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민식 서울가정법원 판사
사법연수원 2년 차이던 2013년 함께 시보를 하던 친구의 권유로 우연히 스쿠버 다이빙(이하 ‘다이빙’이라 한다)을 시작하게 된 이래 지금까지 10년 넘게 세계 곳곳에서 다이빙을 해왔다. 인생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무언가에 미치는 게 참 없는 사람이라 자평했던 나였는데, 명절이나 휴가철이면 해외 바다로, 주말이면 국내 바다로 쏘다녔고, 다이빙 동호회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으며,바다에서 아내와 친구들과 함께 잊을 수 없는 세상 진귀한 경험들을 많이 했다. 특히 수중사진에도 흠뻑 빠져 제주도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세계적인 수중사진 대회인 오션아트(Ocean Art competition) 2020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그간 다녀온 바다 중에서도 약 1년 전에 다녀온 팔라우(Palau)의 펠릴리우(Peleliu) 섬에서의 다이빙 여행기를 얘기해 보고자 한다. 팔라우의 경우 다이버들에게는 신들의 정원이라 불릴 정도로 누구나 한 번쯤 가기를 소망하는 다이빙의 성지라 할 수 있다. 일반 여행객들에게도 코로나 이전까지 한국에서의 직항편이 있어 괌, 사이판 외 이색적인 대양주 여행지로서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 펠릴리우의 경우 미국 드라마나 밀리터리 마니아가 아니라면 처음 들어볼 오지 중의 오지일 것이다.
펠릴리우는 팔라우의 수도 코로르(Koror)에서 약 40km 떨어진 약 13㎢ 크기의 작은 섬인데,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의 격전지로 유명하다. 미군은 태평양의 여러 섬에 진출하여 이른바 남양군도를 지배하고 있던 일본군에 대항하여, 필리핀을 탈환하기 전 펠릴리우에 위치한 일본군 비행장을 획득하여 이용하려 하였고, 이에 1944년 9월 15일부터 11월 27일까지 미군 약 28,500명과 일본군 약 13,000명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일본군은 이 전투 이전까지는 미군이 섬에 상륙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해안선에 화력을 집결시켜 전면전을 벌여왔다. 그러나 일제의 패전이 확실시되자 최대한 종전을 늦추려 병력 소진을 피하여 섬 곳곳에 땅굴과 벙커를 파 엄폐, 은폐하면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미군들은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해 화염방사기와 다이너마이트를 동원하여 한때 사람이었던 것들을 녹여가며 땅굴과 벙커를 하나씩 무력화시키는 방식으로 전쟁을 진행해야 했다. 이 때문에 전투는 예상보다 오랜 기간 많은 출혈을 강요하는 방식의 참혹한 양상으로 펼쳐졌고, 동원된 일본군 중 단 34명만이 생존하였다고 한다. 당초 필리핀 탈환을 위한 전초전이었으나 펠릴리우 전투가 끝나기 전 이미 필리핀 전투의 전황이 미군에 크게 유리해지면서 명분도 실리도 얻지 못한 끔찍한 전투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태평양 전쟁을 다룬 미국 드라마 <더 퍼시픽(The Pacific)>의 5~7화에서 그러한 참상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나와 아내를 비롯한 일행 6명은 타이베이를 경유하여 코로르로 향한 다음 일주일 동안 팔라우 본섬에서의 다이빙을 즐겼다. 다이빙 내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어종의 엄청난 스쿨링(Schooling, 물고기들이 동기화하여 무리 지어 다니는 현상)이 펼쳐지던 블루 코너(Blue Corner), 최대 7m에 달하는 거대한 바다의 신사 만타 가오리(Manta Ray)를 만날 수 있는 저먼 채널(German Channel) 등 세계적인 다이빙 포인트에서 멋진 다이빙을 할 수 있었다. 친구들 4명을 먼저 한국으로 돌려보내고 나와 아내는 추가로 5일간 단둘이 펠릴리우에 입도하여 그곳에 묵으며 로컬 다이빙 센터에서 펠릴리우 다이빙을 해보기로 했다.
우리를 맞이한 OMZ 다이빙 센터의 가토 료헤이 상은, 코로나 이전에는 펠릴리우의 전쟁 유적지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적지 않았지만, 코로나로 관광객이 급감해 겨우 200~300명의 주민만이 섬에 살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펠릴리우는 시내라 부르기에도 민망한, 주요 도로 인근을 조금만 벗어나면 바로 울창한 밀림이 펼쳐지는 아주 스산한 분위기였다. 전쟁 당시 일본군에는 강제징용된 한인 등 다양한 식민지 피지배자들도 섞여 있었을 테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얼마나 많은 원혼들이 저마다의 억울한 사연을 품고 스러져 갔을지 그로부터 80년 뒤의 방문자인 나로서는 감히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실제로 아내는 첫날 밤 자다가 자신이 불에 타는 내용의 가위에 눌리기도 했는데, 미군들이 땅굴, 벙커의 일본군을 소탕하기 위해 화염방사기를 동원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보면 섬뜩한 꿈이 아닐 수 없었다.
펠릴리우 섬에서의 스쿠버 다이빙은 주로 홀로 툭 튀어나온 섬의 남서쪽 끝단에서 펼쳐진다. 섬의 서쪽과 동쪽에서 휘몰아치는 조류가 섬의 가장자리에서 만나 강력한 조류가 형성되고, 조류가 운반한 플랑크톤과 작은 어류를 먹기 위해 사람 몸통만 한 자이언트 트레발리(Giant Trevally) 스쿨링, 황소상어(Bull Shark) 등의 여러 대형 어종을 만날 수 있다. 펠릴리우 다이빙은 오직 이 대물들에 근접하여 이들을 감상하고 촬영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이루어진다.
