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세상 X 낭만필객 ②] 몽케테무르 이야기Ⅰ

글 임종효 부장판사(서울고등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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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케테무르(1370?~1433)는 송화강과 모란강의 합수부에 살던 여진 부족 오돌리의 수장으로 아버지에 이어 원나라의 만호장 벼슬을 받아 부족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 곳은 원나라가 여진족들을 오돌리, 후르카, 타온의 세 만호부로 편제하여 간접 지배하던 곳으로서 당시에는 여진어로 세 성씨라는 뜻의 일란 할라 또는 세 만호부라는 뜻의 일란 투멘으로 불리웠고, 용비어천가에는 이란두만(移闌豆漫)이라는 지명으로 기록되었다. 현재의 흑룡강성 의란현 일대이다.

그런데 몽케테무르는 고려 우왕 시절이던 1380년대 중후반 무렵 오돌리를 이끌고 후르카, 타온과 함께 고향을 떠나 남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원인에 관하여 조선태종실록에는 오돌리 등이 다른 여진 부족인 우디거1)와 상투하다 떠돌아다니게 되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오돌리, 후르카, 타온은 만호부를 구성할 만큼 위세를 떨치던 부족이고, 우디거는 자세한 기록이 없는 점에 비추어 그보다 힘이 적은 천호부 또는 백호부로 추정되니, 다소 의외의 기록이다. 그러나 당시는 원나라가 수도인 북경을 명나라에 내주고(1368년) 몽골초원으로 돌아가 명맥만 유지하여 후세에 북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시절로서, 원나라의 유신 나하추가 요양·심양 지역에 웅거하면서 명나라는 물론 북원에도 신속하지 않은 채 3자간 각축을 벌이다 결국 명나라에 투항하는(1387년) 일까지 벌어지던 격변기였다. 그로부터 약 40년 전에 우디거가 원나라에 대한 해동청 공납의무를 견디다 못해 반란을 일으키자 오돌리 만호부가 원나라 관군과 함께 이를 진압하였다는 기록, 우디거가 1384년에 여진 부족 중 가장 먼저 명나라에 귀부하였다는 기록은 당시 여진 부족들 사이의 권력관계가 격동하고 있었음과 함께 오돌리, 후르카, 타온의 이주 원인을 짐작케 한다.

몽케테무르의 오돌리 부족은 모란강을 따라 남하한 듯하고 결국 청나라 만문 사료의 오모호이 지역에 정착하였다. 훗날 김종서가 두만강 남록의  오음회(吾音會) 지역에 6진 중 하나를 설치한 뒤 본래 지명에서 회(會)를 따고 안녕을 기원하는 녕(寧)을 붙여 회령진이라 이름하였는데, 오음회가 바로 오모호이를 음사한 한자 표기임은 쉽게 알 수 있어 오모호이는 현재의 회령시로 비정된다. 그러나 청나라 한문 사료에서 오모호이를 음사한 여러 한자 표기 중 아막혜(俄漠惠)가 있는데 현재 길림성 돈화시에 같은 지명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오모호이는 두만강 남록의 회령뿐 아니라 그 북록의 산간 지역까지 널리 아우르던 지명이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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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후르카는 봉주에 정착하였는데, 견해는 여럿 있으나 이는 대체로 요녕성 봉성시로 비정된다. 타온이 어디에 정착하였는지는 기록이 없으나, 김종서가 다온평(多溫枰)에 6진 중 하나인 온성(穩城)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그곳을 타온의 정착지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 그 무렵 또 다른 여진 부족인 오랑캐 또한 수주에 정착하였고, 이는 두만강 남록의 종성시로 비정된다. 그러나 오랑캐가 두만강 북록의 두문 또는 토문에 있었다는 기록도 여럿 있다. 오랑캐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오돌리, 후르카, 타온보다 규모가 작은 천호부 또는 백호부로서 알 수 없는 경위로 함께 이주하였고, 고려 변경에 정착할 무렵에는 상당한 세력을 얻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오돌리, 오랑캐 등은 곧 고려에 귀부하였다. 고려사에는 1391년(공양왕 3년)과 그 다음 해에 알도리(斡都里)와 올량합(兀良哈)의 여러 추장들에게 만호·천호·백호 등의 관직을 하사하고 번병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태조실록과 용비어천가에는 조선 건국 전부터 이성계를 섬기며 활과 칼을 차고 잠저에 들어와 좌우에서 시위하는 한편 이성계의 동정서벌에 따라다니지 않은 적이 없다는 스물아홉 여진 추장의 이름이 나열돼 있는데, 첫 번째에 오돌리 수장 몽케테무르, 두 번째에 후르카 수장 아하추, 세 번째에 타온 수장 고복아알2)이 있고, 말단에 오랑캐 수장 괄아아팔아속도 있다. 

