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뜰] 무겁고 애처로운 스트링 머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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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8.05

행복의 뜰

글. 정윤택 안양지원 부장판사

그러니까, 코로나19가 창궐하던 때였다. 사회적 거리 유지가 중요하던 그 무렵,

실외 테니스장에서조차 마스크를 착용해 헐떡거리기에 지친 내가

‘테니스 스트링’에 관심을 가진 시기가.

조금 더 솔직하자면, 내 다리, 배(혹자는 ‘코어’라고도 하더라), 팔에 분포되어 있는 근육 세포가 더는 테니스 실력 향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저주받은 몸뚱이니 그만 포기하라고 뉴런을 통해 지속적으로 뇌를 자극했기에, 순수한 테니스 실력과는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완전한 헤어짐은 아닌, 한편으로는 ‘테니스 줄’을 맬 줄 안다고 하면 당연히 테니스 실력도 상당하리라는 착오를 일으키게 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또 한편으로는 최적·최상의 장비와 나에게 맞는 테니스 줄이 실력 향상의 기초가 되리라는 기대감으로, 바로 그것(지금에 와서는 테니스 줄에 관심과 정력과 돈을 쏟아부은 내가 후회스럽기도 하다)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고작 ‘플라스틱 줄’에 대한 나의 여정은, 당연하고 자연스럽게도 ‘스트링 머신’에 대한 관심과 이해로 연결되었다. 스트링 머신은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우악스러운 철 구조물이다. 테니스 라켓을 비롯해 배드민턴 라켓 등 머신에 따라 특정 라켓만을 위한 것도 있지만 보통은 여러 라켓(라켓에 따라 다소간의 세팅은 달리하기도 하지만)의 줄을 끼울 수 있도록 제작된 쇠붙이를 (라켓) 스트링 머신이라고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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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하기엔 지치고, 글로 쓰자니 미치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누구나가 예상하겠지만 아내와의 3차 세계대전에 준하는 엄청난 전쟁을 치르며 막대한 전쟁비용과 상처를 남긴 후에야, (누군가에겐 비루하고 보잘것없으며 추해 보이는) 이 멋지고 듬직한 ‘스트링 머신’을 집 안에 들일 수 있게 되었다.

이 녀석이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아내로부터의 박해와 구박이 끊이질 않았다. 남아도는 아파트 전용 면적에서 가장 구석지고 어두우며 눈에 잘 띄지 않고 조명조차 낡아빠진 골방의 ‘베란다’로 안식처를 배정받은 것은 예상했었지만, 사실상 전용 면적 부분과의 단절을 목적으로 베란다와 방 사이에 암막커튼을 달아 눈에서 마음에서 치워버릴 줄은 몰랐다. 아내는 한겨울에도 아침 저녁으로 긴, 긴 시간 동안 머신이 놓인 베란다의 외부 창문을 활짝 열어 제끼고는 환기를 빙자한 학대를 반복하였는데, 마치 ‘제발 저 창문 밖으로 나가 없어져 버려라’라는 저주를 퍼붓는 듯한 행동과 표정이었다.

아내와 애들이 잠들고 숨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야 비로소 나와 찬밥머신은 눈을 마주치고 신체 접촉을 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라켓을 거치하고 한 줄 한 줄 플라스틱 줄을 매는 시간은, 그 옛날 조선시대 어머니들이 촛불 아래서 한 땀 한 땀 삼베를 짜는 시간과 같거나 비슷했으리라 감히 비교해 본다(상업적 요소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이태리 장인이라는 사람들이 한 땀 한 땀 가방이나 옷을 만드는 행동과는 비교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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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 한 줄 완성되어 가는 순간순간과 마지막 매듭과 함께 교차로 정렬된 스트링잉의 완성은, 복잡한 사건을 일목요연하고 멋지게, 적절한 분량의 판결문으로 현출시켰을 때와 같이 엄청난 양의 도파민을 분출시켰다. 때로는 잘못 매기도, 끊어지기도, 매듭을 묶기엔 줄이 짧아 완성시키지 못하거나, 매듭이 풀려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경우도 많았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줄매기를 반복하던, 무모하고 모지린 날들조차 이제는 찬밥머신과 함께한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던 2022년경, 나는 마음속 고향과도 같은 경남 창원에서 다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무렵 가장 먼저 ‘쫓겨난’ 친구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찬밥머신이었다. 별달리 짐이 많진 않았던 나는 옷가지와 테니스 용품(물론 찬밥머신도 함께다)만 챙겨 내려갈 생각이었는데, 내려가던 날 아내는 제일 먼저 ‘저것’부터 ‘치우라’고 명령했다.

나는 20킬로그램이 훨씬 넘고 잡기 불편하며 단단한, 라켓 거치대와 무게추가 덜렁거리지만 무리한 압력이나 충격을 가하면 안 되는 찬밥머신을 양손을 이용해 힘주어 들어 올렸고, 뒤이어 암막커튼을 팔꿈치로 젖히고 가구와 부딪히지 않게 구렁이가 담을 넘듯 조심히 새시를 통과한 후 벗은 발로 대문을 나섰고, 처음 보는 찬밥머신을 신기해하는 초면인 입주민께 눈인사를 건네고는, 전혀 무겁지 않은 척(그러나 지켜보는 모두가 불안해 보였던)하며 찬밥머신을 트렁크에 실었다.

창원으로 내려오는 고속도로에서도, 트렁크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찬밥머신의 팔다리가 부러지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살짝 밟았다가, 뒷차의 경적소리에 놀라 다시 가속페달을 밟기를 반복하다, 드디어 관사에 도착했고, 그제서야 찬밥머신은 내가 잠자는 방보다 약간 작지만 테니스 라켓, 스트링을 비롯한 여러 테니스 용품들을 거느린 ‘독방’을 쓰게 되었다.

