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삶]‘패랭이꽃’이 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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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04

‘패랭이꽃’이 피었습니다

파랑새 뒤쫓다가

들 끝까지 갔었네

흙 냄새 나무 빛깔

모두 낮선 타관인데

패랭이꽃

무더기져 피어 있었네

- 김동리, 「패랭이꽃」 전문

6월, 초여름 햇살에 반짝이는 푸르른 잎사귀들이 눈부시도록 곱고 깨끗하다. 그와 함께 이곳저곳에서 각양각색의 꽃이 핀다. 현재 근무하는 대법원(청사)의 동관 ‘하늘공원’(옥상정원)에도 봄부터 노루귀, 돌단풍, 앵초, 꽃잔디, 금낭화, 하늘매발톱, 마거리트(일명 나무쑥갓) 등 여러 꽃들이 차례로 등장하더니, 지금은 초롱꽃, 달맞이꽃과 더불어 패랭이꽃이 피고 있다. 점심 후 산책을 할 때나 퇴근시간 이후 해질 녘에 가끔 그곳으로 올라가 본다. 꽃들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는 일, 일상에서 맛보는 즐거움 중 하나이다. 요즘 옥상정원에는 키가 작은 붉은색 잔디패랭이(뒤에서 소개하는 ‘사철패랭이꽃’의 일종이다)를 비롯하여, 그보다 키가 좀 더 크고 전형적인 모습의 분홍빛 패랭이꽃 등이 곳곳에서 무더기를 이루고 있다.

패랭이꽃은 해마다 이맘때인 6~8월에 제철을 맞이하는 여름꽃이다. 우리나라 전국의 산과 들에서 자생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생명력이 아주 강하다. 약간 건조한 풀밭이나 산기슭, 언덕, 냇가, 돌틈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어 매우 친근하며, 화려한 듯 수수하고 정겨운 꽃이다. 꽃말은 ‘순진한 사랑, 청춘(젊음), 재능, 대담, 위급, 무욕, 효심’이다. 꽃의 생김새가 마치 예전에 서민층에서 댓개비로 만들어 쓰던 모자(내지 갓)인 ‘패랭이’를 뒤집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그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하며, 패랭이와 구별하기 위해 ‘꽃패랭이’라고 부른다. 그러하기 때문인지, 패랭이꽃은 신사임당의 민화(民畵)-‘수박과 들쥐’를 비롯한 초충도(草蟲圖)나 화조도(花鳥圖) 등-에 자주 등장하고,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황묘농접도(黃猫弄蝶圖)’(새끼고양이가 나비를 바라보는 그림)에서도 볼 수 있어 서민적인 꽃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키는 대략 30㎝ 내외로 작고 반그늘이나 양지쪽에서 자라며, 군락을 이루는 듯하면서도 서로 조금씩 거리를 두고 피는 모습이 신기하다. 꽃은 전체에 분가루를 뿌린 듯 분백색(粉白色)이 감돌고, 줄기 위쪽에서 약간 갈라진 가지 끝에 1개씩 달려 핀다. 꽃받침은 원통형이고 5개로 갈라지며, 그 밑에 있는 작은 꽃턱잎(즉, 포)은 4개인데 꽃받침통과 길이가 같거나 절반 정도이다. 꽃잎은 5개이고 수평으로 퍼지며 끝 부분이 갈라져 테두리가 톱니모양을 이룬다. 꽃의 수술은 10개이고 암술대는 2개이다. 꽃송이는 보통 빨강(진홍색)이나 분홍 또는 흰색인데, 안쪽에는 붉은색 선이 선명하고 전체적으로 둥글게 보인다. 특이하게도 꽃대의 마디마디가 대나무와 흡사하여 카네이션과 마찬가지로 석죽과(石竹科)에 속하며, 석죽(石竹), 석죽화(石竹花) 또는 죽절초(竹節草), 지여죽(枝如竹), 참대풀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카네이션’(꽃말: 모정, 사랑)이 본래 서양(원산지는 지중해 연안이다)의 꽃으로서 꽃송이가 크고 겹꽃인 반면, 우리 꽃인 ‘패랭이꽃’(원산지가 한국, 중국이다)은 크기가 훨씬 작고 홑겹이라 더욱 청초하다. 넓게 보면 카네이션을 겹패랭이꽃이라 할 수도 있다. 패랭이꽃의 다른 이름으로는 구맥(瞿麥), 산구맥(山瞿麥), 거구맥(巨瞿麥), 천국(天菊), 남천축초(南天竺草), 대란(大蘭) 등이 있다.

