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하는 삶을 위한 지침,
성찰이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 성찰은 일정 기간의 마지막에 하는 의식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죽기 전에 쓰는 자서전을 성찰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성찰은 더 나은 경지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므로 젊을 때, 그리고 자주 하는 것이 좋다.
점진적이고 끊임없는 성찰이 더 나은 자신을 만든다.
글. 안정효 작가
새로운 출발을 위한 준비운동
이탈리아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시공간이나 뉴턴의 우주시계 이론에서처럼 “흐르는 시간의 개념은 환각”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세월이 흘러간다는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엄청나게 큰 착각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느냐, 제자리걸음을 하느냐의 진위는 이 자리에서야 차치할 명제라 하더라도, 인간이 시간의 시작과 끝을 정하고 달력을 만든 이유는 매듭을 만들어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 놓으려는 욕구의 소산이 아니었나 싶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철이 아니라 왜 하필이면 한겨울 중간쯤에서 새해가 시작된다고 온 세상이 합의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땅과 하늘이 꽁꽁 얼어붙는 연말이 되면 지난 1년 동안의 삶을 정리한다며 여기저기서 모여 송년회 술을 마시고 온갖 집단이 ‘내년에는 좀 더 잘해봅시다’라며 새로운 각오를 다진다.
지나가버린 일정 기간의 공과를 점검하고 평가하는 마지막 단계인 성찰은 새로운 출발로 이어지는 준비운동이어서, 잘한 일은 계속하고 잘못은 후회하며 개선하기로 작심하는 계기다. 우리나라가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던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가정과 직장에서 해마다 되풀이되던 연말의 성찰은 신년 계획으로 이어지고는 했다.
민족의 해방에 이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이루어진 무렵부터 사람들은 ‘금연’, ‘금주’, ‘결혼’, ‘내 집 마련’, ‘승진’, ‘자격증 따기’ 같은 구호를 수험생이나 고시생의 ‘하면 된다’ 쪽지처럼 어디엔가 적어두고는 했지만, 워낙 만성이 되어버린 새해 결심은 변절의 전형이어서, 자신에게 하는 그런 식상한 약속은 실천하지 않아도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특히 가장 흔한 목록이었던 ‘금연’의 경우에는 작심삼일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덤과 에누리를 자랑으로 삼아온 우리 사회의 혼미한 ‘공약’은 흔히 그런 식이었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성찰하라
인생을 정리하는 성찰의 방식과 공식은 송년회나 신년 계획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삶을 정리하여 기록하는 책을 자서전이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크게 착각하는 사실은 유언장처럼 죽음의 문턱에서 남기는 마지막 증언이 자서전이라고 여긴다는 점이다. 쓰는 사람들조차 같은 생각이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탈고하여 아내가 사후에 「희랍인에게 이 말을」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서전이 바로 그런 문학적 유언의 표본이었다.
유언장 유형의 자서전 개념은, 마치 사람이 죽은 다음 최후의 심판을 받아 천국과 지옥으로 송출되듯, 성찰이 평생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루어지는 1회용 마무리 행사라는 인식에서 비롯한다. 그런데 사후에 이루어지는 성찰은 부질없다. 최후의 심판은 현세의 삶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젊었을 때 궤도를 수정하겠다는 성찰과 계획은, 새해맞이 결심처럼 아무리 대부분 안 지키는 무책임한 작심삼일 예식에 지나지 않을지언정, 그나마 훗날을 위한 미래지향적 약속이다. 성찰은 토를 다는 감상문이 아니라 미리미리 해야 하는 지침의 숙제다. 성찰은 보다 나은 경지로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요, 전주곡에 해당되는 과정인데, 판박이 후렴 노릇을 해서는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렵다. 점진적이고 끊임없는 성찰은 발전의 밑거름이다.
성장하는 모든 단계에서 인간은 시간과 상황에 맞춰 적응하는 변화를 거치고, 그런 변화의 격발 장치가 성찰이다. 현대 세상은 혁명으로 한꺼번에 발칵 뒤집어 과거는 모조리 때려 부수고 몽땅 새로 시작하여 재창조하기가 불가능하여, 단계적으로 조금씩 개혁을 거치며 진화가 이루어진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삶이 어딘가 한두 군데 망가졌다고 해서 냉큼 죽어버리고 다시 태어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권리는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는다.
