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뜰] “오늘 하루”를 잘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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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2

추억의 뜰

글. 황진희 광주고등법원 고법판사

우리는 언젠가 사라질 것입니다.

2023년 그해 여름, 너무나 사랑하는 후배의 죽음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떠날 수도 있다는 ‘죽음의 자각’은

막연한 일이 아니라 나에게 현실도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나는 건강도, 운동도, 독서도 그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꾸준히 즐겁게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나의 몸과 마음 챙김보다 가족을 우선으로 두는 것,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

나의 다양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 중요한 가치라고 여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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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예고도 없이 한순간 떠나면 아이들은 어떻게 하나 생각하니,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아이들의 가슴속에 아름다운 추억은 많이 남아 있을까, 아이들에 대한 내 사랑은 제대로 전달되었을까, 내가 아이들에게 남기고 싶은 삶에 대한 가치, 정신적 유산을 계속해서 남길 수 없을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그때부터 나는 ‘아이들의 홀로서기’, ‘아이들의 독립’이라는 과제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의 홀로서기는 ‘나의 홀로서기와 마음 챙김’의 문제로 귀결되었습니다. 여태껏 내가 아이들을 붙잡고 독립시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시간, 몸, 마음의 많은 부분을 내가 아닌 가족들에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먼저 나의 마음과 몸을 소중하게 여기고 챙길 때 아이들의 독립도, 우리들의 미래도 희망적임을 깨달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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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2023년 가을부터 나의 마음 챙김과 홀로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요가하고 독서하며 글쓰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꾸준히 실천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뇌자동화, 루틴, 습관, 환경통제 등에 관한 힘을 조금씩 알게 되었고 아주 작은 것부터 실천했습니다(아주 작은 습관의 힘). 아침에 출근할 때는 개그맨 고명환의 긍정확언과 성경말씀 유튜브를 듣고, 주 2회 이상 요가를 하며(요가 선생님과 친해지면 꾸준함이 저절로 생깁니다), 독서법 관련 책(고명환, 문유석, 김봉진, 이동진, 나민애, 박웅현, 장영희 등)부터 읽고 그 책 속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몰입시간을 통해 점점 도전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경제활동을 시작한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온라인뱅킹으로만 해야 했었는데 그 무렵 모바일뱅킹에 대한 두려움의 벽, 의심의 벽도 허물어졌습니다. 참으로 그 벽이 무너지는 데 오래도 걸렸습니다. 우연히 법원도서관에서 『메타버스』라는 책을 손에 들었고 그 책 서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세상의 절반인 디지털지구에 올라타 소통해야 한다!’ 드디어 2024년 4월, 가장 두려워했던 온라인 세상에 블로그 1일 1포스팅을 전체공개로 시작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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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에서 만난 자연의 의미, 요가와 명상, 독서리뷰, 체험적 신앙과 기도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들을 기록했습니다. 내 마음과 마주하며 대화하는 시간, 나를 알아가는 시간, 내 마음과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 내 자신을 토닥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행위들은 몽상모드(정리하는 뇌)로 나의 내면을 살피고 집중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 스스로 내 자신을 잘 데리고 살아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느낀 생각을, 사랑하고 행복한 순간들, 만남과 이별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들,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을 기록했습니다. 늘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을 수 없으므로 못다 한 이야기들도 기록했습니다. 그 순간의 소중한 생각과 감정, 나의 가치와 철학들이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남기고 싶었습니다. 글로 남겨두면 시공간을 초월하여 그 순간과, 그 순간의 의미를 아이들과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을 아이들을 단단하게 세우는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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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해 동안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를 되새기며 유독 죽음의 자각에 관한 책들을 연결 지어 읽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은 딸의 죽음을 먼저 직면하고 이후 죽음을 맞이하는 한 어른의 마지막 순간들을 차분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톨스토이)은 러시아 판사의 삶과 죽음 그리고 가족과 지인들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카프카의 『변신』은 주인공의 가족에 대한 희생과 변신, 다른 가족들의 소외 그리고 주인공의 죽음을, 카뮈의 『이방인』은 어머니의 죽음, 주인공의 살인 그리고 사형을, 『노르웨의 숲』(무라카미 하루키)은 친구와 가족의 자살, 죽음 그리고 치유받지 못한 주변인들의 태도를,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했다』(파울로 코엘료, 삶을 사랑하게 하는 책)는 자살, 실패, 죽음의 자각, 치유의 길 그리고 삶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혼자 쉬고 싶다』(니콜레 슈테른)는 강인한 엄마의 병환, 죽음 그리고 작가 삶의 변화를, 『나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페트릭 브링리)는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 일상의 멈춤, 그리고 회복의 시간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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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누군가 나에게 계획적으로 이 시간을 준비하도록 하신 듯, 위 책들을 통해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더 깊이 알아가고 상실의 아픔과 회복을 여러 차례 사유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2024년 11월 어느 날, 그토록 생에 대한 의지가 강하고 건강하셨던 아버지께서 아침에 일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임종의 순간을 혼자서 맞이하셨고 유언을 남길 방법도 없이 홀연히 잠드셨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지만 평소 아버지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여러 기록들을 통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을지 짐작해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하여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고 형제들과 조카들에게 아빠처럼 희생하며 사랑해 주라고... 그리고 오늘 사랑을 내일로 미루지 말고 매 순간 알차고 보람되게 살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일요일에 잠드신 아버지는 그 전날 토요일 병원에 다녀오신 후 바로 실비청구를 해두셨고 장례절차 중 그 실비를 지급받았습니다. 뭐든 미루는 일 없이 깔끔하게 성실하셨습니다. 아버지의 핸드폰 메모에는 늘 보람되다, 알차다는 내용의 반복된 소감들이 기록되어 있었고, 전화 통화 목록에는 자동 녹음 기능을 이용하여 아버지 목소리가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예고 없는 마지막을 평소에 미리미리 기록하여 준비하셨고 이것들이 곧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겨졌습니다. 기록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비록 이제는 함께하지 못하지만 남은 우리들에게 무슨 일이 닥치면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자문할 때 주저함 없이 지금 당장 움직일 수 있도록 가야할 길을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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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기후와 나라가 걱정되는 2025년 봄, 여전히 나를 단단하게 하는 시간들이 나에게 허락되었고, 나의 홀로서기 시간들과 아버지의 남겨진 기록으로 아버지의 부재를 회복해 가고 있습니다. 비록 내 시간을 나를 위해 먼저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가족 구성원들의 생활에 불편은 거의 없고 나의 시간 사용에만 많은 변화를 이루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내 몸과 마음을 위하는 것보다 가족을 위한 가치를 이유로 미루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가족을 위한다는 것은 불편하고 힘든 독서와 글쓰기, 운동과 마음 챙김을 미뤄두기 위해 그냥 내세운 멋지게 보이려는 핑계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기억은 기억을 덮습니다. 꼭 기억하고자 했던 순간들이 나중 기억으로 덮어진다면 너무 아쉽습니다. ‘오늘 하루’의 소중함에 대해 나에게 큰 깨달음을 준 사랑하는 후배가 이 생명의 봄에 태어났습니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법관으로서 최선의 삶을 살고자 했던 그녀의 밝고 따뜻한 미소를 깊이 기억하고자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기록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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