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고선미 기록연구관(법원도서관)
2014년 말 다음 해 예산심의가 있던 시기, 국회에 가 있던 도서관 예산 담당 사무관의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신규사업 ‘역대 대법원장 등 법원 주요 인사 구술채록 DB구축 사업’ 검토문을 빨리 보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계속 사업의 예산증액이 긴요했던 때라 신규 사업은 예산요구안에도 빠져있던 참이었습니다. 통화 말미에 담당 사무관은 ‘그래도 많이 기대하지는 말라.’는 언질을 빼놓지 않았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성의껏 검토서를 전달했습니다. 결과적으로 2015년 해당 사업 예산이 반영되었습니다. 사업이 늘어난 것을 운이 좋다고 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것이라 좋았습니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법원사자료는 1만 7천여 건에 이릅니다. 그러나 대부분이 1990년대 후반부터 생산된 문서나 간행물류여서 이것으로 법원의 주요 장면을 전시하거나 편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각급법원에서도 더 이상 옛 자료를 찾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사법행정의 장면 장면을 경험한 인사들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구술채록 사업을 제안한 것입니다. 이달의 법원사에서는 법원사 업무, 구술채록 사업 그리고 2021년 7월 11일 작고하신 이홍훈 전 대법관님에 대한 극히 개인적인 기억을 공유해 볼까 합니다.
* 법원사자료 보유현황표(생산연대별, 자료유형별)
2006년 12월, 지출계장이 겸하던 법원사 업무를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인계받은 것은, 수기로 작성한 자료수집대장, 13평 정도의 자료실과 그 안의 자료 그리고 법원사전시실 열쇠였습니다. 자료는 문서형태가 대부분이다 보니 비닐 서류봉투에 담겨 등록번호순으로 서가에 배열되어 있었습니다. 법원사전시실은 대법원 대법정 뒤편에 있었고 청사 견학신청자 등 예견되는 방문자에 한해 관람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었습니다.
* 법원사전시실(1995년~2008년) 입구와 정의의 여신상 환조
* 패널과 서소문 옛 법원청사 모형 전시
* 분당 법원사자료 서고 입구와 모빌렉
2007년 자료목록을 엑셀 파일로 작성하였습니다. 자료의 등록번호는 자료형태를 구분하는 알파벳 뒤에 연번을 부여하는 식으로 체계를 구성하였고, 설명서식(description form)을 마련하였습니다. 행정박물류를 대상으로 시범적으로 설명서를 채우며 항목을 가감하며 300여 건의 설명서식을 작성하였습니다. 설명서를 출력하여 링 바인더에 편철하였습니다. 이렇게 정리된 부피 큰 자료는 분당 전산센터 지하 1층 법원사자료 서고로 옮겨 보관하였습니다.
아, 이 자료설명서 링 바인더는 2008년 고 김홍섭 서울고등법원장의 유족이 선친의 자료를 보러 왔을 때 매우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지방자치단체에서는 해당 지역을 알릴 수 있는 방법으로 전시시설 확충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아마도 김홍섭 법원장님 유족에게도 요청이 있어서 방문하였던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전시시설이나 자료실 등 하드웨어는 미흡해도 자료를 잘 관리하고 있는 방증으로 그 링 바인더를 보여드렸을 때 만족하고 돌아가신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정비한 자료 등록, 관리체계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것이야말로 전산시스템을 구축하여 관리하는 것이 맞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차기년도 디지털도서관 사업의 하나로 법원사자료전산관리시스템을 구축하고 온라인으로 검색, 이용할 수 있는 법원역사관 사이트를 오픈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낙후된 전시실을 법원전시관의 전시코너 ‘역사마당’으로 옮겨 상시 개방하고 청사 방문자 누구나 관람할 수 있게 된 것도 같은 해 2008년이었습니다. 이로써 법원사자료를 이용할 수 있는 온, 오프라인 환경이 마련되었습니다.
