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그 안에서 농익은 가치를 찾다

人사이드인터뷰

막걸리, 그 안에서 농익은 가치를 찾다_술평론가 허시명

2018.07.04

허시명

남산 한쪽 기슭에는 조금 특별한 학교가 있다. 교실에서는 시큼한 막걸리 향이 풍기고 수업은 사뭇 진지하다가도 왁자지껄 화기애애하다. 이 즐겁고도 이색적인 수업이 진행되는 곳은 ‘막걸리학교’. 시큼한발효 향 탓인지, 술술 풀어내는 교장선생님의 입담덕인지 수강생들은 우리 술 얘기가 가득 담긴 이야기독에 흠뻑 빠져있다.

술기행 떠났다 술평론가 된 여행작가

재미난 술 강의로 학생들을 흠뻑 취하게 만든 막걸리학교 교장선생님은 바로 술평론가 허시명이다. 우리 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인문학적 배경을 바탕으로 우리 술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에피소드를 담은 다양한 책을 펴낸 저자이다.

10년 전 막걸리학교를 세우고 스스로 교장선생님이 된 그는 잡지사 기자였다. 서울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샘이 깊은 물>에 입사했다. 당시 <샘이 깊은 물>은 전통문화를 현대적이고도 세련된 시선으로 바라보며 그 가치를 발견하는 데 큰 몫을 담당했던 잡지로, 그곳에서 그는 약 5년간 기자 생활을 했다. 그리고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 기자로 여러 언론사에 다양한 주제로 원고를 썼다. 그러다 한 주간지의 ‘조선문인기행’이라는 코너에서 ‘술’을 아이템으로 한 연재를 맡게 되어 전국으로 술기행을 떠나게 됐다.

‘술을 잘 마시는 것도 아니고 맥주 한 잔에 곯아떨어지는 집안 내력도 있고 그저 대학시절 국문과 동기들과 세월을 즐기며 마시던 술이 전부인데 전국 술기행이라니…’ 덜컥 맡게 된 연재에 걱정도 있었지만 술기행 중 한산 소곡주와 금산 인삼주, 진도 홍주 등 전국의 명주들을 두루 만나며 우리 술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풍경이 있는 우리 술 기행>, <비주, 숨겨진 우리 술을 찾아서>, <허시명의 주당천리>, <막걸리, 넌 누구냐?>, <술의 여행> 등 우리 술과 관련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다. 책에 대한 반응도 좋았다. 우리 술의 가치를 발견해 알리고 여러 권의 책을 내니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술평론가’라는 직함을 달게 됐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흘러 20년이 지난 지금은 술평론가라고 하면 ‘허시명’이라는 이름을 떠올릴 만큼 술도 사람도 깊게 농익었다.

막걸리학교, 우리 술의 가치와 철학을 발견하는 곳

전국으로 술기행을 다니며 10년쯤 지났을 때 그는 술에 대한 의문을 한 가지 품게 됐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술을 마시고, 술을 좋아하고 즐기는데 왜 술을 마시면서도 술 그 자체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을까?’ 서양 술인 와인은 어느 정도 좋아하게 되면 깊이 있게 공부도 하고 어떤 지역, 어떤 품종의 포도인지 부터 와이너리의 역사와 그에 담긴 이야기들을 궁금해 하면서도 우리 술은 유독 그런 스토리에 주목 받지 못한 채 음식점 주인이 내주는 대로 고민 없이 마시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면서도 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사고 친 얘기는 해도 술을 빚은 사람 얘기는 하지 않아요. 그래서 막걸리학교를 만들게 되었죠.”

2009년 삼청동에 ‘막걸리학교’라는 이름으로 일명 술스쿨(Sool School)을 세우고, 지난해 가을 남산으로 옮겨와 교육장, 실습장, 발효실, 보관실을 한 곳에 모았다. 학교를 연지 올해로 10년, 벌써 38기의 교육생을 받고 있다. 막걸리학교에서는 술에 대한 인문학 과정인 초급부터 술 빚기 과정을 배우는 중급, 하우스막걸리 창업 과정인 상급까지 있다. 학생들을 데리고 전국 양조장으로 술기행도 떠난다. 전통막걸리는 물론 막걸리와 같은 배에서 났다고 할 수 있는 청주, 유럽의 막걸리라 할 수 있는 맥주 등도 배운다.