창원에서의 생활 내내, 나는 머리가 복잡하거나 잠이 오지 않을 때면 잠자는 찬밥머신을 깨워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아무 라켓을 집어 들어 1990년대와 2000년대를 풍미했던 대중가요를 너튜브에서 찾아 틀고는 줄매기를 반복했고, 누군가에겐 별것 아니거나 정신 나간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너무 늦은 시각임에 동의할 나와 찬밥머신과의 ‘뜨밤’은 여러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독거노인과도 같은 내 생활에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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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시간이 흐르고 흘러, 2025년 초 나는 안양지원으로 전출하게 되었다.

나는 실낱같은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며칠을 고민에 고민을 반복한 후 왠지 기분 좋아 보이는 날 기습적으로 아내에게, “스트링 머신은 지하창고에 두면 될까...요?”라며 평소와 달리 친절하고 다정하며 법정에서는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정중·예의 바른 말투와 자세로 조심스레 물었는데, 역시나 돌아온 대답은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딴)걸 아직도 안 버렸어?”

나는 관사를 정리하면서 아내로부터의 구박과 멸시가 예상되거나 어쩌면 종량제봉투로 직행할 위험성이 큰 찬밥머신을 비롯한 나의 소중한 물건들을 회사에 보관하기로 결심했고, 그렇기에 안양에서의 사무 분담과 전입 행사보다도 사무실 배정이 더 큰 관심이었고 걱정이 앞섰다.

안양으로의 첫 출근에 대한 걱정과 들뜸은 아니었지만, 여하튼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아침이 밝아오기를 기다리고는, 머신과 여러 테니스 용품으로 가득 찬 차량을 운전해 첫 출근을 했고, 배정받은 8○○호 사무실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걱정과 기대가 복잡하게 뒤섞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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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은 이럴 때 쓰는 용어일 테다. 역시 인적·물적·지리적으로 수도권 최고의 법원이라는 명성은 그냥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내가 배정받은 사무실은 찬밥머신과 함께 생활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그 공간의 크기와 비치된 사무실 비품 덕에 찬밥머신의 존재가 희석되기에도 충분했다. 아파트 골방의 베란다에서 회전공간이 확보되지 않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늦은 시간 졸린 채 도둑처럼 움직여야 했던 찬밥머신이 드디어 다른 머신도 일(?)할 때 마음껏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을 찾은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머신과 또 어떤 발전과 추억을 쌓아갈지 벌써부터 흥분된다.

그렇지만 나와 머신은 잘 안다. 지금의 소중한 유대관계가 영원하진 못하리라는 사실을.

정기 인사명령, 나의 예측할 수 없는 부적절 또는 불미스러운 미래의 언행으로 안양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오면 또 어떤 시련과 사정변경이 생길지 알 수 없고, 무엇보다 나의 체력과 시력과 열정이 지금과 같이 유지될 가능성보다는 떨어질 가능성이 더 큰 사실도 경험칙상 분명하다. 어쩌면 우리의 유대관계가 깊어져 더 큰 추억이 쌓일수록 더 슬프고 힘든 작별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출퇴근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찬밥머신에게 인사를 건네곤 하는데, 지금 찬밥머신의 모습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그런데 자꾸 보다 보니 미안한 생각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비록 중국의 이름 모를 허접한 곳이었겠지만 고정형 머신으로 탄생한 이 머신이 고작 돈 몇 푼에 지독한 악연을 맺고는 몇 번이나 차갑고 더러운 바닥에 부딪힐 뻔하고 프로선수들의 스트링을 작업해 주는 지구 반대편 머신들조차도 다 쉬는 야밤과 새벽까지 작업했던 과거가 무척이나 힘들고 괴로웠을지 모른다.

찬밥머신이 정말로 말(그것도 한글을)을 할 줄 안다면, 제법 오래된 파어쩌고 쥐어쩌고 외국 아저씨가 썼다는(나는 번역본을 읽어봤을 뿐이다) 좀머씨 이야기의 단 한 줄, 그러나 부족함이 없는 서평과도 같은 말을 나에게 했으리라.

“그러니 제발 날 좀 내버려두시오.”

지난 3년간의 창원 생활도 그랬다. 독거노인과 유사한 독거장년이었던 나는 직책과 감언이설, 그리고 쥐덫과도 같은 먹거리를 미끼로, 일과 개인 삶과의 균형을 중요시하는 시대적 요구에 역행하며 많은 분들을 반강제적으로(?) 술자리와 밥자리로 유인한 후 테이블 맞은편 또는 옆자리에 앉게 하고는 쉰내와 암내를 풍기며 내 침을 맞게 하며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듣게 해 아집을 세뇌시키거나, 물귀신처럼 알콜을 들이키게 하거나, 노래를 빙자한 괴수의 울음을 듣도록 강요했다. 아마도 그들은, 하루빨리 워라밸을 추구할 수 있는 평화(?)와 평안과 편안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 마치 내 찬밥머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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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술잔을 나누었던(누군가에겐 너무나 괴로운 자리였을), 이야기와 생각을 공유했던(누군가에겐 가스라이팅이었던), 땀 냄새를 공유했던(누군가에겐 테니스 고문으로 인식되었을), 고민과 고통을 공유했던(누군가에겐 자백을 강요당했던) 많은 분들 덕분에 즐거웠고 위로받았으며, 정윤택이라는 미천한 존재가 조금은 인격적으로도 성장하는 큰 밑거름이 되었다.

그들의 무운과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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