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선미 기록연구관(법원도서관)
9월 9일, 2025 법원사자료 기획전 <사법의 전통, 변화를 거듭하다>를 대법원 본관 2층 중앙홀에서 개막합니다. 2011년 첫 기획전 이래 여덟 번째입니다. 법원사자료 기획전을 명명할 때 앞에 연도만을 기재하고 몇 회라는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현실적인 얘기가 숨어 있습니다. 법원사자료 기획전에 대한 서사(?)와 함께 올해 기획전의 내용을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7월호에서 소개한 것처럼, 2007년 법원사자료 중 박물류 300여 점의 설명서식(description)을 정리하며 등록·관리 체계를 정비하고, 2008년에는 법원사자료 전산관리시스템을 구축하여 ‘법원역사관’ 사이트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자료를 폭넓게 수집하여 주제별로 전시하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자료를 다시 확보하는 ‘선순환 구조’는 좀처럼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저 법원사자료를 관리하는 수준의 업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2010년 드디어 기회가 보였습니다. ‘도서관 운영지원’ 예산 중 추록사업을 더 이상 추진하지 않아도 되었던가 축소했던가 하여 해당 예산 3천만 원 상당을 감액하게 되었는데 이를 ‘도서관 문화행사’ 예산으로 편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2011년 예산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이로써 ‘법원사자료 기획전’을 격년마다 ‘전국법원 서예문인화전’과 번갈아 가며 개최하게 되었고, 2011년에 첫 법원사자료 기획전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좀 가시적으로 보이려면 ‘첫 번째’, ‘첫 회’를 강조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냥 ‘2011 법원사자료 기획전 <조선의 법과 재판>’이라 명명했습니다. 이는 법원사 업무를 한 사람이 전담하다 보니 전시콘텐츠를 계속 발굴할 수 있을지 우려(?)되었기 때문에 연도를 병기하는 형식으로 기획전을 지칭하게 된 것입니다. 그 뒤로도 ‘2013 법원사자료 기획전 <구한말 법과 재판, 근대사법의 태동>’, ‘2015 법원사자료 기획전 <일제강점기 법과 재판, 식민지 법정에 선 조선인>’, ‘2017 법원사자료 기획전 <대한민국의 법과 재판, 말과 글로 보는 사법의 역사>’부터 ‘2023 법원사자료 기획전 <空間, 걸으며 만나는 법원>까지 일곱 차례의 기획전을 개최하였고, 2011년부터 2017년까지 통사 형태로 구성한 기획전의 전시콘텐츠는 전시물 철거 시 가급적 살려서 각급법원에 대여하고 있습니다. 올해에도 10곳(사법역사문화교육관 2종 대여)에서 신청을 받았고 대여했거나 대여할 예정입니다.
2011 법원사자료 기획전을 준비하면서 업무자로서 걱정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2008년 사법부 60주년을 기념하며 신설된 ‘법원전시관’의 한 코너로 기존 ‘법원사자료 전시실’을 옮기고, 2010년 준공된 가인연수관의 ‘가인 김병로 전시실’을 마련할 때 참여하기는 했지만 온전히 법원도서관 주관으로 전시 기획부터 내용 구성, 전시대상 자료 선별과 외부 자료 섭외 등 일체를 독자적으로 추진하기는 처음이라 부담이 컸습니다. 게다가 조선시대 자료는 법원사자료로 소장하고 있던 것이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관련 문헌을 탐색하면서 동시에 전시 내용을 구성하며 시각적으로 보여줄 만한 자료를 추출하고 현존하는 자료의 소장처를 확인하며 자료의 활용가능성 여부를 문의해야 했습니다.
해치(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최종적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박물관, 안동 소재 학봉 김성일 종가의 운장각 등에 소장되어 있는 조선시대 법제사 자료를 섭외했습니다. 다만, 전시공간이 대법원 청사 서관 로비로 오픈된 곳이다 보니 자료를 대여하여 전시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그래서 외부기관의 소장자료를 전자파일로 입수하고 전시 패널에 이미지로 활용하거나 복제하여 전시하게 되었습니다. 2011년 기획전에서 대표적인 전시자료는 지금의 사건기록과 판결서가 하나로 구성되어 소송의 시작부터 선고까지 일체의 과정을 기재한 결송입안(決訟立案)이었습니다. 2점은 복제본으로 제작하였고 2점은 현수막 천에 출력하여 전시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 대사헌의 흉배에 자수된 해치를 대표 이미지로 선별하였습니다.
왼)현수막 형태로 전시한 한성부 입안(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오)상단-'이지도, 다물사리 결송입안(학봉 김성일 종택 소장), 하단-손광현, 최득층 결송입안(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를 섭외하면서 가장 걱정됐던 곳이 학봉 김성일 종택이었습니다. 김성일이 나주군수일 때 70대 노파의 자손이 몰락한 양반가의 사노비인지 성균관의 관노비인지를 판단한 노비소송사건의 결송입안을 촬영하기 위해 사진작가와 함께 방문하였습니다. 종택에 들어설 때 바라본 파란 하늘과 잘 정비되어 있던 잔디밭 그리고 오랜 시간이 켜켜이 느껴지던 가마솥, 벽에 걸려 있던 정갈한 두루마기는 시간을 거슬러 아득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고문서는 항온항습기까지 갖춰진 현대적인 문서고에 보존되어 있었고, 자료관리에 진심인 어른은 낯선 방문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료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이어서 전문 촬영시설 없이 조금은 긴장하며 조심스럽게 자료를 촬영했습니다. 마무리될 즈음 인연이 더 닿을 리 없는 이들에게 손수 장만한 다과를 내주셔서 대접받는 느낌을 안고 나섰습니다. 이때 촬영한 자료를 복제하여 전시하였는데 전시 관람자의 몰입도가 가장 높았던 기억이 납니다.
