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STORY I 생각의 탄생
솔로몬의 판결에서 공감을 배우다
글 권수영 연세대학교 교수, 『공감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저자
나는 1990년대 중반 미국 하버드대학교 석사학위 과정에 입학했다. 덕분에 나는 책에서 접했던 저명한 여성 심리학자 캐롤 길리건(Carol Gilligan) 교수의 세미나를 직접 수강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스승인 도덕발달 이론가 로렌스 콜버그의 남성 중심 이론에 반기를 든 학자로 유명했다. 길리건 교수는 기존의 도덕발달 이론에서는 ‘정의(justice)’에 대한 이해가 높을수록 높은 차원의 도덕성으로 판단되는 점을 지적했다.
길리건 교수는 남자 아이만을 대상으로 연구했던 자신의 스승과는 달리 여자 아이를 대상으로 연구에 착수했다. 그녀는 남자 아이들이 여자 아이들보다 ‘정의’에 대한 이해도가 높기 때문에 도덕성 수치가 높게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중요한 연구 질문은 ‘도덕성 성숙이 정의 의식으로 판단(judge)하는 기능만을 의미하는 것인가’였다.
길리건은 오히려 여자 아이들에게 있어서 ‘정의’에 대한 판단의식보다 ‘돌봄’이 일차적인 관심이며, 사례에 대한 판단보다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감정’이 훨씬 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점을 지적했다. 길리건이 그녀의 스승인 콜버그가 다루지 않은 여자 아이들의 도덕성을 다룬 점에서 분명히 콜버그의 남성주의적 도덕발달 이론의 단면을 비판하고 보강한 점이 있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그저 그녀의 이론이 콜버그의 도덕발달 연구 과정에서 도외시된 대상을 첨가하고 도덕발달 이론의 양성
(兩性)적인 균형을 시도한 공헌만을 지적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가끔 기독교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지혜의 왕 솔로몬 왕의 판결을 떠올리곤 한다. 솔로몬 왕은 서로 자신의 아기라고 주장하는 두 명의 엄마를 법정에서 만났다. 그가 처음 내린 판결은 매우 정의롭다. 공평하게 두 아이를 나눠 가지라는 것이었다. 엄마라고 주장한 한 사람에게는 그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또 다른 엄마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황당한 판결이었다. 그의 첫 번째 판결은 전통적인 도덕성 측정과 무관하지 않은 판결처럼 보인다. ‘정의’에 입각한 판결 말이다. 하지만 솔로몬 왕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법정에서 그는 사건에 대한 정의로운 판결보다 ‘돌봄’과 ‘감정’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진짜 엄마는 분명히 아이의 죽음을 상상만 해도, 자신의 죽음과 다름없는 절망과 슬픔에 압도될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엄마라면 판결 즉시 자신이 가짜 엄마라고 거짓 자백하는 것이 자연스런 감정일 것이고, 지극히 당연한 자녀 돌봄의 자세일 것이다. 솔로몬이 진행한 판결의 핵심은 무엇보다 먼저 상대방의 감정과 돌봄을 선행한 판결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남성인 솔로몬 왕은 ‘왜 다분히 여성적이었을까’ 묻는 것은 진정 어리석은 질문일 수밖에 없다.
내가 길리건 교수의 세미나를 수강할 당시 이미 그녀는 스승 콜버그에 대한 여성주의적 비판에서 시작한 그녀의 심리학을 단순히 성별의 차이를 강조하는 여성주의 심리학이라고 불리기를 원치 않았다. 성별을 넘어선 인간의 도덕성을 보다 전체적인 구도에서 보고자 했다. 즉, 성적인 차이에 의해 도덕발달과 윤리가 양성적으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차이를 초월한 도덕성과 윤리의 새로운 모습, 보다 통합적인 차원을 자리매김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의 왕 솔로몬 왕은 길리건의 주장처럼 보다 통합적인 도덕적 발달을 드러낸 명판결을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지 모른다. 실제로 후대 학자들에 의해 콜버그의 도덕 발달 심리학은 세상을 온통 딜레마와 판결이 난무하는 법정처럼 이해함으로써 개인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의무 중심의 ‘법정 윤리(juridical ethics)’를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반면 길리건의 심리학은 판단하고 심판하는 것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상황을 공감하고 돌보아주는 보다 관계지향적인 ‘배려 윤리(ethics of care)’를 가능하게 한다고 평가받고 있다. 배려 윤리의 등장은 법조인들에게도 분명 시사점이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근교의 에반스톤시에서는 1973년부터 ‘에반스톤 커뮤니티 디펜더스 오피스’라는 민간 법률구조 공단을 만들어 저소득층 청소년을 대상으로 형사법률구조 사업을 시작했다. 2010년 ‘모란센터(Moran Center for Youth Advocacy)’로 명칭을 변경한 이 비영리 단체는 새로운 관점을 도입하여 청소년 범죄를 대처하고자 했다. 부유한 도시인 에반스톤에서 청소년 범죄자의 상당수는 주로 흑인 청소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적절한 변호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판단에 의해 시의회가 조례를 만들었고, 그에 따라 단체가 생겼는데, 특이한 점은 처음부터 변호사뿐 아니라 사회 복지사가 상근을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나라 정책 당국이든지 이와 비슷한 협업을 설계할 수 있다. 즉 범죄 사후처리보다 예방과 교화 프로그램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시의 청소년 범죄율을 줄이고 사회적 비용을 절감하겠다는 합리적인 시도였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이곳에서 함께 일하는 변호사들과 사회복지사들 공히 아이들의 일탈과 문제에만 초점이 있지 않았다는 점을 눈여겨보고 싶었다.