* 2008년 구축된 법원사자료 전산관리시스템과 법원역사관 사이트/ 법원전시관 입구와 역사마당(2008년~2012년)
이제 자료를 수집하는 데 집중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2009년, 다음 연도 준공 예정이던 가인연수관 전시실 구성에 활용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에 관한 자료를 기획, 수집하였습니다. 서울대와 고려대 대학 강사, 밀양지원 판사, 독립투사 무료변론 변호사, 대한민국 대법원장, 중의원 선거 입후보 등 가인의 생애를 좇아 관련 기관의 보유 자료를 추적하고 이미지 파일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리고 2010년 이를 활용하여 가인 김병로 전시실을 구성하였습니다. 때마침 가인 유족이 위탁한 유품도 전시할 수 있었습니다. ‘특정 사안이나 주제에 따라 외부 기관의 보유자료를 활용할 수 있다.’는 경험은 법원사 전시, 편찬 시 관련 자료를 확충하는 방법으로 유용하다는 점을 확인하였습니다.
사라지고 없는 자료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업무자의 노하우를 추출하여 관리하는 지식관리시스템(knowledge management system)처럼 당시를 경험한 주요인사의 기억을 기록하는 구술채록으로 자료를 보완하는 것은 매우 유의미합니다. 사법제도의 입안, 조직 확대, 인력확충, 청사 신축 등 사법행정의 변화 내용과 공식문서에 남아 있지 않은 저간의 사정을 기록하는 것을 구술채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역대 대법원장, 대법관, 법원행정처장 등 주요인사의 명단을 작성하고 『법원사』와 『역사 속의 사법부』 등을 참고하여 인물별 주요 사안을 부기하여, 역대 대법원장, 대법관 그리고 법원행정처 주요보직 역임 인사를 중심으로 우선 채록대상자를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2015년부터 해당 인사의 동의를 받아 구술을 채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작한 지 몇 년 안되어 사법행정의 주요인사에 국한한 구술채록이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그래서 우선 구술대상자 선정의 방향을 다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10년간 스물세 분의 구술을 채록하는 현장에 배석하며 감동받은 순간이 많았습니다. 절로 존경하는 마음과 인간적인 감화가 드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고령의 구술자들이 작고하시면 ‘참으로 고약한 업무를 맡고 있다.’는 생각이 스치곤 했습니다. 2020년 이홍훈 전 대법관님도 그런 분 중 한 분입니다. 당시 이홍훈 대법관님은 암투병을 하고 계셨고 법무법인에서 후배 변호사들을 지도하며 법조인의 삶을 갈무리하고 계셨습니다. 그분 특유의 어법으로 다양한 경험과 철학을 진솔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3, 4차례에 걸쳐 10시간 이상의 구술을 채록하였습니다. 그즈음 저는 업무자로서 오랫동안 준비하고 노력하여 확보한 여건들이 한꺼번에 없어지는 경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2021년 예산안에서 구술채록 예산이 전액 삭감되어 사업진행이 불투명해졌고,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사법연수원 청사로 이동하면서 법원사 상설전시실로 예정되었던 공간이 없어졌고, 일산 법원도서관의 열람실인 법마루를 국민에게 개방하면서 부족한 인력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법원사 실무관의 분담사무를 변경할 수도 있을 거라는 소식을 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15년간 법원사를 담당하며 업무의 내용이나 추진 규모의 모양새를 꾸준히 다잡아왔는데 그것이 일거에 무너지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 대법관님의 구술채록 마지막 날 잠시 쉬는 시간에 저는, 대법관님께 명확한 내용도 없이 정말 홀린 듯 두서없이 말씀을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자문자답하듯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은 거지요?”라고 한 듯합니다. 그때 대법관님은 자초지종을 묻기보다 “그렇지, 아직 때가 안 된 거지.”라고, 선문답인 듯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어찌나 마음에 위로가 되던지 그 감정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홍훈 대법관님은 구술채록 다음 해에 갑작스럽게 건강이 악화되어 이내 작고하셨습니다. 2022년 서세 1주기에 맞춰 [대한민국 법원 구술총서 2. 법관의 길 이홍훈]을 발간하였습니다. 총서 발간을 준비하며 대법관님의 자택을 방문하였습니다. 사모님은 대법관님의 서재를 그대로 두고 계셨고 책상 위에는 대법관님이 생전 마지막에 읽고 계셨던 화엄경도 놓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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