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뜰] 가난하지만 섹시한, 곰의 도시 베를린 역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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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04

생각의 뜰

글. 류일건 사법연수원 교수

베를린의 어원

눈치 빠른 사람은 이미 알아챘겠지만, 베를린[Berlin, 독일어 발음으로 베얼린(bεrlı´:n)]은 곰[Ba¨r, 독일어 발음으로 베어(bε:r)]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약 13세기경 공식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베를린이라는 지명의 어원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가설은 곰과 관련이 깊다. 과거 지금의 베를린 지역에 곰이 많이 서식하였다거나, 베를린 지역을 통치한 초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Markgraf)인 아스카니아 가문의 알브레히트 1세(Albrecht der Ba¨r)의 별명이 곰이기 때문에 그를 기리기 위하였다는 등의 이야기로, 곰 ‘Ba¨r’에 게르만어로 작음 또는 예쁨이라는 뜻의 접미사 ‘–lein’이 붙어 ‘작은 곰’이라는 뜻의 ‘Berlin’이 되었다는 설이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하펠강 유역의 저지대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베를린 지역에는 수십 개의 작고 큰 호수들과 숲이 있는데, 과거 8세기부터 이곳에 정착한 서슬라브인들이 사용한 고대 슬라브어에서 ‘늪’을 뜻하는 ‘berl-/birl’에서 베를린의 어원이 유래한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럼에도 중세시대부터 현재까지 베를린의 문장(Coat of arms)에는 혀를 내밀고 옆으로 두 앞발을 내민 흑곰이 등장하고, 이를 차용한 베를린국제영화제의 황금곰상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며, 최근에는 베를린 주정부 차원에서 두 앞발을 머리 위로 들고 있는(마치 벌서고 있는 모습인^^) 각양각색의 ‘버디베어’가 베를린의 상징으로 홍보되고 있으니, 어원이 어찌 되었든 베를린은 명실상부한 곰의 도시라 할 수 있겠다.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작은 어촌에서 선제후국의 수도로의 도약

필자가 해외연수로 베를린에 처음 정착할 무렵에 독일의 제2도시 함부르크에서 베를린까지 그리고 베를린에서 드레스덴까지 아우토반을 따라 자동차로 이동할 때, 몇 시간을 운전하여도 단 하나의 산이나 언덕이 보이지 않아 매우 놀랐던 적이 있다. 크게 볼 때는 피레네 산맥 이북의 남서 프랑스 아키텐 지방부터 시계방향으로 서부 프랑스, 북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북독일과 덴마크, 폴란드, 발트3국,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거쳐 서부 러시아까지 큰 초승달 모양으로 유럽 대평원이 펼쳐진다. 이 초승달 모양의 유럽 대평원에서 거의 중앙에 위치한 도시가 바로 베를린이다. 초기 베를린은 독일(동프랑크)인들이 10세기~12세기 동안 동방식민운동 또는 동방십자군운동을 통해 엘베강 우안의 서슬라브인들을 복속·개종시킨 후 설치된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슈프레강변 작은 어촌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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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베를린 역시 유럽의 두 무역로가 교차하는 지정학적 위치를 발판 삼아 상업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하였고, 14세기에는 한자동맹에도 가입하는 등 통상과 제조업의 중심지로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주요 자유도시로 성장하였다. 그로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약 500년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지배를 받았고, 호엔촐레른 가문은 이를 기반으로 나중에 독일제국 황제(Kaiser)의 반열까지 올라가게 된다. 호엔촐레른 가문은 15세기 중반 자유도시 베를린 시민의 자치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슈프레강의 섬인 쾰른[Ko¨lln, 라인강변의 역사적 종교도시인 쾰른(Ko¨ln)과는 철자 1개가 다르고, 오늘날에는 섬의 북부를 박물관섬(Museuminsel), 섬의 남부를 어부섬(Fischerinsel)이라 부른다]의 중부에 가문의 궁성을 쌓았고, 1486년부터 이 베를린 궁성(Berlin Stadtschloss)에 터를 잡아 공식적으로 베를린을 선제후국의 수도로 선포하였다.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제국의 수도이자 프로이센 군국주의 정신의 심장부

조선의 수도 한양의 경복궁 광화문부터 숭례문까지 이르는 세종대로에 비견될 수 있는 베를린의 대로는 중앙 미테(Mitte) 지역을 동서로 크게 가르는 운터덴린덴(Unter den Linden, ‘보리수 아래’라는 뜻으로 양 도로변에 보리수가 길게 드리워져 있다) 대로라 할 수 있다. 운터덴린덴 대로는 서쪽의 개선문인 브란덴부르거 토어(Brandenburger Tor)로부터 동쪽의 베를린 궁성(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과 분단 후 동독의 정부청사 사용 시절을 거쳐 최근에 ‘훔볼트포룸’으로 복원되었다)까지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데, 그 위에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재위 1740년~1786년)의 기마상이 크게 서있다.

