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11월이 되니 벌써 송년회 스케줄이 잡히고 있습니다. 송년회 스케줄을 생각하면 즐거워야
할 텐데요. 작년에 기분 좋게 송년 모임을 마친 후 엉뚱하게 가슴이 텅 빈 것 같은 공허함이 찾아와 당황했던 기억이 올해 송년회를 대하는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송년 후에 찾아오는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A.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실제로 연말에 느끼는 고독함이 너무 커 우울 증상까지 나타나서 찾아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흥겨운 송년 파티 후에 찾아오는 외로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는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느낌과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외로움은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것인데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을 때 느끼니 말이죠.
사랑을 해도 외롭고 공허하다는 고민 사연을 자주 접합니다. 왜 사랑을 해도 외로울까요? 외로움이 결핍의 감정이라면, 연애를 하는데도 찾아오는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선 남자친구 또는 여자친구를 교체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도의 차이일 뿐, 사람을 바꿔도 외로움은 계속 찾아올 수 있습니다. 외로움은 단순한 결핍의 감정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갖는 기본적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기분 전환은 좋지 않아요
우리는 외로움이나 우울 같은 감정 반응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느낌들이 찾아올 때면 기분을 날려버리기 위해 기분 전환이라는 심리 기법을 사용하게 됩니다. 기분 전환이란 말은 가볍게 보이지만 사실은 마음에 대한 강력한 조정 기법입니다. 뇌의 에너지를 상당히 태우면서 억지로 감정 변화를 시도하는 마음 관리법입니다.
간간이 기분 전환을 하는 것은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분 전환 기법을 지나치게 쓰다 보면 오히려 뇌의 에너지가 방전돼 번아웃 신드롬이라 불리는 소진증후군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에너지가 소진돼 뇌가 지쳤을 때의 문제는 행복에 대한 역치가 올라가 버리는 것입니다. 과거에 즐거웠던 일들이 재미가 없어집니다. 즐거웠던 친구와의 만남도 시들해지고, 일도 재미 없고, 전반적으로 이전보다 사는 게 재미없어집니다. 심해지면 세상사가 회색처럼 무미건조해집니다. 기분 전환이란 기법을 많이 쓰는 달이 있으니 바로 지금, 송년회 시즌입니다. ‘위하여’ 하고 건배를 들며 기분을 고취하지만, 그때마다 에너지가 빠져나가게 돼 반작용으로 허탈감이 밀려옵니다. 그렇게 생긴 소진증후군이 우울증까지 진행될 수도 있죠.
왜 우리가 기분 전환을 자주 사용하게 됐을까요? 외로움이나 우울 같은 감정 신호를 결핍에 의한 부정적인 감정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외로우면 내 인생은 불행한 것이라고 뇌에서 해석해버리니 에너지를 태워서라도 억지로 긍정적인 감정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로움이나 우울도 재미나 기쁨만큼이나 소중한 인생의 감정들입니다. 오히려 긍정적인 감정보다 인생을 잘 표현하는 깊은 감정들이죠. 사실 인생의 본질은 썩 기쁘지만은 않습니다. 외롭고 우울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완벽히 나를 이해해주는 이는 없고, 또 우리는 늙고 언젠가는 세상과 이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엔 역설적인 충전 장치가 있어서, 외롭고 우울할 때 억지로 기분 전환을 하지 않고 그 기분을 즐기면 억지 전환에선 느낄 수 없는 깊은 긍정성이 마음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고 합니다.
역설적 마음 충전법, 물끄러미 내 마음 바라보기
재즈를 좋아하지 않아도 들어보면 익숙하게 느껴지는 노래 중 하나인 My funny valentine. 노래 제목만 들으면 경쾌한 리듬과 톤이 예상되지만 실제 곡은 느리고 슬프고 우울합니다. 가사 내용도 슬픈데,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더 밸런타인데이로 있어줘요, 조금 더, 매일매일이 밸런타인데이랍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왜 이런 우울한 사랑 노래가 오랫동안 사랑받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억지로 기분을 좋게 만드는 기분 전환보다 사랑 때문에 우울할 때 오히려 우울한 사랑 노래를 들으면 역설적인 긍정성이 생기는 것도 한 가지라 생각됩니다. 이런 현상을 common humanity로 설명하는데 쉽게 풀면 ‘인생 다 똑같아’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사랑은 왜 우울하지, 나만 실패한 건가’ 하는 느낌에 빠졌을 때 우울한 사랑 노래를 듣다 보면 ‘아, 나만 사랑이 힘든 것은 아니구나. 사랑이란 것이 워낙 힘든 건가 보다’ 하고 내 삶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볼 여유가 생기는 것이죠. 이 여유가 힘든 상황에서도 다시 웃을 수 있는 긍정성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사랑이 부족해서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랑은 원래 힘든 것이라는 철학적 성숙이 마음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랑은 그 맛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강력한 긍정성마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문화 콘텐츠에 대한 몰입이 중요합니다. 이런 철학적 성숙이 주는 느낌은 논리적으로 나를 설득한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영화, 미술 작품, 소설 같은 문화 콘텐츠로 내 감성이 젖어들게 할 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문화 콘텐츠의 캐릭터에 내 감정이 투사돼 그 캐릭터에 담긴 내가 나를 바라봐주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쁜 연말이지만 짬을 내어 문화 콘텐츠를 통한 ‘내 마음 바라보기’ 하는 걸 권해드립니다.
글_윤대현 교수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의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저서로는 <윤대현의 마음성공>, <마음 아프지 마> 등이 있으며, 라디오 <윤대현의 마음연구소>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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