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뜰] 나의 사건메모 발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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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뜰] 나의 사건메모 발전사

2025.10.02

삶과 공간

글. 진성철 대구고등법원장

재판장은 소송진행, 재판부 합의, 판결작성 등에 참고하기 위하여 사건메모를 작성하는데 ‘재판사무 인계요령’(대법원 재판예규) 제3조 제5항 제1호에 따라 후임 재판장에게 사건메모를 전달하여야 한다. 나는 컴퓨터와 아래아한글 앱을 사용하여 hwp파일 형태로 사건메모를 작성하여 이메일 또는 공유폴더를 활용하여 재판부 판사들과 공유하고 사무분담이 변경되면 후임 재판장에게 전달하고 있다.이하 당사자 주장을 사건메모에 어떻게 기재하는지를 중심으로 하여 나의 사건메모 발전사를 이야기하려고 한다. 소송당사자(원고, 피고, 검사, 피고인)가 변론기일에 진술하는 소장, 답변서, 준비서면 등에는 그 진술자들(이하 ‘화자’라고 한다) 사이에 다투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재판장은 이러한 서면에 ‘화자는 ...라고 주장한다’라는 표현이 없더라도 그렇게 이해한 다음(예를 들어 피고의 답변서에 ‘원고가 차용증을 위조하였다’라는 문장이 있으면 ‘피고는, 원고가 차용증을 위조하였다고 주장한다’라고 이해한다) 상대방의 반론은 무엇인지, 관련 증거는 무엇인지 살핀다.

나는 2005년도부터 2012년도까지 8년 동안 아래 메모 사례(이하 ‘앞서 본 메모 사례’라 한다)와 같은 방식으로 표를 사용하여 원고의 주장과 피고의 주장을 양쪽 칸에 나누어 기재하는 한편 키워드 부분에는 밑줄을 쳐 강조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표를 사용하는 전통에 따른 것이다.

위 방식의 단점은, 좁은 칸에 주장을 상세히 기재하기 어렵고, 동일 쟁점에 관한 주장을 좌우 근접하게 배치하기 어려워 상호 대조하기도 어려우며, 한쪽 칸이 길면 반대쪽 칸도 덩달아 길어져 공간이 낭비되고, 커서를 다른 칸으로 이동하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단점을 개선할 필요성을 느끼던 중 2013년도에 고등법원 부장판사가 되어 항소심 재판을 담당하면서 당사자 주장 외에 그것에 대한 제1심법원의 판단을 기재할 필요가 생겼으므로, 전통에서 벗어나 표를 사용하지 않고 사건메모를 하게 되었다.

당사자 주장을 백지에 기재하되, 당사자가 제1심에서 한 주장 및 이에 대한 제1심법원의 판단을 ‘제1심에서 한 주장 및 판단’ 난에 기재하고, 당사자가 제2심에서 한 주장(제1심에서 한 주장을 반복한 경우 포함)을 ‘제2심에서 한 주장’ 난에 기재하며, 동일 쟁점에 관한 주장을 상하 근접하게 배치하여 상호 대조하기 쉽게 하였다.

당사자의 각 주장 앞에 괄호를 치고 괄호 안에 화자를 기재하는 한편 그 괄호에는 제1심법원의 판단을 상징하는 기호를 붙였는데, 그 기호는 제1심법원이 주장을 인용한 경우 ‘+’, 배척한 경우 ‘-’, 일부 인용한 경우 ‘일부+’였다. 키워드에는 밑줄 대신 진한 글자체를 사용하여 종전보다 더 눈에 띄게 하였다.

위 방식을 앞서 본 메모 사례에 적용하면 아래와 같다. ‘+(원고의 주장)’의 의미는 ‘화자가 원고이고, 제1심법원이 그 주장을 인용하였다’는 것이다.

