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세대 리포트] 멀티 페르소나,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인가?

트렌드에 주목하라

2020.03.06

멀티페르소나

멀티 페르소나,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인가?

김난도 교수는 2020년의 주요 트렌드로 ‘멀티 페르소나’를 꼽았다.
페르소나는 애초에 고대 그리스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정신분석학자 융이 이 말을 ‘타인에게 비치는 외적인 성격’으로 규정하며 현대적인 의미가 됐다.
20세기 이후 사회가 점점 복잡해지고 미디어가 개인화되면서 페르소나는 새삼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글. 차우진(대중문화평론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정체성 표현
“케이트, 월요일 미팅 때 얘기한 자료는 오늘 완료될까요?”
“네, 에디. 오후 3시까지 메일로 공유할게요!”
어느 분주한 사무실에서는 이런 대화가 오간다. 외국계 회사인 줄 알았는데 서울에 있는 사무실, 또 누가 봐도 토종 한국인 직원들의 대화다. 디지털 콘텐츠를 기획, 제작하
는 한 스타트업의 모습이다. 이 회사에는 직급도 없을 뿐 더러 본명 대신 영어 이름을 사용한다. 직원들은 서로의 나이나 본명조차 모른다. 케이트의 본명은 김지수지만, 사
무실 문을 들어서는 순간 김지수는 사라지고 케이트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회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새로운 조직문화이자 라이프스타일이다.
‘멀티 페르소나’는 말 그대로 ‘가면을 바꿔 쓰듯 매 순간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며 서로 다른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다층적 자아’를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남자·여자 구분도, 나이나 학력과 경력, 직업, 연차 같은 것들 모두 의미가 없어진다. 그 자리에 맞는 역할만이 있을 뿐이다. 직장에 있을 때와 퇴근 후의 모습이 완전히 다르고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의 오픈채팅방 같은 SNS에서도 각각 달라진다. 한 명이 여러 정체성을 갖게 되면서 개인의 취향, 관심사 등을 기반으로 한 ‘덕질’이 중요한 문화가 됐다.
물론 예전에도 이런 ‘멀티’가 존재했다. 미니홈피와 온라인 게임이 대표적이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라면 당시에는 온라인에서만 이런 멀티 페르소나가 존재했다면, 이제는 현실 세계에도 멀티 페르소나가 적용된다. 출근 후 직장에서의 정체성과 퇴근 후 작은 모임에서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은 일반적이다. 이런 형태는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도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있다. 개그맨 유세윤은 UV라는 팀에서 뮤지션으로 변신한 적이 있다. 국민 MC 유재석도 ‘유산슬’이란 이름으로 방송사와 플랫폼을 횡단하며 활약 중이다. 유산슬로 MBC 연예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라면을 끓일 때는 ‘라섹’이라는 셰프로도 변신한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하프 연주에도 도전한다고 하니 앞으로 몇 개의 캐릭터가 더 탄생할지 기대가 된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일종의 ‘롤 플레잉’이라는 게임 형식이 실제 현실에 접목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에 대한 정체성 확립 필요
페르소나 개념이 중요해지는 것은 사회적 맥락이기도 하지만, 비즈니스 영역에서 더욱 중요해진다. 소비자 정체성이 다양화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소비 수단이 확대되면
서 기존의 남성·여성·직업·연령으로 나뉘는 데 한계가 생긴 것이다. 특히 SNS에서 이런 현상은 심화된다. 카카오톡, 유튜브,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플랫폼에 따라 각기 다른 정체성이 발현되고, 어떤 경우에는 동일한 플랫폼에서 여러 계정을 만들어 쓰기도 한다. 사업자들도 하나의개인정보에 여러 개의 계정을 만들 수 있게 지원한다. 그래
서 누군가는 덕질 계정 따로, 일반 계정 따로, 업무 계정이 다 다르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이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다양하게 분화된 소비자들에 맞춘 톤 앤 매너가 중요한 것이다. 서비스의 형태나 업종에 따라 사용하는 용어나 문맥이 달라지는 것, 결국 소비자의 취향과 그에 맞는 정체성을 바탕으로 친근함을 유도하는 세심한 커뮤니케이션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다.
한편 소비자들은 이 다층적인 정체성에서 진짜 자기 자신을 찾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갖기도 한다. 이 간극이 클수록개인의 혼란은 더욱 강화될 수도 있다. 소위 말하는 ‘현타(현실 자각 시간)’가 이런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에서 멋진 취향과 근사한 여행 사진으로 수천 명의 팔로워를 가진 내가 현실에서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강박증 환자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사회문화적으로 중요한 문제가 된다. 명상, 요가, 힐링 등의 키워드는 ‘보이는 나’와 ‘진짜 나’의 간극을 줄이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행동지침이 되기도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더욱 구체화돼야 하는 것이다.

* 차우진 작가는 대중문화평론가로, 1999년부터 대중음악에 대해 글을 썼고 <씨네21>, <한겨레21>, <GQ>, <나일론> 등 여러 매체를 통해 대중문화에 관한 비평의 글을 썼다. 『자전거, 도무지 헤어나올 수 없는 아홉 가지 매력』, 『아이돌』, 『한국의 인디레이블』, 『청춘의 사운드』 등의 단행본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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