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필객] 어느 시보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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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필객] 어느 시보의 기억

2024.03.05

함현지 판사(서울중앙지방법원)

언젠가 꼭 쓰고 싶었던 글을 오늘 쓰기로 마음먹었다.
약 10년 전의 일이다. 당시 사법연수원의 마지막 학기는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는 것이 아니라, 실무수습(이른바 ‘시보’)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어느 기관에서 먼저 수습을 할 것인지는 각 조별로 달랐지만, 각 2개월씩 총 6개월에 걸쳐 법원, 검찰, 변호사 실무 수습을 한 뒤, 연수원을 수료하는 것이었다. 검찰은 검찰청법 및 그 시행령에 따라 사법연수생을 검사직무대리로 하여 수행할 수 있는 업무가 규정되어 있었으므로 각 검찰청에 파견된 시보들도 대개 비슷한 업무를 한 반면, 변호사 실무 수습은 각 사무실별로 지도변호사의 재량에 따라 해볼 수 있는 업무가 천차만별이었다. 그리고 법원 실무 수습은 그 중간 어드메쯤 있었다. 연수원의 연장 같은 메모나 판결문 초고 작성에서부터, 실전 그 자체인 국선변호나 민사조정에 이르기까지.

시보 업무, 종합민원실 법률상담 담당
당시 법원에서는, 시보들로 하여금 종합민원실 한구석에서 법률상담을 하도록 하고 있었다. 물론 법원은 어디까지나 중립적 기관이고, 시보들도 어디까지나 공무원인 만큼, 민원인이 원하는 마법 같은 해결책을 받아 갈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나도 당번 시간이 되면 자리에 앉아 찾아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원론적인 수준에서의 이야기를 해주는 정도에 그치고 있었다. ‘아, 그런 문제가 있으시군요. 이러하면 저러저러할 수도 있고, 이러하지 않으면 저러저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정도 수준이면 변호사를 선임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더운 여름날, 임대대차계약 관련 상담에서
그때는 역사에 남을 지독한 혹서기였는데, 원자력발전소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던 탓에 공공기관은 블랙아웃 방지라는 명목으로 낮에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 조금 구깃구깃해진 임대차계약서를 든 청년이 종합민원실을 찾아온 것은 그런 더운 여름날이었다. 그가 겪고 있는 문제는 사회적으로는 너무나 흔하고 법률적으로는 너무나 쉽지만, 당하는 사람의 삶의 기반을 들었다 놨다 하는 일이었다. 임대차 기간이 끝나서 이사를 가야 하는데 임대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계약서에는 다행히 확정일자인이 떡하니 박혀 있었으므로, 나는 계약서의 특약사항을 읽으면서 그에게 현재 이사를 간 상태인지, 전입신고는 되어 있는지 등을 물어보고, 임차권등기명령 제도 등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그가 매우 당황하면서 의자를 약간 뒤로 빼 앉으며 물러서는 것이었다. 나도 놀라서 계약서에서 눈을 떼고 그 청년을 보았다. 그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어쩔 줄을 모르면서 더듬더듬 말을 했다. “죄송합니다. 밖에서 좀 있다가 들어왔는데, 그래도 냄새가 나나 봐요. 정말 죄송합니다.” 나도 당황한 나머지 이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채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리고 퍼뜩 깨달았다. 평소 공부할 때의 습관대로, 내가 손가락 옆면으로 인중과 윗입술을 누른 채로 서류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는 아마도 자신의 땀 냄새나 담배 냄새 같은 것이 나를 불쾌하게 하고 있다고 짐작했던 것 같다. 그런 게 아니라고 말을 했어야 하는데, 내가 당황하여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청년은 ‘감사하다’라는 말을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계약서를 챙겨서 후다닥 자리를 떠났다. 뒤에 대기 중이던 민원인이 잽싸게 자리를 꿰찼으므로, 나는 영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다시 새로운 법률적 쟁점을 따져보러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몇 사람의 민원인을 또 보내고, 고개를 들어 보니 그 청년이 또 있었다. ‘많이 알려주셔서 감사하다’며 팩에 든 우유 하나를 접수대 위에 올려놓는 그를 보면서, 다시 너무 많은 생각이 머리 속에 엉켜버렸다. 물론 당시는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른바 ‘김영란법’)이 생기기도 전이었지만, 여하튼 사법연수생은 공무원이고, 변호사 아닌 자로서 법률상담의 대가를 받을 수 없는데 이 우유는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받을 수 없다고 말을 내뱉는 것은, 이미 불필요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는 이 사람에게 다시금 어떠한 모욕을 주는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닌가. 무엇이 옳은 선택인가. 이렇게 어버버하고 있는 사이에 청년은 우유를 그대로 둔 채 고개를 꾸벅 숙이고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마음 한구석에 남은 그해 여름의 꿉꿉함
그때 곧바로 사과하지 못한 까닭에, 그리고 우유를 감사히 받지도 부드럽게 거절하지도 못했던 까닭에,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그해 여름의 꿉꿉함이 남아 있다. 의도도 없이 누군가를 모욕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그 후 10년간 법원에서 일하면서 발전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이 있을 때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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