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발견2] 시를 잊은 그대에게

시를잊은그대에게 

 

시를 잊은 그대에게

 

글. 윤이나 부장판사(춘천지방법원)

 

1. 영화 ‘시’시를잊은그대에게


 2014년 겨울 나는 두 아이들과 함께 프랑스 샤모니 몽블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었다. 7세 아들과 갓 두 돌을 넘긴 딸을 데리고 홀로 유학생활을 하는 것이 만만치는 않았지만, 아직 끝나지도 않은 내 인생의 전성기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시기였다. 샤모니 몽블랑의 호텔 로비에는 한국 영화 ‘시(2010년, 이창동 감독, 윤정희 주연)’의 DVD가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한국 영화를 만난 것이 너무 반가워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이 DVD를 빌려 호텔 방에서 보기 시작했다.


양미자(윤정희)는 중학생 외손자 종욱과 둘이 살고 있는 60대 여성이다. 중풍에 걸린 강 노인의 수발을 들어주며 국가보조금을 받아 어렵게 생활하지만, 근처 문화센터에서 시를 쓰는 수업을 듣는 소녀 같은 모습이다. 미자는 수업을 듣고 시 쓰기를 연습하지만 좀처럼 써지지 않는다. 어느 날 미자는 손자가 친구들과 함께 같은 학교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하여 피해 여중생 희진이 강에 투신자살한 사실을 알게 된다. 가해자의 부모들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피해자의 홀어머니와 합의를 하고 사건을 무마하자며 500만 원씩을 부담하자고 한다. 미자는 손자를 나무라지만 종욱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외할머니를 무시한다. 그런 가운데 강 노인은 목욕 수발을 들던 미자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고 미자는 일을 그만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자는 병원에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는다. 미자는 500만 원을 빌려보려고 하지만 절망하고 강 노인과 성관계를 한 후 500만 원을 받아내어 가해자 부모 대표에게 건네면서, ‘경찰에 신고만 하지 않으면 가해 학생들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미자는 손자에게 비싼 음식을 사주고 손톱 발톱을 깎아준 후 둘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사이에, 미자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종욱을 데려간다. 미자는 다음 날 마지막 시 강의 시간에 꽃다발과 함께 시 한 편을 책상 위에 남겨놓고 사라진다.


미자가 남긴 시의 제목은 자살한 희진의 세례명을 딴 ‘아녜스의 노래’인데, 처음에는 미자의 목소리로, 그 뒤로는 희진의 목소리로 낭송된다.

 

시를잊은그대에게  

 

2. 나의 ‘시’


미자와 희진의 시 낭송이 끝났을 때 뭐라고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이 상당히 오래 남았다. 그 감정은 최근에 와서야 조금씩 정리가 되기 시작하였다. 작년에 예상치 못하게 전신마취 수술을 2번이나 했다. 수술은 잘 끝났고 지방 근무를 시작하기 전에 번거로운 일들을 해결했다고 나름 다행스럽게 생각하던 중, 그보다 조금 더 심각한 병이 의심된다는 검사 결과를 받았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조금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스럽기도 했다. 그 때 시가 써졌다.

 

시를잊은그대에게  

 

미자가 시 수업을 들어도 잘 써지지 않던 시가, 손자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전혀 반성하지 않을 때, 피해자가 자살했는데도 가해자의 부모들이 돈으로 범죄를 은폐 하려고 한 때, 합의금이 필요하여 병 수발을 들던 노인에게 몸을 허락한 때,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손자를 경찰에 신고한 후 피해자를 따라 강으로 가려고 마음먹은 때 비로소 써졌던 것처럼.


올봄에는 춘천에서 두 아이들과 함께 코로나와 더불어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다. 급식을 먹지 못하던 아이들에게 아침, 점심, 저녁을 손수 차려주면서 일을 하였는데, 다행히 춘천지방법원 직원들의 도움으로 맛있는 반찬을 착한 가격에 공동 구매하여 나눠먹을 수 있었다. 마음씨 좋은 참여관님께서 묵직한 반찬 꾸러미들을 차에 실어 각자의 집 앞에 내려주셨다. 모습도, 마음도 아름다운 행정관님께서 맛있는 김치도 주셨다. 그 때 또 시가 써졌다.

 

시를잊은그대에게 

 

얼마 후 엄마가 춘천에 오셨다. 몸이 많이 아프셔서 손주들에 대한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학교도 못가고 집에 갇힌 아이들과 놀아주겠다고 오셨다. 엄마가 가시고 난 뒤 관사에 남은 엄마의 흔적들이 너무 선명해서 펑펑 울었다. 그 때 또 시가 써졌다.

 

시를잊은그대에게 

 

3. 당신의 ‘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병을 선물 받고 혼란스러워하다가 작은 일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 시작한 올해부터였다. 문학청년이었던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오래 전부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동안 감정을 드러낼 수 없는 판결문과 일기 외에는 별다른 글을 써보지 못했다. 처음 써본 시들은 너무 초보적이고 개인적인 소재에서 벗어나지 못해 부끄럽지만, 조금 더 많은 고통을 선물 받아 나눌 수 있게 된다면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나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 ‘넘어짐에 대하여’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주는 시를 써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재찬 저 ‘시를 잊은 그대에게’는 ‘의술, 법률, 사업, 기술이 모두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하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라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의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올겨울에는 ‘시를 잊은 그대에게’를 읽어보고 나만의 시를 한편 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시가 잘 써진다면 고통에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위로가 될 것이고, 시가 잘 써지지 않는다면 아직 큰 고통 없이 살아온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수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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