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1일, 대법원은 ‘재심 전문 변호사’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박준영 변호사를 청사로 초대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들에게 무죄 판결을 받는 데 많은 도움을 준 박준영 변호사는 그간 법조계에 대한 뼈아픈 비판도 서슴지 않은 인물. 대법원은 박준영 변호사에게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사법부에 대한 합리적 비판을 경청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한 구제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하려는 목적에서 이 자리를 마련했다. 서릿발 같은 비판을 ‘씨실’로, 법조인으로서 서로를 이해하는 동지애를 ‘날실’로 시종일관 진지하고 유쾌하게 진행된 이 자리는 예상한 시간을 훨씬 넘어서 끝났다.
<참석자>
박준영 변호사
이재신 판사 및 영블로거
Q. 박준영 변호사님께 오늘 이 자리는 조금 남다를 듯합니다. 초대를 받은 박준영 변호사님, 그리고 초대를 하신 입장의 이재신 판사님께 먼저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박준영 변호사(이하 박) : 법원의 초대를 받았다는 것은 저에게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은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판사와 변호사의 접촉이 굉장히 어려워졌거든요. 그럼에도 저를 이렇게 불러주셔서 굉장히 영광이지만 한편으로는 앞으로 공익 사건만 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돼버린 게 아닌가 싶습니다(웃음).
이재신 판사(이하 이) : 박 변호사님을 칭하는 여러 표현이 있는데 저는 ‘바보 변호사’라는 호칭이 제일 멋진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길을 잘 찾지만, 지금 시대에는 오히려 박준영 변호사님이 해주시는 역할이 더 중요한 게 아닌가 싶어요. 판사라는 직을 수행하면서 가장 힘든 건 법정에 오기 전까지 어떤 말들과 일들이 있었는지를 다 알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법정에서의 말과 제출되는 서면이 전부이기 때문에 이렇게 변호사님과 직접 얘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법원 입장에서도 꼭 필요한 일이고 반드시 귀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Q. 현행 재심제도에 대해 변호사님이 느끼시는 아쉬운 점은 무엇입니까? 판사님의 의견도 듣고 싶습니다.
박 : 저는 실제 재심재판이 얼마나 이루어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현재 복역 중인 사람이 재심을 통해 억울함을 풀었다는 뉴스는 거의 본 적이 없는 것을 볼 때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과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도움 아래 이루어지는 재심 외에 일반 재심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법원이 재심제도를 지나치게 경직되게 운영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무조건 모든 판결을 끝까지 다툴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분쟁이 늘어나는 상황에서 사법자원도 합리적으로 배분할 필요가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법원의 현실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억울한 일은 밝히는 것이 법원의 중요한 역할이기에 대화를 통해서 차츰 개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 : 판사로 있지만 재심사건은 자주 접하지 못합니다. 재심절차는 확정판결에 대한 예외적인 구제절차이기 때문에 그 길이 상대적으로 좁게 되어 있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법조 직역 전체적으로도 재심제도를 개선해나가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법원도 계속해서 연구해나가고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박 : <법원사람들>을 읽는 많은 분께서 고민해주셨으면 하는 차원에서 몇 말씀을 더 드리겠습니다. 먼저 재심절차가 전혀 문제가 없는 건 아닙니다. 재심 개시 이후에 어디를 처음으로 봐야 하는가, 기존의 증거조사 결과나 신청된 증거의 효력은 어디까지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또 현행 국선변호인제도에 대해서도 저는 약간 비판적이에요. 재심은 한 번 기각되면 동일한 사유로 다시는 청구를 못 하기에, 제대로 된 도움이 아니라 적당한 도움이 이루어졌을 때는 그 도움 때문에 기각된 이후에 다시 청구를 못 하는 불이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증거수집에서도 한계에 봉착합니다. 공권력에 대한 조사 권한이 없는 상태에서 재심사유의 증거수집은 국선변호인의 조력만으로는 분명히 한계에 직면하거든요. 한편으로 익산이나 삼례 사건을 볼 때 수사경찰, 검사들이 이전 사건들은 과연 제대로 다루었겠느냐는 의문도 듭니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은 시간이 지나며 계속 발전해왔습니다. 위법수집증거의 증거능력 부정, 사법경찰관 작성조서의 증거능력도 계속 인권적으로 개선돼왔어요. 이 개선된 법리를 놓고 예전 사례를 판단했을 때 무죄가 나올 만한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재심사유로 포섭할 것이냐 하는 문제도 있습니다. 재심사유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충분히 고려돼야 합니다.
