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상미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주무관
지리산 둘레길 3구간
춘향이와 몽룡이 덕분에 익숙한 듯했지만 그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는 도시, 이곳 남원에서 2020년 나의 법원생활이 시작됐다. 몇 년의 수험생활 끝에 비로소 시작된 법원 생활은 환경도, 사람도, 일도, 지금 생각하면 별일 아닌 모든 것들이 크게 다가오는 순간들로 가득했다. 낯선 시간들이 쌓여가고 익숙함이 반가워질 때쯤, 우리 재판부 참여관님의 제안으로 남원지원 식구들과 함께 지리산 둘레길 그중에서도 3구간의 일부인 매동마을을 시작으로 중황마을 지나 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해져버린 등구재황토방 식당에서 점심 식사 후, 금계마을을 끝으로 하는 여정을 함께 하는 소중한 기회를 얻었다. 토요일 오전, 평소처럼 회사로 출근(?)하여 다 같이 차를 타고 매동마을 입구로 이동했다. 별다른 준비물도 없이 가벼운 마음과 더 가벼운 배낭을 메고 시작했던 여정은 생각보다 힘들었지만, 또 언제 이 푸르름을 느껴보나 싶어 무작정 걸었다.
하루만 걸을 수 있다면 이 길을 걷겠다
지리산 둘레길의 출발은 2004년 ‘생명 평화’를 이 땅에 뿌리고자 길을 나선 순례자들의 입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지리산 순례길이 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나왔다고 했다.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박성권 참여관님의 추천으로 걷게 된 이 3구간은 2008년 최초 시범구간으로 먼저 알려졌고, 88고속도로와 접근성이 좋아 둘레길을 찾는 꾼들이 가장 좋아하는 코스라고 한다. 특히 이 구간에서는 지리산 천왕봉 및 지리산 주능선을 보면서 걸을 수 있다. 이원규 시인의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이라는 시 중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구간을 걸으며 반야봉을 보면 시인이 왜 그렇게 말했는지 잘 알 수 있다고 했다.
혼자라면 쉽지 않았을 길, 함께라서 행복하게 걸었던 길
긴 구간을 걷고 걷고, 또 걷다 보니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나는 점점 말수를 잃어갔지만 왜인지 잘 알 수 없는 엄청난 행복한 기분이 가득했다. 어쩌면 맛있는 점심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일지도...
등구재황토방
대한민국 예능프로그램 1박 2일 강호동이 걷던 길, 신서유기 촬영지
“뻥 안치고 10번은 넘게 가는 곳”
누군가의 블로그에 소개된 최고의 맛집이다. 자연을 듬뿍 느끼고 지리산에서 나오는 나물로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이곳의 최고 시그니처 메뉴는 표고버섯전이다. 매동마을에서 2시간 걷다가 이곳에 도착해서 마시는 지리산 둘레길 막걸리와 표고버섯전의 궁합은 환상이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입과 눈은 동시에 즐겁다. 멀리 바라보이는 반야봉, 뱀사골 첩첩산중, 바로 앞 다랭이논을 보는 눈이 가슴으로 행복의 신호를 보냈다. 참 잘 왔다. 아아~ 평화롭다. 아아~ 행복하다.
등구재황토방(왼_남원, 아래_제주)
또 하나의 재미있는 모습은 이곳 황토방 벽면이 모두 낙서들이다. 어느 곳 하나 발 디딜 곳 없는 출퇴근 지하철 속의 다양한 우리들의 모습처럼 낙서 내용도 다양하다. 남겨진 글들을 보고 있자니, 이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오기까지 걸었을 길, 그 길을 따라 걸으며 보았을 풍경, 함께 걸었던 사람들과 나누었을 대화들, 그 마음들이 어땠을지 알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더욱 좋아지는 순간이었다.
평화의 길, 수평의 길, 느림의 길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오랜만에 내 마음의 평온, 여유를 찾아보았고, 일 때문에 오게 된 남원은, 뜻밖의 쉼표가 되었다.
지리산 정령치
쏟아지는 별을 눈으로 담는 곳,
별이 이빨사이에 떨어져 고춧가루가 되었다고 말한
어느 부장판사님의 표현이 생각 나는 곳
올해 1월 다시 돌아온 남원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여전히 따뜻하고,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퇴근 후, 찾아간 정령치는 하루의 더위를 잊을 정도로 시원했다. 에어컨 없이는 몇 분도 버티기 힘든 요즘, 정령치는 에어컨 바람보다 시원한 자연의 바람이 24시간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시원한 바람과 함께한 기다림 끝에 붉은 해를 능선 뒤로 넘겨 보내고 나니 어둠이 별을 데려오기 시작했다. 하늘 한가득, 촘촘하게 반짝이는 모습을 보며 사진으로 한참 담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사진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풍경이었다. 수많은 별과 처음 보는 은하수의 모습에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와....”와 같은 탄성 외에는 많은 대화가 필요하지 않은 듯했다.
도시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풍경에 한참을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쏟아진다는 느낌을 비로소 느끼기 시작했다. 그 순간만큼은 회사 일도, 이런 저런 고민들도 모두 사라지는 듯했다. 이제서야 알았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끼지만 모두 담을 수 없다는 것을, 지리산 둘레길의 평화, 등구재 황토방의 맛과 멋, 지리산 정령치의 밤하늘 낭만을 나의 부족한 글 솜씨로 모두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이 부족한 글로 남원을 다녀가셨던 분들, 남원이 궁금하신 분들께 잠깐의 시간 동안 남원을 떠올리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다랭이논 풍경)
!꿀팁!
1. 정령치의 은하수를 보러 가신다면 얇은 겉옷을 챙겨가세요. 여름이어도 밤바람에 추워요.
2. 남원에서 유명한 맛집 중 하나인 ‘서남만찬(메뉴: 오징어볶음)’의 긴 대기 줄에 방문을 성공하지 못했다면 ‘만월’을 추천합니다. 현지인 맛집!
3. 또 다른 맛집 ‘봉가면옥(냉면)’을 추천합니다. 매년 3월부터 10월까지만 운영하는 이곳은 평범해 보이는 냉면이지만 특별한 맛을 가진 냉면입니다. 먹어본 분들만 아는 냉면 맛집!
4. 디저트로 에그타르트를 좋아하신다면 카페 ‘모련’을 강추합니다. 사장님이 에그타르트 마스터!!
5. 달달한 크림소보루, 아몬드식빵을 맛보고 싶다면 명문제과로! 치아바타, 밤호박크림치즈 등 담백하고 건강한 빵(빵 이름: 고소소, 속 없이 큰 빵, 일자무식)을 좋아하신다면 ‘잡학다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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