후회하고 퇴장하는 최후의 심판식 성찰이 아니라 훨씬 큰 미래를 향해 도약하는 성찰은 그래서 일찍, 자주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러시아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33살에 발표한 「어느 시인의 죽음」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상적인 회고록이다. 파스테르나크가 그의 유일한 자서전을 카잔차키스처럼 만일 75살에 이르러 썼다면, 지혜는 깊어졌을지 모르겠지만 역동하는 감성의 공감은 보나마나 사라졌을 듯싶다. 그런 의미에서 일기는 가장 훌륭한 자서전으로 꼽아야 한다. 일기는 날마다 한 토막씩 인생을 정리하는 영혼의 가계부인 까닭이다.
우리 사회의 성찰, 판결
사법관이 집필하는 법정 판결문은 유언장, 자서전과 성격이 비슷하다. 성찰은 저마다의 인생과 그들이 구성한 국가와 인간 사회에서 진리의 판결을 찾아가는 도정(道程)이다. 삼권분립의 구도에 입각해서 보면 사법은 우리 사회의 집단적인 삶을 지배하는 역학에서 성찰 기능을 하는 마지막 단계다. 입법과 행정은 통치의 신년 계획을 세우고 실험하는 과정이며, 사법은 그 실험이 올바르게 구현되는지를 결산하는 성찰의 마지막 보루이기 때문이다.
계획은 알지 못하는 미경험적 도전이어서, 입법 과정의 결함이 어쩌면 당연한 필요악이겠고, 행정의 실천은 성공과 실패의 양쪽 잠재성을 모두 인정해야 옳겠지만, 중심을 잡는 잣대인 사법의 결산은 실수나 사후 수정이 용납되지 않는다. 개별적인 사항을 다룬 판례는 두고두고 수십 수백 년에 걸쳐 후대 법조인들이 모범적인 표준으로 삼아야 하는 기준을 제시하는 최후의 심판인 까닭에, 세월과 세대와 풍조와 조류를 초월하는 영원한 진리를 겨냥해야 이상적이다.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그렇다.
잘못된 판결은 영원한 비리의 표본으로 남는다. 조르다노 브루노와 갈릴레오 갈릴레이에게 내린 종교의 판결문은 수백 년 동안 학문과 사회와 문화 각 분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표본으로 끊임없이 인용해왔다. 우주의 중심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 천체물리학의 이성적 논리와 영혼의 안식처를 마련하려는 종교의 감성이 충돌하는 괴리가 생겨난 까닭은 모순의 두 진영이 휘두르는 깃발을 중재할 만큼 강력한 성찰의 장치가 없어서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전쟁 직후 춤바람 시대에 70여 명의 여성을 농락한 박인수 재판이 갈등하는 성찰의 대표적인 사례로 남았다.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Male Chauvinism)와 유교적 윤리관의 시각에서 1심 법정은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지금의 상식으로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겨지는 성찰이었지만, 당시에는 명판결이라고 장안이 떠들썩했다.
하지만 시대적으로 이 무렵 서양에서는 여성해방운동이 맹렬히 전개되던 와중이었다. 그리고 박인수에 대한 판결은 나중에 자연스럽게 뒤집혔다.
사법 성찰은 이렇듯 논리의 유연성을 잃지 않으면서 원리·원칙을 지켜나가야 하는 갈등을 수반한다. 성찰하는 판결은 완벽을 찾아가는 끝없는 여정이어서, 영겁까지는 못 갈지언정 수백 년은 지탱해야 할 진리를 담아야 한다. 그 막중한 사명이 시험을 당하는 요즈음이다.
사법은 갈등을 중재하는 기능이다. 아무리 세상만사가 마음이 하는 일이라지만, 사법적 성찰만큼은 마음이 아니라 냉철한 이성의 차원으로 승화하여, 국민은 법을 지키고 법은 국민을 지키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눈부신 비상을 이룩하려는 노력이 법조인들의 사명이라고 여겨진다. 연말연시에 즈음하여, 모진 성찰의 계기를 도약의 기회로 삼아 사법 기능이 더욱 건강하고 튼튼해지기를 한 마리의 소시민으로서 소망해본다.
안정효 작가
소설가이자 번역가로, 서강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장편소설 「하얀 전쟁」으로 문단에 등단해 「은마는 오지 않는다」, 「착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의 작품을 썼다.「백 년 동안의 고독」을 시작으로 130여 권의 작품을 번역하기도 했으며, 제1회 한국번역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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