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의학 전문 기자의 삶과 사랑, 그리고 비전 - 홍혜걸 의학 박사

홍혜걸의학박사 

 

국내 최초의 의학 전문 기자, 의학 전문 방송 비온뒤의 대표 그리고 황우석 박사와의 인연·악연까지…. 최근 아내와 함께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대표적인 잉꼬부부로 이름을 알린 홍혜걸 박사를 만나 그의 삶과 사랑 그리고 비전에 대해 들어봤다.

 

 Q. 잘나가던 의대생이 군 복무를 마친 뒤 과감하게 전업을 선택했다.
만기제대를 한 건 아니다. 군의관으로 복무하다 의병 전역했다. 1년 4개월 만이었다.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그렇게 제대를 하고 집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당시 좋아하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즈음 실연을 했다.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그러다 문득 멋지게 성공해서 ‘혼자만의 복수를 하리라’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의대를 다니면서 사법고시에도 도전해 세상에 이름을 떨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생각이 들고 나서 리서치를 해봤다. 근데, 일제강점기 이후 벌써 3명이나 그런 사람이 있었다. 크게 실망한 그날 지하철을 탔는데 옆자리에 신문이 한 부 놓여 있었다. 집어 들어서 보니 중앙일보였다. 모집공고도 보였다. 의학 전문 기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가 글 쓰는 걸 좋아하고 사람 만나는 것도 좋아한다. 그렇게 해서 지원하게 됐다. 1992년 11월의 일이다.

 

Q. 국내 최초의 의학 전문 기자가 됐다.
당시로서는 첫 전문 기자였다. 적성에도 맞고 즐겁게 일했다. 물론 부끄러운 일도 많았다. 결국 그것이 신문사를 나오는 계기가 됐다. 황우석 사건에 대한 오명이다. 여전히 마음이 많이 아프다.

 

2002년 당시 홍혜걸 기자는 황우석 박사가 세계 최초로 줄기세포 관련 기술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것이 사이언스지에 게재된다는 최초 보도를 했다. 1면 톱으로 실린 이 기사로 이후 홍혜걸 기자는 관례를 깼다는 지탄을 받았다.


전날 일본 지지통신으로부터 소식을 들었다. 황우석 박사가 엄청난 일을 해냈다는 얘기였다. 곧바로 확인 절차를 거쳐 기사를 썼다. 그런데 이런 대단한 일을 세계적 전문지에 실리기 전에 발표했다는 이유로 여론의 지탄을 받았다. 이 자리를 빌려 분명히 말하고 싶다. 논문 발표 전에 기사를 썼다는 것이 엠바고를 깼다는 의미가 아님에도 그런 욕을 먹게 됐다. 그것이 엠바고였다면 황 박사가 모든 언론을 상대로 보도 자제를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나의 특종이 맞았다. 관행이라지만 어쨌든 피해를 준 건 맞았기 때문에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다. 바로 미국 시애틀로 날아가 황 박사를 만났다. 가서 미안하다고 했다. 당시 황 박사는 “알았다”며 “귀국할 때 이 이야기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말해줬다. 고마웠다. 실제로 황 박사는 그 약속을 지켰다. 귀국 기자회견에서 황 박사는 기자들의 질문에도 나의 기사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Q. 이후 방송에서 황 박사에 대한 옹호 발언을 해 다시 한번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하지만 마음의 빚은 여전히 있었다. 그래서 황의 백기사로 나서게 된 것이다. 4개 방송국의 토론에서 황 박사를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이것이 문제라면 문익점도 감옥에 가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몇 달 후…, 황 박사의 논문이 진짜 엉터리였음이 드러났다. 내 직업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다. 당시 많은 유명인이 나와 함께 황 박사를 옹호하기도 했지만 나는 ‘전문가’였다. 너무 창피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진실을 보도하지 못했다. 그래서 신문사를 퇴사하게 됐다.

 

Q. 그럼에도 최초의 의학 전문 기자로서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의학 저널리즘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당시 전문 기자를 많이 뽑았다. 음악, 철학, 미술 등 주로 박사를 많이 뽑았다. 하지만 이제까지 살아남은 건 의학 기자밖에 없다. 의사를 뽑아 기자를 시켜보니 밥값을 하더라는 생각을 여러 언론사에 인지시켰다는 것, 그것이 내 자부심이다.

