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답하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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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답하는 숲

2018.06.04

삶에 답하는 숲

지식보다는 지혜를 추구하며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숲은 위대한 스승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이 시대의 우리와 달랐다. 그들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게서 생명의 근원, 삶의 본질을 탐구하며 배웠다. 필자는 지금 스스로 연 세상에서 글 쓰고, 농사 짓고, 강연하며 살고 있다. 자유하고 자연스러운 삶. <법원사람들>의 지면에 숲이 내게 전해준 가르침의 일부를 전하고자 한다.

회복, 다시 완성되어짐

숲에는 우주의 ‘원리’가 압축되어 있다. ‘원리(原理)’라는 단어 속의 ‘理’가 무엇일까? 그것은 크게는 우주가 탄생하고 변화하는 현상의 시원성에 연결돼 있는 단어다. 작게는 내가 사랑에 빠지고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걷고 뛰고 탐험하며 세계를 알아가고 그 역시 사랑하고 또 아이를 낳고 모두가 무언가를 이루어내다가 소멸하는 것과 같은 현상의 근본을 지배하는 신비를 설명하는 문자다. 한문을 차용해 ‘理’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不使然而然(불사연이연)’ ‘그러라 시킨 적 없는데 그렇게 되는 것.’ 생각해 보라. 살다가 어느 순간 당신에게 누가 이성에 관심을 가지라 했는가? 당신의 아이에게 누가 걸으라 했고 뛰라했는가? 인생도 그렇게 ‘理’의 지배 아래에 있다. 숲 역시 마찬가지다. 산사태가 난 산의 황무지를 가만 두면 어떻게 될까? 인간의 개입 없이도 그 공간은 시간이 흐르면서 반드시 다시 숲으로 복원돼 간다. 그것이 바로 ‘理’다. ‘理’는 지금도 ‘진리(眞理)’나 ‘섭리(攝理)’로, ‘물리(物理)’나 ‘수리(數理)’로, ‘합리(合理)’나 ‘법리(法理)’로 우리 곁에 살아있다.

내던져짐, 삶의 본질

나는 자아가 형성되던 청소년기부터 몹시 궁금한 것이 있었다. ‘나는 왜 가난한 나의 부모를 만났을까? 아픈 누이가 있는 집안의 형제 속에서 태어났을까?’ 마흔이 넘은 뒤 숲과 온전히 만나면서 알게 됐다. 절벽 위 척박하고 위험한 공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고 피어난 민들레 한 포기의 꽃송이가 내게 되묻는 것 같았다. ‘나는 왜 저 들판이 아닌 이 위태한 곳에 태어났겠는가?’ 삶의 근원적 본질 중의 하나를 그때 알았다. 마르틴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생명은 모두 내던져지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태어나는 것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는 내 과거의 원망을 말끔히 지울 수 있었다.

한편, 생명이 그렇게 내던져지는 데도 어떤 원리가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테면 버드나무는 어디에서 태어나는가? 버드나무의 씨앗은 반드시 물과 가까워야 발아가 된다. 냉이는? 숲의 한복판인가, 열린 들판인가? 개나리는 숲의 가장자리인가, 깊은 숲인가? 여기까지는 모두 알 것이다. 그렇다면 천년을 살고 천년을 죽는다는 주목(朱木)은? 햇살 가득한 공간인가, 양분이 가득한 우거진 숲의 공간인가? 산삼처럼 주목의 씨앗은 반드시 양분이 많은 곳에서만 발아한다.

고유함, 나로 살아가는 도(道)

모두가 고유의 속성과 화합되는 지점에서 삶이 시작된다는 이 깨달음은 이미 동아시아 고전의 하나인 ≪中庸(중용)≫ 첫 구절에 명확히 담겨있다. ‘天命之謂性率性之謂道(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거칠게 해석해 보자. ‘性은 하늘이 내린 命이다. 그 性을 따라서 살면 그것이 바로 道이다….’ 숲으로 차용하면 이렇다. 버드나무에게는 버드나무의 성(性)을, 냉이에게는 냉이의 性을, 개나리와 주목에게는 각각 그들의 고유한 성을 내렸다. 버드나무가 버드나무로 살면 그것이 버드나무의 도(道)요, 주목이 주목으로 살면 그것이 주목의 도라는 것이다. 숲에는 타자의 삶을 좇는 생명이 없다. 그들의 모두 자신으로 살아 도를 이루는 생명들이다.

나아가 숲의 원리를 인문과 결합하면 숲의 가르침이 더 깊어진다. 너는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고 있느냐며 회초리를 들기도 한다. ≪中庸≫ 속의 통찰에 따르면 우리에게도 인간에게만 주어진 고유한 성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인간성(人間性)이라고 칭한다. 인간에게만 품부된 고유한 性은 여럿 있다. 하지만 지면관계상 법(法)의 부문과 관련해서 하나만 꺼내보자면 ‘홀로 있는 순간에도 부끄러워할 줄 아는 유일한 생명’이 바로 인간이라는 점이다. 법의 조문보다 더 준엄한 기준이 바로 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인간의 속성일 것이다. 영악하게 법의 문장을 피하는 것은 가능할지 모르나 참된 인간이라면 수치를 아는 인간본성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봄날의 숲도 위대한 스승으로 피어오른다. 사람에게 입은 상처에 끙끙대는 이에게 이 봄날의 숲을 채우는 나뭇잎들은 속삭인다. 나의 이파리와 가지를 봐, 애벌레와 짐승들에게 숱하게 뜯기고 꺾인 상처를 내가 어떻게 다루는지! 나는 그 상처 끌어안아 마침내 꽃으로 피우잖니? 막 피어나고 있는 오동나무 꽃이 또 속삭인다. 네 삶에 찾아온 겨울이 춥다고? 내가 보낸 지난겨울을 너는 알기나 할까? 어떠한 나무와 풀과 새가 겨울이 없기를 바라더냐? 차라리 인간답게 성찰해 봐! 신은 왜 온 생명에게 상처와 삶의 겨울을 배치했을지.

나는 당신도 숲의 저 깊은 생명들과 깊게 조우하기를 기도한다. 그리하여 온전히 삶을 수용하며 향기로운 인간의 길을 걷게 되기를 희망한다.

글 김용규(여우숲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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