위 방식으로 메모하면서 ‘+(원고의 주장)’과 같은 문구를 타이핑하는 것이 불편하고, 해당 주장을 한 화자가 누구인지 한눈에 인식되지 않는다고 느끼던 중 스페인어에 사용되는 역물음표(¿)가 생각났다. 스페인어는 주어를 생략하여도 동사의 격변화로 숨은 주어를 알 수 있다. ‘잔다’를 뜻하는 동사 ‘dormir’의 2인칭 단수 형태인 ‘Duermes’만으로 1개의 문장이 되는데, 위 문장을 억양을 낮추어 말하면 평서문 ‘Duermes.’(너는 잔다.)가 되고 억양을 높여 말하면 의문문 ‘¿Duermes?’(너는 자니?)가 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의문문의 경우 가독성을 높이기 위하여 문장 앞에 역물음표(¿)를 붙여야 한다.

스페인어가 의문문 앞에 역물음표(¿)를 붙임으로써 가독성을 높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사자 주장 앞에 도형기호를 붙이면 가독성을 높일 수 있다. 나는 아래아한글 앱에서 ‘Ctrl + F10 → 유니코드문자표 → 도형기호’를 순차 클릭하여 볼 수 있는 다양한 도형기호 중 동그라미, 네모, 세모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2015년도부터 사건메모에 활용하였다.

위 도형기호를 앞서 본 메모 사례에 적용하면 아래와 같이 된다. ‘● 원고는 피고에게 1억 원을 변제기 2010. 1. 31.로 약정하여 대여하였다’의 의미는 ‘원고의 주장은, 원고는 피고에게 1억 원을 변제기 2010. 1. 31.로 약정하여 대여하였다는 것인데, 제1심법원이 그것을 인용하였다’이다. 도형기호의 높은 식별력으로 인하여 해당 주장을 한 화자가 누구인지, 제1심법원의 판단결과가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2018년도에 이르러 ‘민사소송 등에서의 전자문서 이용 등에 관한 규칙’ 제8조 제4항이 시행됨에 따라 변호사는 전자문서를 ‘문자정보의 검색 및 추출이 가능한 파일’로 작성하여 제출할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다. 나는 변호사에게 ‘위 규정에 따라 문자정보의 검색 및 추출이 가능한 파일을 제출하기 바랍니다’라는 석명준비명령을 하고 있는데, 협조하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준비서면이 ‘문자정보의 검색 및 추출이 가능한 파일’로 전자기록에 등록되기만 하면, 당사자 주장을 수고롭게 타이핑하는 대신 해당 파일을 다운로드하여 주장이 요약된 부분을 복사하여(Ctrl + C) 붙이는(Ctrl + V) 방식으로 편하게 메모할 수 있다.

위 사건메모 양식 중 ‘제1심에서 한 주장 및 판단’ 난을 기재하는 것은 꽤 수고롭다. 나는 사건메모에 제1심판결을 별첨한 후 앞서 정의한 도형기호를 삽입하고(특히 제1심판결의 판단근거 앞에 도형기호 ▲를 붙인다) 키워드를 진한 글자체로 변경하여 가공한 다음, 그것을 ‘제1심에서 한 주장 및 판단’ 난에 복사하여 분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위 난을 채웠다.

제1심판결 중 주장, 판단 및 키워드 부분을 표시하면 그 과정에서 저절로 기억하게 되고 필요할 때 그 부분을 찾아 상호 대조하기 쉽다. 이러한 방법은 여러 주장을 비판하는 사건검토보고서, 평석, 논문 등을 분석하는 경우에도 활용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제1심판결을 가공하여 사건메모에 첨부하던 중 2019년도에 이르러 그것과 별도로 ‘제1심에서 한 주장 및 판단’ 난을 채우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위 난을 폐지하였다. 그 대신 사건메모 양식에 ‘제1심 주장 중 1심판결에서 누락된 것’ 난을 신설하였는데, 변호사가 ‘제1심 주장 중 1심판결에서 누락된 것’을 제2심에서 다시 주장한 경우에는 ‘제1심 주장 중 1심판결에서 누락된 것’ 난이 아니라 ‘제2심에서 한 주장’ 난에 기재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을 앞서 본 메모 사례에 적용하면 아래와 같다.

20년간 시행착오를 거쳐 완성된 나의 메모방식은 당사자 주장을 표가 아닌 백지에 기재하기 때문에 작성시간이 절약되고 당사자 주장에 붙인 도형기호로 인하여 직관적으로 그것을 파악할 수 있다. 혹시 관심이 있으신 분은 전화 또는 이메일로 연락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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