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삶1] 자취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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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 나의 삶1] 자취생활

2019.11.06

자취생활

글. 지귀연 부장판사(부산동부지원)

1. 가족과 떨어져서

서울에 있다가 경향교류에 따라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300만 명이 넘는 인구를 갖춘 거대도시에 유명한 관광지이기도 하고, 게다가 비행기, 기차, 버스 등 교통도 편한 곳이다. 간절하게 원했던 곳 중 하나인데, 운이 좋아 이렇게 좋은 곳으로 가게 되어 너무너무 감사했다. 기뻐하는 가족들에게 함께 가자고 말했다. 아내는 서울에 직장을 두고 있고, 아이들은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교에 진학을 앞두고 있다는 이유로 못 간다고 한다. 사실 그냥 서울이 좋은 거다. 나 자신도 사실 같이 가는 것에 회의적이다. 서울이 좋은 거다. 교육이라는 핑계로, 생활권이 달라진다는 핑계로 그냥 그렇게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서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40이 넘었다. 아내와 자라나는 아이들이 있다. 예전 지방근무 때와는 정신무장 상태와 체력이 다르다. 아껴야 한다. 내가 아껴야 아내와 아이들이 학원비도 내고 우아한 모습으로 돈을 쓸 수 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 번 다녀가면 대략 12~15만 원이 든다. 가족들에게 말했다. 나 사우디아라비아에 갔다고 생각하라고. 자주 오지 못하더라도 그 돈 모아서 가족들에게 주는 게 더 나은 것 같다. 또 건강해야 한다. 술도 줄여야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 내 건강이 나빠지면 우리 애들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생명보험 1~2개로는 모자란다. 일도 무리해서는 안 된다. 스트레스를 없애려면 취미생활도 해야 하고, 문화생활도 즐겨야 한다. 운동도 해야 한다. 가족을 위하는 길은 어렵다. 그런데, 정작 같이 지낼 때는 왜 이런 생각을 안 했지?

2. 부산에 와서

은연중에 부산의 크기를 무시했었나 보다. 부산역에서 관사로 배정받은 장산역 오피스텔까지 지하철로 1시간이다. 사무실까지는 아예 지하철로 갈 수가 없다. 지하철과 버스를 조합해서 오면 1시간 10분가량 걸린다. 그런데 부산역에서 택시를 타면 사무실까지 30분 정도밖에 안 걸린다. 알고 봤더니 산이 많아서 지하철이나 버스가 산을 돌아가는 식으로 노선이 이루어져 있어 대중교통이 시간이 많이 걸린단다.

그럼에도 좋은 건, 오피스텔이나 사무실에서 부산공항(김해공항)까지도 1시간이다. 뭔가 이상하다. 일본, 동남아, 중국 등 가까운 여행지로 갈 때 천국이다. 공항 자체도 크지 않아 수속이 빠르다. 부산에서 외국을 오가는 항공권은 저렴한 것들도 많다. 그런데 아껴야 하니까 그냥 가지 말자. 응?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텅 비어있는 8평방에 미리 가지고 온 침낭을 펼쳐 속에 들어가 누웠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냉장고, 세탁기는 갖추어져 있고, 작지만 주방도 있어 뭘 해 먹기도 좋을 것 같았다. 이제 하나하나 배우면 되겠지. 요리도 배우고, 세탁기 돌리는 법도 배우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취미생활도 마음껏 해야지. 사실 나는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는 걸 원했던 건가? 침낭 안의 작은 세계가 이렇게 포근할 줄이야. 온갖 상념에 푹 잤다. 온몸이 마디마디 쑤셔서 죽는 줄 알았다.

3. 요리에 도전

집 근처가 번화가라 아침부터 하는 식당들이 많다. 지나가다 콩나물국밥집을 발견했는데, 국밥이 4,300원이다. 맛있다. 계란도 넣어주고 김치도 많이 준다. 또 다른 근처에는 돼지국밥집이 있다. 7,000원이다. 맛있다. 고기도 많고 마늘, 고추, 양파 등 밑반찬도 푸짐하다. 그 옆에는 김밥집이 있다. 기본 김밥이 2,000원이다. 정말 푸짐하다. 번갈아가며 먹었다.

나 하나 먹으려고 이것저것 장 봐서 먹을거리를 만드는 게 가성비가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뭘 해 먹으려면 주방도구가 필요하다. 귀찮다. 돈 든다.

그런데 인터넷 쇼핑, 다이소 등을 들락날락하다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미 마음만 먹으면 주방도구, 생활가전, 음식물 등을 정말 싼 가격에 살 수 있었다. 프라이팬 3만 원짜리가 1만 원에 할인할 때가 있었고, 멀쩡한 그릇이나 냄비를 오피스텔 1층에 내다 버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형마트에 가면 고기나 야채, 과일 등도 너무나 저렴하게 살 수 있었다. 유통기한 직전의 물건들은 사랑스러웠다. 예전 같으면 너무 양이 많아 남는 걸 버리기가 십상인데,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냉장, 냉동이 너무 잘 되니 오히려 많이 사서 쟁여놓고 먹기가 더 좋았다. 뉴스에서는 다 비싸다고만 하던데?

