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필객] 저도 이제 법원 사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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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08

저도 이제 법원 사람인가요?
10년에 한 번씩 나는 배움의 문 앞에 선다. 스무 살, 대학에 입학하여 사람답게 사는 법을 배웠고, 서른 살,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
하여 사람 몫을 하는 법을 배웠고, 다시 마흔 살, 법관임용으로 연수원에 입소하여 필요한 사람이 되는 법에 대해 배웠다. 그리고 지금 이곳, 전주지방법원에 첫 임지로 발령받아, 1012호 사무실에 앉아 몰래 이 글을 작성하고 있다. 법원생활도, 타지에서의
생활도 온통 모든 것이 처음인 이곳에, 돌고 돌아서 나는 잘 도착한 것일까.
글 신서영 판사(전주지방법원)

#전주역

평일에는 관사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는 보통 서울 본가에 다녀가기 때문에 매주 나는 서울행/전주행 기차를 탄다. 익산역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사랑받는 여행지로서 이름에서 오는 설렘 때문에 나는 주로 전주역을 이용한다.
전주역에 내리면, 한옥 모양 지붕 너머로 반짝이는 햇살, 한껏 멋을 내고 한창 신이 난 말간 얼굴들 가운데 서서, 마치 여기에 나만 혼자 일하러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법원에 대한 첫인상

그렇게 부임 첫날도 역에서부터 막중한 책무를 느끼며 전주지방법원에 도착했다. 우리 제12민사부·제11가사부의 부장님과 짝 배석 판사님, 첫해를 함께 보낼 두 분이 내게 앞으로 펼쳐질 법원생활의 첫인상이다. 법원에 와서 어땠나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아마 여지없이 두 분을 떠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법관임용 준비과정은 마치 그간의 너의 인생을 통째로 돌이켜 보라는 듯, 나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기반 하여 답을 찾아야 하는 과정이 많았다. 좋은 판사는 무엇인가, 지극히도 추상적인 화두 앞에 나는 변호사 업무를 하면서 기대하던 판사의 모습을 떠올렸는데, 나는 판사들이 사건을 진심으로 봐줬으면 좋겠고, 사건을 두고 고민하기를 쉽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발령 첫날부터 사계절을 다 보낸 지금까지, 우리 부장님과 짝 배석 판사님들에게서, 나는 내가 기대하던 판사의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고, 상상하던 그 모습이 실제와 다르지 않았구나 싶어 안도했고, 판사가 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법원 생활

합의-납품-선고의 무한굴레에 빠져 살던 어느 날, 부장님이 ‘오이 씨앗을 뿌려보았다’고 하셨다. 이제 막 일을 시작하는 우리 배석들도 ‘잘 성장했으면 좋겠다’ 하시더니, 정성을 다 담아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버팀목을 세워 오이를 키우셨다.
안 그래도 내가 한사람 몫을 하고는 있는지 의심만 깊어지던 차에, 극F인 나는 그 말씀 한마디에 또 감동받아 역시 나만 잘하면 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고, 열심히 하다 보면 적어도 오이가 열매를 맺을 즈음에는 나도 얼추 일인분을 하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그 오이가 배신자같이 급성장을 시작하더니 불과 한 달 만에 열매를 맺었다. 그래서 수확해서 오이를 삼등분으로 잘라 건배를 나눈 뒤 어쨌거나 맛있게 먹었다.

부장님이 오이 재배에 성공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주지방법원에는 텃밭이 생겼다. 법원 차원에서 법원 테라스를 텃밭으로 개간하여 법원사람들에게 분양한 것이다. 그리고 공정을 기하기 위하여 무려 법원장님과 수석부장님과 사무국장님 등이 참석하신 가운데 분양권 추첨이 이루어졌고, 나도 당첨이 되어, 우리 부도 텃밭 하나를 갖게 되었다.

