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세상 X 낭만필객 ③] 몽케테무르 이야기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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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임종효 부장판사(서울고등법원)


조선은 1405년(조선 태종 5년) 오돌리의 몽케테무르와 오랑캐의 파아손이 명에 입조하여 두만강 남록으로 건주위가 확장되고 모련위가 설치되자, 1406년 2월 보복조치로 경원에서 시행되던 교역을 중단시켰다. 경원에서는 여진족이 소와 말 등을 가져와 쌀, 포목, 소금 등과 맞바꾸어 가는 교역이 시행되어 왔다. 이는 여진족에게 생필품을 공급하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일 뿐 아니라 여진 수장에게는 경제력과 권력의 원천이었다. 이러한 교역이 중단되자 혐진우디거의 키무내는 무력 시위로 대응하여 약 1달 뒤 경원의 소다로 지역을 습격하고 말 14필을 약탈하여 갔다. 여진족이 조선을 공격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한편 몽케테무르는 1406년 5월 한양에 시위로 남겨 두었던 아우와 아들 등 오돌리 부민 11명을 돌려달라는 요청을 조선이 아닌 명나라에 하였다. 명나라는 조선에 몽케테무르의 요청을 들어줄 것을 요구하였고, 결국 조선은 오돌리 부민 11명을 송환하였다. 같은 일은 다음 해에도 벌어졌다. 여진 수장 동쇄로아, 후르카 수장 아하추는 같은 방식으로 부민을 송환하여 갔고, 몽케테무르는 오돌리 부민이 아닌 다른 여진인까지 송환하여 갔다. 태종의 심사가 어떠하였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태종은 1407년 조선민이 청주(현재 북청군) 이북에 가려면 증명서를 발급받도록 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여진족과 교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변경의 긴장이 고조되자 얼마 후 경성과 경원에서 교역을 제한적으로 재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역은 재개되었으나 여러 제한이 없어지지 않자 여진족의 불만은 나날이 높아졌다. 결국 혐진우디거의 키무내, 탐주우디거의 갈다개가 연합하고 일부 오돌리와 오랑캐가 가세하여 1410년 경원을 공격하였고, 조선의 경원부 병마사와 관군 15명이 전사하였다. 조선은 이에 대한 대응으로 길주도찰리사 조연을 주장으로 하여 병사 1,150명의 북정군을 출정시켰다. 그러자 몽케테무르는 조연에게 부하를 보내 자신도 군대를 이끌고 조선군에 합류하겠다고 하였으나, 막상 조선 관군이 두만강을 건너 두문으로 진격하자 연고를 칭탁하고 나오지 않았다. 조선 관군은 1410년 3월 두문에서 단독으로 군사작전을 벌여 오랑캐와 오돌리의 만호 또는 천호였던 파아손, 아고거, 착화 등과 부민 수백 명을 참살하고, 수십 명을 사로잡았다.


조선 관군이 혐진우디거와 탐주우디거가 있는 고주(흑룡강성 영안시)와 탐주(길림성 돈화시)까지 가지 않고 두문에서 군사작전을 벌여 다소 엉뚱하게 오랑캐와 오돌리를 공격한 연유에 대해서는 여러 혼란스러운 기록과 분분한 해석이 있다. 그러나 조선 관군이 딱히 혐진우디거와 탐주우디거만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던 것이 아니라 여진족 일반에게 군사적 힘을 보여주어 굴복시키는 데에 주된 목표가 있었다고 본다 하여 대과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 관군의 군사작전은 오히려 반대 방향의 기류를 만들었다. 오돌리, 후르카, 오랑캐, 우디거 등으로 사분오열하여 서로 싸우던 여진족이 반조선 감정으로 단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심에는 몽케테무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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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케테무르는 1410년 5월 8일 오돌리와 오랑캐 150명을 동원하여 경원 옹구참을 공격해 조선민 22명과 소, 말을 약탈하였고, 8일 뒤에는 오돌리와 우디거 1,000명으로 경원부를 공격해 조선군 73명을 살해하고 말 120필 등을 빼앗아 갔다. 경원부 병마사 곽승우는 화살을 맞고 아오지 목책성으로 도주해 들어갔고, 몽케테무르는 아오지성을 포위한 뒤 무고한 오돌리 부민을 죽인 이유를 추궁하였다. 공성전은 몽케테무르의 퇴각으로 곧 끝났지만, 조선은 경원부를 두만강변의 소다로에서 후방의 경성으로 물리고, 경원에 있던 태조 고조부모의 능묘인 덕릉과 안릉을 함주로 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몽케테무르 또한 조선의 보복을 우려하여 회령을 떠나 두만강 북쪽으로 이주하였고, 한 달 뒤 조선 조정에 회령으로 돌아갈 수 있게 허락해 줄 것을 간청하였으나, 태종의 냉담하고 강경한 태도를 확인했을 뿐이었다. 몽케테무르는 약 1년 동안 두만강 북변을 헤매다 결국 오돌리를 이끌고 아하추가 있는 봉주 근처로 이주하였다. 1412년 명이 몽케테무르를 건주좌위지휘사에 임명하여 건주좌위를 새로 설치하였는데, 이 점에 비추어 그는 건주위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자리를 잡았던 듯하다.


몽케테무르는 1422년 영락제의 몽골 친정에 참여했고, 이를 통하여 명과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었으나 동시에 몽골의 적이 되었다. 그 해 말 영락제는 몽케테무르에게 몽골의 보복이 우려된다는 이유로 회령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는데, 아마도 회령을 손에 넣으려는 노림수도 있었을 것이다. 몽케테무르는 마침 상왕으로 물러나 있으면서도 군사적 힘은 놓지 않고 있던 강경일변도의 태종이 승하하자 회령으로 돌아갔다. 1423년(조선 세종 5년) 약 12년만의 귀환이었다.