예전에는 어떻게 나누어 쟁여놓는지, 어떻게 해 먹는지를 알 수가 없었는데, 천지가 개벽했다. 블로그나 유튜브, 페이스북 등에 가보면 생활의 지혜가 그대로 들어있었고, 게다가 공짜로 배울 수 있었다. 그냥 잠깐씩 들여다보면 끝이었다. 오히려 부작용이 컸다. 아는 체하기 시작했다. 주변 분들과 대화를 나누어 보니, 대부분은 블로그나 유튜브에 나오는 분들보다 못한 것 같았다. 비비고에 의지하는 분들이 상상 외로 많았다. 김치나 된장은 알고 보니 다 사 먹는 것들이었다. 다들 해야만 하니, 가족들을 먹여야 하니 열심히 뭔가 만들어보고 먹이고 하는 것이었다. 나라고 왜 못해? 그렇게 차츰차츰 밥도 해보고, 반찬도 만들어보고, 스테이크도 구워보고, 국도 끓여보게 되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난 게 복이다. 복이야. 그런데 아내는 내가 뭘 자꾸 알아내 가는 게 싫은 눈치다.

4. 청소와 빨래에 도전

부끄럽다. 청소랑 빨래를 해 본 일이 거의 없었다. 결혼 전에는 어머니께, 결혼 후에는 아내에게 맡겼다. 깨어있는 지식인인 척했지만 실상은 중세 봉건시대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내 또래 다른 남자들 상당수가 비슷하다는 것을. 가끔 아닌 척 하는 분들이 있는데, 더 싫다.

처음 오피스텔 안의 세탁기를 만져보았다. 그냥 세제 넣고 빨래 넣고 버튼만 누르면 되는 줄 알았다. 자신 있었다. 그런데 세제 넣는 통을 열어 보니 3개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어디에 넣지? 설상가상 버튼을 살펴보니 울, 급속, 합성섬유 등 8개의 세탁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큰일 났다’고 생각해서 세탁기 회사를 통해 매뉴얼을 받았다. 그때부터 매뉴얼을 독파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10일 정도 지나고 나니 세탁물의 특성과 세탁의 요령, 물 온도와 헹굼의 중요성 등에 대해 조금 알 수 있었다. 세탁물을 분류해서, 각 기능에 맞게 세탁을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우리 집에서는 그냥 빨래를 다 모아서 대충 넣고 돌리는 것 같던데? 뭘 분류하는 건 본 적이 드문데? 티 한 장, 수건 한 장, 양말 한 켤레 등을 굳이 옷감, 재질, 색깔 등에 맞추어 분류해서 몇 시간 동안 세탁기를 돌리는 게 이상했다. 주변에 확인해보고 경악했다. 알고 봤더니, 보통 때는 그냥 ‘보통 세탁’ 버튼 누르고 급할 때는 ‘급속 세탁’ 누른단다. 비싼 세탁물은 그냥 세탁소에 맡긴단다. 이렇게 또 지혜의 문을 열었다.

8평밖에 안 되는 방을 위해 청소기를 사기는 돈이 아까웠다. 다이소가 천국이었다. 그냥 밀대 하나, 1,000원짜리 포 50장을 사서 결합해서 밀면, 먼지가 그냥 다 묻어 나왔다. 알콜 포까지 사서 밀대로 밀면, 물걸레 청소까지 다 된다. 정말 세상이 바뀐 지 오래되었는데, 너무 모르는 것이 많았다. 이렇게 쉬운 걸 몰랐다니? 이기적이고 나만 아는 삶을 위해 희생했을 가족들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감사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 자체가 신기하고 너무 재미있었다. 뽀얗게 묻어 나오는 먼지들과 머리카락, 그 직후에 펼쳐지는 물걸레질의 뿌듯함, 깨끗해진 방을 보며 ‘후훗’하고 웃을 때의 충만함. 한 일주일 했나보다. 지금은 아예 만지지도 않는다. 서울 집에 가면 여전히 누워만 있다. 나 자신이 한심하다. 그래도 문명의 이기를 다룰 줄은 알게 되었잖아?

5. 나 혼자 잘난 게 아니다

처음 부산에 올 때 많은 분이 조언을 해주셨다. 상당수가 나중을 위해 생존 기법을 배워오라는 말씀이었다. 혼자 지내더라도 인간적으로 살 수 있는 삶, 즉 밥해 먹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옷 갖춰 입을 수 있는, 어디에 가더라도 문화인으로 보일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분들은 다 그렇지 못한 게 확 티가 나는 분들이었다.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점점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많이 노력했고, 과거와 달라진 내 모습에 나도 놀랐다.

3개월 후 처음 아내가 부산에 왔을 때, 나는 의기양양했다. 깜짝 놀랄 거라고 생각했다. 미리 호언장담도 했었고, 오기 며칠 전에는 해먹었던 요리 리스트를 보이게끔 해 놓고, 청소한 티도 냈다. 아내한테 전화가 왔다. 왜 이렇게 음식도 안 해 먹고, 더럽게 사냐고. 응? 엉뚱한 데를 잘못 갔나 보네. 아니면 집에 도둑이 들었구먼. 퇴근 후 오피스텔에 가보니, 불과 2~3시간 사이에 집이 바뀌었다. 내가 드나들던 집이 아니었다. 외관상 달라진 건 별로 없는데,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심지어 냉장고 안도 달라졌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뭐가 달라졌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전체적으로 뭔가 굉장히 바람직해져 있었다. 저녁을 먹는데, 분명히 그냥 밥이랑 김치에 된장국 하난데 내가 해 먹었던 갖가지 요리랑은 수준이 달랐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 아내는 일장 훈계를 하고 그 다음날 바로 돌아갔다. 서울을 너무 사랑하니까. 그런데, 그런데... 그 후 다시 집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그러나 급속히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사람은 역시 혼자 살면 안 된다.

지금도 우리 법원 가족 여러분들이 맡은 일을 해낼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보며 많은 것을 희생하면서 묵묵히 돌봐주시고 성원해주시는 그 부모님, 형제들, 남편, 아내, 자녀들께 감사와 응원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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