홍혜걸 

 

Q. ‘비온뒤’라는 이름의 의학 전문 매체를 설립했다.
의학 저널리즘. 내 본업을 이어가고 싶었다. 기존의 매체로는 한계를 느꼈다. 직접화법으로 글을 쓸 기회가 아무래도 적었기 때문이다. 언론들의 상업주의가 싫었다. 방송에 의사가 나오면 대부분 돈을 낸 상업 광고다. 아무래도 돈을 받고 기사를 쓰려니 신뢰도가 떨어지지 않나. 이후 포털사이트가 등장했는데 여긴 더 심하다. 병에 대한 질문 하나에도 온갖 광고로 도배가 된다. 돈을 많이 내면 위에 올라가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너무 오염됐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정직한 의학 콘텐츠를 만들어보겠다는 것이었다. 2011년 ‘비온뒤’를 세웠다. 서울시에 등록된 인터넷 신문사다. 처음에는 친구와 둘이 시작했다. 그동안 방송과 강연을 하면서 정리한 내용들에 의미를 담아보고자 했다. 훌륭한 의사들을 모아 콘텐츠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 현재에 이르렀다. ‘비온뒤’. 비온 뒤에 땅이 굳고 무지개가 뜬다는 의미다. 치유와 건강을 상징한다. 물론 처음에는 보는 사람도 없고 참 힘들었지만 요즘은 조금씩 반향이 있다. 현재 구독자가 6만명 정도 된다. 자신감도 생겼다. 이 미디어를 잘 키우고 싶다.

 

홍혜걸 

 

Q. 부인과 함께 출연한 여러 방송을 통해 ‘잉꼬부부’의 대명사로 불린다.
‘잉꼬부부’는 맞다. 일단 내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군대에 갔다 온 아들 둘에게도 늘 두 가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좋은 여자란 먼저 너와 결이 맞아야 한다는 말이다. 객관적인 미모와 학력보다는 결이 맞아야 최고의 신붓감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그 사람도 너를 좋아해야 한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집사람은 그 두 가지가 딱 맞는 사람이다. 만난 지 꼭 92일 만에 결혼했다. 1%의 걸림돌도 없었다. 24년을 함께했다. 조금 식었을지 모르지만 가장 사랑하고 또 고마운 친구다. 사람을 보는 관점은 다양하겠지만 나의 경우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태도나 분위기에서 격이 느껴지는 사람을 찾았다. 집사람이 그랬다. 한 세미나장에서 기자와 의사로 만났다. 첫 데이트를 마치고 시청역 앞에서 헤어지는데 아주 특별한 기분이 느껴졌다. 뒷모습에서 진한 잔상이 남았다. 꼭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의사를 그만두고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것이 ‘하자’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 같다. 하지만 집사람은 그런 인식이 없었다. 결혼한 지 1년이 지났을 때 나에게 박사 학위에 도전하라고 했다. 5년이 걸려 결국 37살에 박사를 마쳤다. 그것이 지금 나의 큰 자산이 됐다.

 

Q. 돈 관리는 누가 하나.
전적으로 집사람이 한다. 잘 벌 때도, 못 벌 때도 늘 그랬다. 일단 회계에 밝다. 가계부를 100원 단위로 쓸 만큼 관리에 철저하다. 많은 의사를 만나지만 경제권을 아내에게 맡긴 친구들이 더 잘 산다. 신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잉꼬부부’가 되는 요건이다. 아서 왕의 전설에 보면 마녀의 수수께끼 이야기가 나온다. 낮에는 추녀·밤에는 미녀, 밤에는 추녀·낮에는 미녀인 여자 중에 선택해야 했다. 아서 왕의 답은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하겠다’였고 그것이 정답이었다. 나 또한 동의한다.

 

Q. 의사이자 기자, 또 칼럼니스트 홍혜걸이 생각하는 정의로운 삶은 무엇인가.

‘황금률’이 적용되는 사회다.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는 말이 있다. 정의란 그런 것 같다. 바라는 것은 많으면서도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또 경제적인 관점에서 노력보다 누리는 것이 많은 사람이 적은 사회, 하는 만큼 대접받고 또 대접받고자 하는 만큼 일하는 사회,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한다.

 홍혜걸 

 

 

글_이충진·사진_장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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