초여름의 장마와 태풍을 보내고 햇살 좋은 어느 날, 우리 부는 블루베리 묘목을 심었다. 이따금 재판이 있는 날, 중간에 잠시간 쉬어가는 텀이 생기면 부장님, 짝배님과 함께 블루베리 나무를 보러 간다. 그동안 물 안줘서 죽은 거 아니야? 걱정을 나누면서…. 그런데 그 조그만 게 자기도 나무라고, 물 조금 주지 않았다고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

#성장

그래서 오이와 블루베리처럼, 나도 성장하고 있을까.
지난겨울, 신임법관 연수를 받는 동안 동기들과 함께 술 한 잔 기울이며 어떤 판사가 되고 싶은지, 업무를 시작했을 때 무엇이 제일 걱정되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 나이도 들었고, 자녀가 있기도 하고, 사회생활에 머리도 굵은 우리들이, 새 시작 앞에서 꿈꾸는 아이들이 되었다.
판결문을 작성하면서 다른 법원 판결문을 검색하다 보면, 하단 서명 란에서 동기들의 이름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친구들이 전국에 흩어져 이렇게 잘 해내고 있구나 싶어, 괜히 내가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사실 친구라고 하지만, 나는 동기들 중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 임관을 하던 해에 나는 마흔을 맞았다. 그런데 불혹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나는 매사가 의혹투성이다.
이제 살만큼 살아서 웬만하면 흔들리는 일은 없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린 동기들 가운데 어른이 되어야 할지 스스럼없는 친구가 되어도 될지에 대한 고민, 처음 겪는 역할 분담 속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고민, 모든 사건이 새롭고 쉽게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데 언제쯤 핵심을 보는 혜안이 생길까에 대한 고민. 순간순간을 고민하면서 결국엔 답을 찾기도 하며, 그렇게 사람은 죽는 순간까지도 고민하고 깨달으며 성장해 가는가보다 싶다.
인생의 시계가 있다면 40세는 숫자 그대로 오후 4시경에 이른 시간 같다. 뭔가를 시작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이기는 한데, 그래도 지금이라도 시작하면 저녁 무렵 타오르는 노을을 바라보며 만찬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밤새 신나게 놀 수도 있을 거다. 나에게 남은 밤은 길다. 나는 저녁형 인간이기 때문이다.

#만남과 이별

한낮의 해가 길어지던 무렵, 나의 첫 짝배님이 파리에 가게 되었다. 고작 5개월을 안 사이인데, 매주 50시간은 같이 앉아 있다 보니 꼭 50년 지기 친구가 된 것 같았다. 판사님의 샛노란 차량의 창문이 닫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헤어짐이 못내 아쉬워 엉엉 울어버렸다.
그렇게 1학기 베프를 파리로 보내고 여름방학이 지나 2학기가 시작되자, 미국에서 새로운 친구가 전학을 왔다. 오자마자 팬 층을 확보한 새 짝 배석 판사님은, 좌충우돌하는 내 법원 생활에 좋은 선배님이 되어주고 계시다.
그리고 어느덧 12월이 되어, 내년 사무분담까지 2개월 좀 넘게 남은 지금, 나는 우리 제12민사부와 또다시 이별을 앞두고 있다.

#마무리

국문과로 입학해서 고시 공부를 하면서, 아직은 격변기이던 시절에 법전원에 입학을 하면서, 법조인이 되기로 마음먹은 이후부터는 나는 늘 경계선에서 살았던 것 같다. 이제야 비로소 이런 것 저런 것 상관없이 그냥 법원 사람이 되어, 이렇게 법원사람들에 글을 남길 수 있게 되어 영광이고, 더욱이 한 해를 마무리 하는 지금, 다시는 오지 않을 초임 법관 생활에 대하여 되돌아볼 기회를 얻게 되어 더 없이 감사하다.
짧은 1년 동안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지만, 어느덧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12민사부 배석판사로서 제법 어울리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주변에서 이끌어주고 함께해주신 선배·동료 판사님들, 직원 분들께 감사드리며, 부족한 이 글의 끝은 올 한해 배운 것을 살려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그렇다면, 나도 판사라는 점에 다툼이 없는바, 그 확인을 구하는 이 글 제목의 청구는 확인의 이익이 없어 부적법하므로 이를 각하한다.

[※당초 이 글의 마지막 문장은 ‘그렇다면, 나의 판사생활은 모두 이유 있으므로 인용하기로 하여, 제목과 같이 결정한다.’, 제목은 ‘전주에서 법원 사람 되기’였으나, 에피소드의 당사자들께 사전검열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부장님께 납품한 결과, “신판사가 이미 판사임은 다툼의 여지가 없다”고 강력히 말씀주시며 위와 같이 수정의견을 주시기에 뿌듯한 마음으로 결론과 제목을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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