가장 필요한 건 공감과 회복의 시간
모란센터에서 일한 적이 있었던 한 국제변호사의 말을 전해들은 적이 있다. 저소득 청소년 형사 사건만을 특화해 담당하던 모란센터는 일단 사건을 수임하면 제일 먼저 복지사가 청소년 의뢰인을 상담하기 시작한다.
면담을 통하여 의뢰인 청소년의 심리상태를 점검하고, 심리상태와 범죄 유발의 상관관계를 분석한다.
예를 들어, 마약이나 약물 중독은 없는지를 살펴보고 가정환경이나 지적 능력에 대해서도 꼼꼼하게 점검한다고 했다. 만일 부모가 자녀에게 평소 관심을 기울이는 가정의 청소년이라면 일차적으로 부모의 진단에 의존하겠지만, 청소년 범죄에 연루된 청소년들은 부모의 돌봄이 거의 전무한 가정인 경우가 많아서 부모의 의견을 구하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초기 단계에 이루어지는 복지사의 면담은 이후 변호를 맡게 되는 변호사의 법적 판단에 많은 영향을 주게 되더라는 것이다.하지만 나는 모란센터가 청소년 범죄를 궁극적으로 낮추기 위해서는 법적 판단에 도움을 주는 복지 면담을 한층 더 넘어서야 하리라고 본다. 부모의 돌봄 사각지대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따뜻한 돌봄과 자신의 혼란과 불안, 그리고 무력감을 감정적으로 이해해 주는 어른들이다. 나 역시 미국에서 가족상담사로 훈련받은 적이 있다. 나는 청소년 마약사범들을 상담하는 일이 잦았는데, 이들의 회복에 가장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가족의 지원과 돌봄의 여부였다.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부모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일탈을 일삼는 경우도 많았다. 부모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청소년들도 있었다. 이들에게는 상담사가 그들 내면 깊숙이 가지고 있는 버려짐의 감정까지 이해해 줄 때 뜨거운 공감과 회복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몇 해 전 국내 소년 법정에서 일하는 판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TV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위법을 행한 청소년들을 그저 문제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회복과 치유가 필요한 대상으로 여기는 판사들 이야기였다. 판사들은 판결을 내린 청소년들의 보호시설까지 직접 찾아갔다. 함께 밥도 먹고, 안부도 물었다. 징계하고 판결하는 심판관처럼 보이던 판사들이 이들의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 자신을 믿어주고 자신 안에 숨겨진 불안이나 무력감을 공감까지 할 수 있다면 이들은 부모에게서도 받지 못했던 뜨거운 변화의 동력을 제공받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
왜 공감은 딴 세상 이야기로만 느껴지는 것일까
나는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면서 소년법정의 판사들에게 공감의 대화나 소통법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가끔 나는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은 공감을 하는 일과 정반대라고 여기는 리더를 만나곤 한다. 기업의 리더들은 부하직원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일을 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공감하는 일은 도저히 불가하다고 여기기 십상이다. 부모가 자녀를 공감하기 힘든 것도 매한가지다. 중간고사 시험을 망친 자녀들이 눈물을 보이면, 따끔하게 야단치기 바쁘다. 지금부터 기말고사를 준비하라고 신속한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무엇보다 눈물을 보이는 자녀를 꼭 안아주고, 속상한 마음에 공감하는 것이 먼저인데도 말이다.
그 이후에 문제해결의 진단을 제시해도 충분한데,
왜 우리는 공감은 딴 세상 이야기로만 여기고 사는 것일까? 지난해 나는 초등학교 학교 폭력이 중고등학교 학교 폭력을 넘어섰다는 언론 보도를 접했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한 출판사 편집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폭력을 막아야 할 텐데, 법을 만들거나 학교 폭력 지침을 만드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친구들과 공감하면서 생활하는 법을 가르치고 싶다는 출판 의도를 피력했다. 내가 돈을 주고서라도 출간하고 싶은 반가운 주제였다.
공감의 능력은 타고난 지능이 아니다
공감의 능력은 타고나는 지능이 아니다. 연습하면 분명히 나날이 잘 할 수 있는 덕성이다. 공감하는 일보다 판단하고 생각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여길수록 공감은 무시된다. 가족끼리도 공감을 연습하지 않으니, 공감의 기술은 몸에 배기는커녕, 점점 더 먼 나라 딴 얘기가 되고 만다. 어쩌면 전 국민이 매일 매일 연습해야 할 기술이 바로 공감의 기술이 아닐까 싶다.
나는 지난 20년 동안 꾸준히 여러 기관에서 감정과 공감에 대한 강연을 하고 있다. 그리고 평가를 잘하는 기술보다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일이 정말 이 시대 리더가 필요한 덕목이라고 목청껏 강조하곤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평가하고 성과를 내는 일이라 상대방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까지는 힘들다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상대방이 억지로 끌려오는 걸 모른다. 그래서 상대방이 자발적인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는 것도 전혀 눈치 못 채는 것 같다. 공감만 하라는 것이 전혀 아니다. 객관적인 평가나 진단, 그리고 판결을 내릴 시점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상대방의 감정을 먼저 이해하는 일을 선행하자는 말이다. 그래야 상대방도 마음을 움직이고, 스스로 자신의 변화를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솔로몬 왕처럼 가장 공정하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상대방의 감정부터 헤아리고 돌봄의 마음을 갖는다면, 우리 사회는 공정만을 강조하는 리더뿐 아니라, 보다 지혜로운 공감의 리더들로 넘쳐나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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