조선은 건국(1392) 직후부터 고려를 이어 변방의 여진족을 초무(불러 어루만지고 타이름)하여 간접 지배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태조는 오돌리의 몽케테무르, 오랑캐의 궁부대 등을 상만호에, 후르카의 아하추, 여진3)의 구로, 보야 등 십수 명, 골간우디거의 두칭개, 혐진우디거의 동난 등을 만호에 임명하고 때때로 식량과 각종 물품을 하사하는 한편 그 수장 또는 휘하 부장을 조선 조정에 입조하게 하였다. 오돌리, 오랑캐 등은 북쪽의 다른 여진족들과 조선의 직접 충돌을 막아주는 조선의 울타리이자, 조선이 명나라와 국경을 맞대어 직접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을 차단하는 완충 세력으로 중요하였다. 백성은 행정력, 경제력, 군사력의 원천인데, 훗날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한 후 남쪽의 조선민을 옮겨 정착시키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고 그 어려움이 조선 중후기까지도 해소되지 않은 채 계속 이어지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미 변방에 살고 있는 여진족을 초무하여 속민으로 삼는 정책은 그 중요성을 달리 강조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의 시책은 곧 명나라의 영토 확장 정책과 충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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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는 1387년 나하추의 항복을 받은 후 이미 요양에 요동도사를 파견하였고, 조선 건국 무렵에는 그밖에 요하와 혼하 강변의 평야 지대를 따라 남북으로 이어지는 심양, 

철령, 개원 등을 직접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명 영락제는 즉위 직후인 1403년(조선 태종 3년) 마침내 이러한 직접 지배의 경계를 넘어 천산산맥 동쪽에 거주하는 여진 부족의 수장들에게 여진 문자로 된 칙유문을 보내어 입조를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여진 부족 수장의 부족에 대한 지배권을 공인하고 관직을 수여함으로써 이들을 간접 지배하겠다는 뜻이었다. 조선 조정은 알려지지 않은 경로로 칙유문을 입수하여 분석하고 삼부를 모아 논의한 뒤 다방면으로 조치를 취하였다. 우선 여진 부족의 수장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명 조정에 입조하지 않도록 회유하였다. 명나라에는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 변경에 거주하는 여진족 수장들을 명 조정에 입조하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들이 입조를 위해 자리를 비우면 후방에 있는 우디거의 침입이 우려된다는 이유였다. 이는 단순한 핑계가 아니라 변방 정세에 관한 정확한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의 노력에 불구하고 후르카의 아하추는 즉각 명의 요구에 부응하여 1403년 명에 입조하였고, 이사성이라는 중국식 이름을 하사받는 한편 건주위지휘사에 임명되었다. 봉주에 건주위가 설치된 것이다. 1404년에는 송화강 하류에 올자위가, 흑룡강 하류의 사할린섬 맞은 편에 누르간위가 설치되었다. 이와 달리 조선의 노력이 일부 효과를 보기도 하여 명 조정은 1404년 함길도 11곳의 여진 부족에 대한 입조 요구를 포기하였다.

