구체적인 존재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숨결이 손에 닿고 생각이 만져지는 듯 뚜렷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저는 『지영』에서 용감함을 보았고,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진심을 귀한 선물처럼 받았습니다. 그 이야기를 잊지 못한 탓에 저 또한 나름대로의 용기를 내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힘을 빌어, 조금 더 정직하게 말하고 조금 더 정성스럽게 듣는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각주
1) 『지영』을 출간한 주로출판사는 2023년 2월 25일에 ‘소수자의 말하기’라는 모토를 가지고 『지영』 출간기념회를 열었습니다. 출간기념회의 녹취록은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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