막걸리의 대중적이고도 편안한 이미지는 다양한 사람들을 막걸리학교로 모은다. 내로라하는 사회 인사부터 조직의 리더, 멀리 외국에서도 찾아온다. 별도로 특강을 신청하는 기업도 있다. 막걸리학교를 찾는 사람들의 연령도, 목적도 가지각색이지만 모두가 금시에 사이를 허물고 친구가 된다. 이것이 막걸리의 힘이다.

“학생 중에는 은퇴 후 사람들과의 즐거운 소통을 기대하며 막걸리학교에 오신 변호사님도 계세요. 부인이 화가세요.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이 도자기도 ‘빚다’라고 표현하고, 술도 ‘빚다’라고 표현하는데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냐고 물으시더라고요. 그때 깨달은 게 하나 있죠.”

도자기는 사람이 흙으로 그 모양을 잡으면 가마 속 뜨거운 불이 그 형태를 고정시켜 도자기로 만들어낸다. 즉, 온도의 힘을 빌려야만 비로소 도자기가 만들어진다. 술 또한 그러하다. 술을 만들기 위해 여러 과정을 거치지만 결국 미생물의 작용을 빌려야만 술이 된다. 결국, 누군가에게 ‘빚’을 져야만 만들어지기에 ‘빚다’라는 표현으로 묶인 것이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불가분의 관계 속 ‘술과 법’

술로 인해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것은 지나간 역사뿐만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비추어볼 때 다분히 확인할 수 있는 진리다. 술은 가까운 듯 멀고 친근한 듯 위험하다. 얼마 전부터는 대학축제에서 술을 판매하지 못하게 됐다. 이게 다 술이 가진 위험성 때문일까. 허시명 술평론가는 이것을 술 자제가 가진 해악성이라기 보다 술을 마시는 자가 술을 얼마나 유연하게 다스릴 줄 아느냐의 문제로 본다. 그래서 술을 술답게 마실 수 있는 문화가 조성되고 정착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1920년부터 1932년까지 미국에는 금주령이 내려졌었죠. 그러나 갱단이 밀주(密酒)를 제조하고 밀수, 불법거래 등 범죄가 활개를 치며 알 카포네라는 전설적인 마피아까지 등장하게 됐습니다. 이슬람국가처럼 금주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사회가 아니라면 강제적 규제는 또 다른 폐단을 낳을 수 있죠.”

우리나라에서 술은 전통적으로 가정에서 빚었던 음식의 범주에 속했다. 집집마다 된장 맛이 다르듯 술맛이 달랐다. 그러나 1907년 7월 조선총독부에 의해 주세령(酒稅令)이 공포되고 1909년 주세법이 제정됐다. 농촌의 가양주(가정집에서 제조하는 술)를 밀주로 규정해 단속하면서 가양주가 사라져갔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술과 문화도 법에 의하여 상당한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가양주 단속으로 전국에서 주막 문화가 사라졌다가 2016년에는 「소규모주류제조에 관한 법률」이 통과되면서 일명 하우스막걸리 제조면허가 생기고 작은 음식점들은 자기 가게만의 술을 만들어 팔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다시금 현대판 주막의 부활이 예상되고 있죠.”

전통주를 온라인으로 판매할 수 있게 된 것도 우리 술 산업에 큰 변화로 작용하고 있다. 2년 전만 해도 전통주는 우체국이나 조달청 나라장터와 같은 온라인 시장을 통해서만 판매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국세청의 ‘주류 통신판매에 관한 명령위임 고시’가 개정돼 전자상거래 사업자라면 온라인으로 전통주를 판매할 수 있게 됐다.

“술은 술 하나로 완성된 음식이에요. 어디 가서 내가 빚은 술이라고 하면서 내놓으면 호응이 남다를 겁니다.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 알콜 도수에 초점이 맞춰진 술보다는 맛과 향으로 술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술에 대해 알게 되고, 할 이야기가 많아지면서 술 자체를 즐기게 되죠.”

공급자 중심이 아닌 내가 마시고 싶은 술을 찾아 마시는 주도(主導)적인 주도(酒道)법, 소비자의 ‘주권(主權)’이자 ‘주권(酒權)’을 찾자고 말하는 허시명 술평론가, 그는 국민의 주도(酒道)와 주권(酒權)을 위해 오늘도 술 익는 학교, ‘막걸리학교’에서 열강 중이다.

취재 한경희 | 사진 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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