오돌리 상만호 몽케테무르는 명나라의 입조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한편 1404년 오히려 조선에 입조하여 상호군 벼슬을 제수받은 뒤 돌아가면서 아우, 아들, 처남을 한양에 남겨 시위하게 하였다. 몽케테무르는 1405년 영내로 찾아 온 명나라의 사신을 맞이하여 그 면전에서 입조 요구를 거부하였고, 오랑캐 만호 파아손, 착화, 아란 또한 같은 태도를 보였다. 태종은 이를 보고받고 바로 사람을 보내어 몽케테무르와 파아손을 치하한 뒤 각종 물품을 하사하였고, 얼마 뒤 몽케테무르의 직급을 올려 경원등처관군만호에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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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진만호 구요노가 사망하자 아들 요하에게 그 자리를 세습시켰다.

조선과 명나라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명 조정은 먼저 입조한 아하추를 앞세워 여진 수장들을 회유하였다. 조선 또한 청해여진 만호 출신으로 개국공신인 이지란, 골간우디거 만호 두칭개의 친족으로 조선 조정에서 행사직을 역임하고 있던 김동개를 내세워 여진 수장들을 설득하였다. 명 조정은 몽케테무르의 누이와 아하추 사이의 딸이 영락제의 제3황후인 점을 이용하여 “황후가 골육을 만나고 싶어 한다”며 집요하게 몽케테무르를 설득하였다. 양국의 치열한 경쟁은 조선의 실패로 끝나, 결국 몽케테무르는 1405년 북경에 입조하여 건주위도지휘사에 임명되었다. 조선으로부터 경원등처관군만호에 제수된 지 불과 일곱 달 되던 무렵이었다. 곧 오랑캐의 파아손도 명에 입조하여 모련위지휘첨사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동해로 가는 길이 열려 다음 해에는 수분하와 우수리강 일대에 아속강위, 소온하위 등이, 그 다음 해에는 연해주 남부에 희락온하위, 목양하위 등이 설치되었다. 이로써 흑룡강 하류역 이남부터 두만강 남록까지의 여진족이 100여 개의 위와 소로 편제되어 명의 손에 떨어졌다.

조선은 몽케테무르의 배신으로 둑이 무너진 꼴이 되어 동북방 변경의 경영에 위기를 맞게 되자 보복조치를 단행하였다.


※ ‘몽케테무르 이야기 Ⅱ’는 <법원사람들 9월호>에 게재됩니다.


각주

1)  ‌사료에는 우디거 계열 여진 부족이 여럿 나오는데, 여기의 우디거는 조선 사료의 훌룬우디거인 것으로 추정된다. 훌룬우디거의 훌룬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송화강에 합류하는 훌룬강(현재 호란하)에서 땄을 것이고, 훌룬강은 일란 할라로부터 멀지 않기 때문이다. 그밖에 고려 변경에는 혐진우디거, 골간우디거, 탐주우디거, 사하음우디거 등의 우디거 계열 여진 부족이 있었다.

2)  ‌이하 여진어 원음의 재구가 어려운 경우에는 조선 사료에 나온 한자 표기의 현대 한국어 발음으로 지칭한다.

3)  ‌‘여진(女眞)’은 중고 중국어 발음이 ‘뉘젼’으로 재구되어 외국어를 한자로 음사할 때 ㄴ과 ㅈ이 서로 넘나드는 현상이 있음을 고려하면 여진족이 스스로를 일컫던 ‘쥬션’의 음사임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이를 산해관 동쪽 또는 요양 동쪽의 여진족을 널리 아우르는 말로 쓰고 있었다. 그러나 여말선초의 고려와 조선은 본래부터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변방에 거주하던 여진 부족만을 ‘여진(女眞)’이라 하고, 그 무렵 북방에서 새로 이주하여 온 여진 부족은 부족명으로 구분하여 지칭하고 있었다. 사학계에서는 전자를 토착 여진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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