패랭이꽃은 주로 관상용으로 사랑받고 있으나, 독성이 없어 간혹 잎을 식용으로 쓰기도 하고 또 약용으로도 쓴다. 한방에서는, 전초(全草)를 채취하여 말려서 약재로 쓰거나, 9~10월에 원통형 삭과로 검게 익는 씨앗을 ‘구맥자(瞿麥子)’라 하여 이뇨제, 진통제 등으로 사용한다.

한편 이 꽃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중국의 어느 마을에 대담하고 힘이 센 장사가 한 사람 살았는데, 뒷산에는 석령(石靈, 돌의 악령)이라는 괴물이 있어 밤마다 마을 사람들을 괴롭혔으므로,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자 그 용감한 장사는 뒷산으로 올라가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괴물이 나타나자 석령을 향해 온 힘으로 대나무 화살을 쏘았다. 그런데 얼마나 세게 쏘았던지 화살이 바위에 깊숙이 박혀 빠지질 않았다. 그 후 바위에서는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는 고운 꽃이 피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그 꽃을 ‘바위(돌틈)에서 핀 대나무를 닮은 꽃’이라는 뜻에서 ‘석죽화’라고 불렀다.” 이것이 바로 패랭이꽃이다.

메마른 돌밭에 뿌리박기 위하여

천길 벼랑에나마？ 매달려 살기 위하여

보아라 굽었지만 더욱 억세어진 이 팔다리를

햇빛을 향하여 꼿꼿이 들려진

이 짧지만 굵은 목덜미를

말하지 말자 눈물겹다고도

- 신경림, 「난쟁이패랭이꽃」 중 일부

이러한 패랭이꽃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야생화 백과사전> 등 참조). 꽃잎이 잘게 갈라져 꽃이 마치 술(실타래)처럼 보이는 ‘술패랭이꽃’을 비롯하여, 깊게 갈라진 긴 꽃술이 더욱 하늘거려 마치 구름이 흩어지는 것처럼 보이며 부전고원(함경남도)의 돌밭 등에서 자라는 ‘구름패랭이꽃’, 가늘고 작은 포가 꽃잎 주위에 모여 달려서 털같이 보이는 ‘수염패랭이꽃’, 이와 비슷하나 수염이 없고 바닷가 등에서 자라는 ‘갯패랭이꽃’, 줄기가 비스듬히 자라고 가지를 많이 치며 금강산 등지에 분포하는 ‘각시패랭이꽃’, 키가 10㎝ 정도밖에 안 되게 작고 우리나라 특산종이며 백두산 등에 서식하는 ‘난쟁이패랭이꽃’, 그 밖에도 다양한 형태의 원예품종으로 개량되어 연중 계속해서 꽃을 피우는 ‘사철패랭이꽃’(이를 ‘상록패랭이꽃’으로 부르기도 한다) 등등. 한편, 봄꽃인 ‘꽃잔디’(꽃말: 온화, 희생)는 겉보기엔 잔디와 흡사하나 꽃은 패랭이꽃을 닮았다고 하여 ‘지면패랭이꽃’ 또는 ‘땅패랭이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꽃잔디는 고비과에 속하며 북미 원산의 외래식물인 점에서, 본래의 패랭이꽃과는 구별된다.

살아갈 날들보다

살아온 날이 더 힘들어

어떤 때는 자꾸만

패랭이꽃을 쳐다본다

한때는 많은 결심을 했었다

타인에 대해

또 나 자신에 대해

나를 힘들게 한 것은

바로 그런 결심들이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삶이란 것은

자꾸만 눈에 밟히는

패랭이꽃

누군가에게 무엇으로 남길 바라지만

한편으론 잊혀지지 않는 게 두려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패랭이꽃

- 류시화, 「패랭이꽃」 전문

항상 실감하듯이, 세월은 덧없이 흐르고 그에 따라 계절도 쉬지 않고 변모한다. 그야말로 유수(流水)와도 같고, 쏘아 놓은 화살과도 같다. 작년 이맘때 스마트폰 카메라로 패랭이꽃을 열심히 찍어대던 추억이 아직 생생한데, 어느 사이에 또다시 패랭이꽃이 피었다. 누군가 ‘추억을 종이에 그리면 그림이 되고, 마음에 그리면 그리움이 된다’고 했던가? 마침 지금은 패랭이꽃이 진분홍빛으로 피어나는 신록의 계절이다. 일찍이 미당(未堂)은 그의 시 「푸르른 날」에서, 그리고 가수 송창식은 그 시에 곡을 붙여 노래하였듯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글 소재용(법원도서관 조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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