몽케테무르는 선발대 약 200명을 먼저 보내고 몇 달 뒤 본대 6,256명을 이끌고 회령으로 돌아온 다음 조선 조정에 글을 보내어 과거 태조의 부르심을 받아 살았던 곳에 백성 523호를 이끌고 귀환하였다고 알렸다. 세종은 잡곡 100석을 지급하고 차차 식량을 적절히 보내겠다고 하교하였다. 온건한 대응이었다. 몽케테무르 또한 조선과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하였다. 몽케테무르는 1427년 큰아들 권두를 한양에 파견해 전심하여 조선을 받들겠다는 뜻을 전하고 권두를 한양에 남겨 시위로 종사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이를 거절하였다. 자칫 명과 관계에 문제가 생길 것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권두는 1431년 다시 한양으로 가 과거 몽케테무르가 태종 시절 상호군에 임명되어 북변 방어의 임무를 수행했으니 아버지가 노쇠한 지금 그 지위를 자신에게 계승시켜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권두를 만나지 않았고 상호군을 수여하지도 않았으며 하사품만 주어 돌려보냈다. 세종으로서는 역시 명과 관계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조선과 명 사이에서 잇속을 챙기려는 몽케테무르의 속셈도 그린 듯 뻔히 보이는 마당이었다.

몽케테무르는 1432년 명에 입조하여 정1품 우도독에 제수되었다. 이는 명 조정에서 또는 명의 사신 앞에서 조선의 사신과 몽케테무르 중 누가 상석에 앉아야 하는가의 외교 프로토콜 문제를 일으켰다. 조선으로서는 실로 곤란하고 머리 아픈 노릇이었다. 그 해 몽케테무르가 아직 북경에 있을 때 조선은 아하추의 손자인 이만주가 이끌고 있던 건주위가 여연과 강계를 약탈하였다고 오해하고 이를 정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 세종은 정벌군의 사령관인 최윤덕에게 비밀 지시를 내렸다. 이만주를 공격하고 있을 때 몽케테무르가 북경에서 돌아와 건주위에 합세하면 ‘모르는 체하고’ 그를 죽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몽케테무르가 건주위에 합세하지 않았고 조선군과 길도 엇갈렸기 때문에 비밀 지시는 실행되지 않았으나, 세종이 몽케테무르를 얼마나 골치 아픈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몽케테무르는 이와 같이 조선에 의해 목숨을 잃을 위기는 넘겼으나, 다음 해인 1433년 한때 운명을 함께 하였던 양목답올이라는 자와 혐진우디거의 합동 공격을 받아 살해되었다. 비록 조선의 국익에는 반하는 인물이었으나, 중국에서 원과 명이 교체되고 한반도에서 고려와 조선이 교체되던 격변기에 가족과 부족의 생존을 위해 분투하였던 한 인간, 몽케테무르의 최후이었다. 그 공격으로 큰아들 권두 또한 살해되어 동생 판차와 둘째 아들 충샨이 함께 건주좌위를 이끌다가 건주좌위 인신(印信)을 놓고 다툼을 벌여 판차가 건주우위로 독립하였고, 조선이 몽케테무르의 사망을 계기로 6진 개척을 시작하였기 때문에(1434년), 몽케테무르의 사후 건주좌위는 예전의 위용에 미치지 못하였다. 


몽케테무르는 조선의 사료에 동맹가첩목아(童猛哥帖木兒) 또는 협온맹가첩목아(夾溫猛哥帖木兒, 용비어천가는 한글로 갸온멍거터물이라 부기)로 기록되었다. 협온(夾溫)은 금나라 때부터 명망 있던 성씨인 기오로의 과거 한자 표기 협곡(夾谷)과 중고 중국어 발음이 ‘지아구’로 같기 때문에 몽케테무르의 성씨가 기오로이었거나 최소한 이를 자칭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童)은 몽케테무르가 병용하였던 중국식 성이다. 기오로 씨족은 이미 금나라 때부터 중국식 성으로 동(仝) 또는 동(佟) 등을 사용하고 있었다. 몽케테무르는 영원하다와 쇠라는 뜻의 몽골어인 몽케와 테무르를 조합한 몽골식 이름이고, 맹가첩목아(猛哥帖木兒)는 이를 음사한 한자 표기이다.


몽케테무르는 6대손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건국한 뒤 조조원황제로 추증되어 청나라의 만문 사료에 아이신기오로 먼터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만주족은 씨쪽 일부가 갈라져 나갈 때 본래의 성씨인 할라 앞에 무쿤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새로운 성씨를 만들었으므로, 몽케테무르의 할라인 기오로 앞에 여진어로 금(金)을 뜻하는 아이신이 무쿤으로 붙어 아이신기오로 성씨가 새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시기는 아마도 누르하치 또는 홍타이지 무렵이지 몽케테무르 당대는 아닌 듯하다. 먼터무가 여진어로 무슨 뜻인지는 견해가 갈리나, 몽케테무르라는 이름이 오랫동안 말과 글로 옮겨 전해지면서 축약·변형된 것이라는 견해가 흥미롭다. 이 견해가 맞다면 몽케테무르에게 여진식 이름은 따로 있지 않았거나 전해지지 않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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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표지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나라의 사료에도 몽케테무르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으나 윤문이 많고 과장과 거짓이 심하여 그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사료는 원·명의 일부 사료 외에는 조선왕조실록과 용비어천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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