나와 아내는 가토 상과 셋이서 오붓하게 펠릴리우 바다에서 4일간 총 12회의 다이빙을 했다. 전 세계 유명하다는 바다 곳곳에서 다이빙을 해봤지만, 펠릴리우 바다는 이전까지의 바다와는 결이 다른 거친 진정한 대양의 바다였다. 수면 위에서부터 거대한 파도가 밀려왔고 조류 흐름이 일정하지 않아 매우 역동적이었으며, 그 강도 또한 인력으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펠릴리우 다이빙의 정수, 펠릴리우 코너(Peleliu Corner)에서의 다이빙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 우선 펠릴리우 섬 형태를 따라 형성된 수중 플래토(Plateau, 고원)에서 움푹 들어가 조류의 영향이 약한 지형으로 입수를 한다.
지형을 따라 조류의 흐름이 점점 좁혀지고, 이 조류를 향해 모여드는 대물을 쫓아 최대한 다이버들끼리 촘촘히 모여 바닥과 벽면에 붙어 조심스럽게 진행한다. 플래토 끝자락에서는 섬 양방향에서 모인 조류가 강력한 하강 조류를 형성하는데, 대물들이 가까운 거리를 주는 지점에 이르면 수중 가이드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미친 듯이 핀을 차 대양의 거대한 흐름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가이드의 시그널에 따라 광활한 해류 속으로 질주하는 그것은 뭐랄까, 다이빙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공격적이고 위험하면서도 한껏 치명적인 것이었다. 한계까지 나를 끌어올리며 핀을 차 성인 몸통만 한 자이언트 트레발리 스쿨링에 섞여 정신없이 물살을 버티며 이들을 촬영하다 보면 어느새 강력한 하강 조류에 휩쓸리게 되고, 곧장 가이드의 시그널에 따라 수면을 향해 상승해야 했다. 극렬한 하강 조류에 맞서 쉼 없이 핀을 차면서 상승을 하다 보면 내가 다이빙 중 내뱉은 공기 거품이 하강 조류에 못 이겨 나보다도 뒤늦게 올라오는 진풍경을 볼 수 있었다. 출수를 마친 우리는 아드레날린이 넘치다 못해 터져 나와 너 나 할 것 없이 격렬히 환호성을 질렀다.
자이언트 트레발리 스쿨링 뒤에는 가끔 황소상어가 나타났는데, 커다란 몸통의 2m에 달하는 거대한 녀석이니만큼 최상위 포식자로서의 엄청난 위엄을 풍겼다. 다이빙을 한다고 하면 곧잘 상어가 위험하지 않냐는 질문을 받는데, 다이빙 중 만날 수 있는 상어는 대부분 성인보다 훨씬 작은 개체로 다이버를 만나면 화들짝 놀라 도망가기 바쁘다. 공격성이 있다고 알려진 대형 상어조차도 인간을 먹잇감으로 보지 않기에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 주로 사람을 먹이로 오인하여 이루어지는 상어의 공격으로 인한 사망은 연간 5건 내외에 불과하지만, 샥스핀 요리를 위해 남획되는 상어는 매년 1억 마리에 달한다. 지느러미 외에 상품성이 없기에 상어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지느러미만 잘린 채 몸통은 바다에 버려지게 되고, 지느러미가 없는 상어는 헤엄을 치지 못해 결국 질식해 사망한다. 지구상에서 인간보다 더 체계적이고 잔인하게 상대방을 공격해서 절멸시키는 존재는 없다.
다이빙 마지막 날 오후에는 가토 상과 펠릴리우 전투 유적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미군의 함포사격으로 인한 상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던 일본군 HQ, 파괴된 채 버려진 미군 탱크와 일본군 벙커에 있던 대포, 그 뒤로 이어진 땅굴을 본 다음 펠릴리우의 가장 높은 지대로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는 피투성이 코 능선(Bloody Nose Ridge)의 전망대로 향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을 나지막한 오솔길을 따라가 약 100여 개의 계단을 오르면 탁 트인 전망대가 나온다. 섬 전체를 둘러싼 해안선이 멀리 보이는 가운데 기분 나쁘지 않은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온다.
파란 하늘과 푸르디푸른 바다가 시선을 가득 채운 그곳에서는 무심하게도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가 버려 과거의 참혹했을 전쟁의 자취를 느끼기는 쉽지 않았다. 군국주의의 기치 아래 너무도 허무하고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하였을 그 시절 희생자들이 겪었을 상처의 깊이를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저 다시는 그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기만을 간절히 기원하였다.
4박 5일간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다시 팔라우로 돌아가는 배를 타러 가며 다시 이 작은 섬을 돌아본다. 펠릴리우의 거대한 대자연 속에 아낌없이 우리를 내던졌고, 짧은 순간만큼은 우리도 잠시나마 그 일부가 되었다는 일체감을 느끼지 않았나 싶다. 다이빙을 하면서 인생의 깊이와 그 빛깔의 다채로움은 결국 자신이 온몸으로 부딪혀가며 보고 느낀 경험의 진폭과 다르지 않다고 믿게 되었다. 꼭 해외여행이라거나 거창한 레저활동일 필요는 없다. 모두에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가슴 충만한 인생의 빛나는 순간들이 채워지기를 바라며 여행기를 마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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