왼) 자료를 설명하는 어른, 오) 식혜를 곁들인 다과
그 후 15년 동안 가족관계등록제도 도입 10주년, 사법부 70주년 등 특별전도 개최하였고, 이제 여덟 번째 기획전으로 ‘2025 법원사자료 기획전 <사법의 전통, 변화를 거듭하다>’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기획전은 정책연구용역 「세종대왕의 재판관으로서의 면모와 사법제도 운용사례에 관한 연구」, 올해 4월 오픈한 영상 <사법의 전통, 변함없이 변화하다>에 이어 세종 국제컨퍼런스도 개최 예정인 상황을 고려하여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2011 법원사자료 기획전이 조선시대 법제사의 일반론이었다면 이번 기획전에서는 세종대왕의 흠휼정신에 기초한 당시 법제나 사법제도의 개선 그리고 훈민정음 창제를 소개하고 특징 있는 조선시대의 사법 관련 고문서로 소지, 입안, 결송입안을 소개합니다.
제1주제 ‘민본적 법치체제의 기틀을 마련한 세종대왕’
※ 대법원 본관 2층 중앙홀, 전시패널 배치 평면도
세종대왕은 태조즉위교서에 이어 선대왕들이 마련한 법을 존중하면서도 내용상 영구히 존속될 만한 수교를 전典, 그렇지 않은 것을 록錄으로 구분하여 대전을 편찬하는 원칙을 마련하고 실제 법전을 편찬하면서 이후 경국대전을 비롯한 통일법전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종의 ‘어린 백성’의 사건 조사절차를 밝힌 『신주무원록』 편찬, 감옥제도 개선, 신중한 형벌선고 사례, 흠휼정신의 결정판 훈민정음 창제를 내용으로 전시합니다. 해당 시기의 자료는 세종실록이 대표적입니다. 실록의 문장 하나하나를 전시로 구성하다 보니 많은 내용을 담을 수도 없었고 시각적으로 구성하는 데 많은 한계가 있어서 일러스트로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제2주제 ‘조선의 사법 관련 고문서 - 소지, 입안, 결송입안’
현전하는 소지와 입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소장 접수부터 판결까지 소송의 시작부터 심리과정과 선고내용까지 일체를 보여주는 결송입안은 가장 오래된 것이 16세기 초반 장예원 결송입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당 고문서 사본을 이용하여 탈초한 연구가 있습니다. 소장처로 예상되는 곳과 연락이 닿았습니다만, 오히려 소장자료 반수를 도난당하여 남아있던 문서를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보관하고 있으니 그곳의 문서 중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라는 저간의 사정을 하염없이 들어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해당 고문서는 수탁기관에도 없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연구자에게도 메일로 문의하였지만 잘 전달되지 않았는지 답신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이 외는 개인 문중이나 문중의 문서를 위탁받아 보관하고 있는 기관과 연락하여 전시 취지 등을 알리고 소장처에서 요구하는 절차에 따라 자료의 전자파일을 입수하였습니다. 물론 이번 전시에 한해 사용하고 폐기하겠다는 각서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소정의 절차는 자료를 잘 관리하고자 하는 조치이기 때문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 맞습니다.
마지막 제3주제 ‘한글로 작성된 사법문서’
앞서 소개한 자료는 모두 한자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해례본에 ‘어린 백성’이 법을 알고 억울함을 표기할 수 있도록 글자를 만들었다고 밝힌 것과 같이, 왕은 위급한 상황에서 ‘왕의 말씀[윤음]’을 한글로 설파했고 이른바 선조국문유서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글로 작성된 결송입안은 확인하지 못했고 한글로 작성된 소지류를 선별하여 소개하였습니다. 내용은 진정서, 청원서에 가깝습니다. 여성이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청원이나 남편과 아들이 정치적 변고로 처형된 후 후손을 잇기 위해 노비의 사망을 손자의 죽음으로 변조하였다가 신원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손자의 처벌이 논의될 때마다 자신의 죄임을 주장하며 궁궐에 돗자리를 깔고 읍소하던 사대부 여인의 진정, 그리고 일종의 결정문인 제사(題辭)를 한글로 표기한 소지까지 나름의 특징을 갖는 한글 소지를 보여드립니다. 해당 한글 소지류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한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로 온라인에서 누구나 다운로드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가 무송(無訟)을 지향한 사회였지만 죄인에게는 벌을 주고, 백성은 억울함을 풀기 위한 재판을 피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세종대왕 치세의 사법에 관련 내용, 그리고 세종대왕의 정신이 경국대전은 물론 후대 송관들에게 이어졌고,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조선시대 사법 관련 고문서 중 접수와 처리가 일상화된 한글 소지를 소개합니다. 특히 세계적으로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 특정할 수 있는 문자, 훈민정음이 세종 시기 ‘언문’으로 지칭되다가 1894년 ‘국문’이 되고, 일제강점기 ‘한글’이라는 독자적인 이름을 갖고 이후 판결서, 등기부, 호적부와 같은 공식 문서를 기록하는 문자로 자리 잡기까지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사법의 전통제도와 정신이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문자로 작성되어 공무(公務)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지켜내면서, 시간의 흐름과 환경의 변화 속에서 어떻게 변화를 거듭하여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는지, 만나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상단 - 왼)도입부, 오)제1주제
하단 - 왼)제2주제, 오)제3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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