수도 베를린은 루이 14세의 핍박을 받은 프랑스 위그노 상당수를 받아들여 유럽의 대도시로 성장했고, 슐레지엔과 중·남프로이센 지역을 차례로 획득하며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프로이센 공국을 지리적으로 연결했다. 19세기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차례로 굴복시킨 프로이센 왕국은 신흥 열강으로 부상했고, 빌헬름 1세는 1871년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제국을 선포하며 오랜 분열 상태의 독일을 통일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프로이센 왕국, 그리고 독일제국으로 변신할 때 베를린은 변함없이 그 수도이자 프로이센 군국주의 정신의 심장부로 기능하였다. 베를린에서 나치의 흔적들, 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의 분할점령 및 동서 베를린 분단의 흔적들은 반성과 오욕의 역사의 의미로 박제되어 있는 반면에,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대표되는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제국의 화려한 흔적들은 베를린 사람들의 자부심과 긍지의 의미로 재복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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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제국과 나치의 폭주, 냉전 동서 분단 그리고 재통일까지 영욕의 베를린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베를린은 19세기~20세기의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였다. 2차 세계대전 승전 4개국들(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은 1914년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의 1차 세계대전 참전과 패전, 1939년 나치제국 총통 히틀러의 2차 세계대전 개전과 패전 등 독일의 광기 어린 전쟁 폭주의 궁극적인 배경이 프로이센 군국주의 정신에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승전국들은 독일에 대한 징벌과 전쟁예방을 위해 독일의 4개 점령지 분할뿐만 아니라 특히 프로이센 군국주의 정신의 심장부인 베를린의 4개 점령지 분할까지 별개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베를린이 어느 한 세력에 넘어간다면, 그 세력이 프로이센 군국주의 정신에 터잡아 다시 광기 어린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염려였다.

그 후 1949년 냉전시대가 본격화되면서 4개 점령지로 분할된 지역은 미국, 영국 및 프랑스 점령구역의 서독/서베를린과 소련 점령구역의 동독/동베를린을 각각의 영토로 한 2개의 정부 수립에 의해 동서 분단으로 고착되었다. 결국 서베를린은 1989년 재통일 시점까지 동쪽으로는 동베를린, 남·서·북쪽으로는 동독의 브란덴부르크 주로 둘러싸인 서독의 월경지가 되었다. 1948년~1949년 소련의 베를린 봉쇄 기간 서방에서 서베를린으로 생활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공수작전을 펼친 사건은 당시 서독의 월경지로서 서베를린이 얼마나 위험한 위치에 처하였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서독의 경제적 부(副)는 서부독일의 라인강 유역과 남부독일의 바이에른 지방에 집중되었고, 재통일된 지금도 이러한 경제적 구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현재 베를린이 독일 내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수를 가지고 있지만, 부유한 구 서독 지방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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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현재, 그리고 여행

아마도 1990년대 또는 2000년대에 베를린을 방문한 사람들이 최근의 베를린을 재방문한다면 많이 놀랄 수 있다. 재통일 직후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베를린 장벽 부근의 초라한 모습을 보았던 사람들은 수도 베를린을 재복원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물적·인적 자원이 집중된 결과 오늘날 국제도시로서 베를린의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저렴한 임대료와 넓은 공간을 찾아 많은 예술가들이 동베를린 지역으로 모여 들었다. 베를린이 현재 유럽에서 가장 힙한 도시라는 평가를 듣는 건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브란덴부르거 토어에서 박물관섬까지 운터덴린덴 대로 주변에 재복원된 화려한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제국의 유적들, 유대인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등으로 대표되는 나치제국 시절의 이른바 ‘다크투어’ 유적들, 베를린 장벽과 이스트사이드갤러리 그리고 체크포인트찰리 등으로 대표되는 냉전 분단 시절의 유적들, 베를린 필하모닉의 오케스트라 공연과 슈타츠오퍼의 오페라 공연, 베를린국제영화제의 볼거리, 베를린국제마라톤의 러닝크루, 많은 호수와 숲 그리고 티어가르텐(Tier Garten)으로 대표되는 베를린의 생태주의적 자연환경, 동베를린의 힙한 문화명소, 상수시 궁전(Schloss Sanssouci)과 포츠담회담 장소인 체칠리엔호프 궁전(Schloss Cecilienhof)이 있는 근교도시 포츠담 등을 오롯이 간직한 베를린은, 필자가 보기에 유구한 역사와 문화 전통을 가진 런던, 파리, 로마에는 다소 미치지 못하겠지만, 유럽 내 최고의 여행관광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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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이 글이 아직 베를린을 잘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조금은 흥미 있는 하나의 베를린 안내자료로 다가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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