Q. 논스톱 국선변호인제도(본지 16~17 참조)가 신설됐습니다. 법원의 사회적 약자 구제 노력의 일환으로 시행된 이 제도는 무엇인지, 두 분은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이 : 국선변호인제도는 제대로 된 조력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영장실질심사 때 관여한 국선변호인은 영장이 발부되었는지 기각되었는지 관심이 없었어요. 또 영장 발부가 된 사람은 자신에게 국선변호인이 여전히 있다는 생각을 못 했습니다. 논스톱 국선변호인제도는 법원이 ‘피의자가 기소되면 새로운 재판을 받기 전에 새로운 국선변호인이 선임돼 다시 이야기하게 되는 구조’에 주목해 만든 제도입니다. 구속피의자들은 법률적 조언을 구할 상대도 없고 가족과의 연락이 쉽지도 않을 것이며 그러다 보면 과다한 비용 지출, 이 사건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유혹이나 강요에 쉽게 굴할 수 있거든요. 논스톱 국선변호인제도는 작년 9월 5개 법원에서 시범 실시를 했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어요. 피의자나 피고인들이 갖는 변호인에 대한 신뢰감이나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 부분 높아졌다는 평가 속에서 올해 3월 1일부터 전국 법원에서 시행됩니다. 삼례 사건이나 익산 사건이 일어난 때는 영장심사 때 변호인이 선정되는 규정이 없을 시기였습니다. 무죄의 의심이 있거나 피의자가 억울하다고 하는 사건의 경우에는 수사 단계에서 조력을 통해 100% 방지는 아닐지라도 두 사건의 재발을 막아보자는 취지를 갖고 출발했습니다.
박 : 저는 사람을 오랫동안 본다는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장 단계의 변호인이 계속 기소에 관여한다는 건 굉장히 의미가 있는 일이죠. 그렇기 때문에 좋은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부 변호사 단체에서 ‘국선변호 업무는 변호사들의 생계 수단인데 이를 법원에서 통제한다’는 이유로 반대한 거로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제도를 만들 때의 취지예요. 피고인의 억울함을 없애야 하고, 억울함의 중심은 피고인이죠. 저는 논스톱 국선변호인제도가 그 취지를 살려 앞으로 잘 운영됐으면 좋겠습니다.
Q. 오랜 법조 생활을 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판사, 변호사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박 : 저는 수원에서 국선변호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 수원지방법원 형사합의부에 계시던 홍승면 부장판사님(現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장)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재판은 유무죄의 결론을 내는 과정도 굉장히 중요한데 그 과정에는 당사자, 검사, 피고인, 변호인, 때로는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중요하죠. 그런 배려를 정말 잘해주신 분이셨습니다. 그분 재판에 들어갈 때는 기다릴 때도, 법정에 들어갈 때도 늘 기분이 좋았어요. 언제나 배려해주시는 법관으로서 제게는 지금까지 최고의 법관이셨습니다.
이 : 법정에서는 원고 또는 피고의 법률적 대리인으로서 자신의 의견과 상대방의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검사건 상대방 대리인이건 상대가 조금은 거칠게 비판하거나 반박했을 때에도 다시 적절하게 대응하는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판사도 사람인지라 법정에서 변호사들이 적절하게 지적해주고 조율을 해주면 억울한 판결이 덜 나오게 되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저는 적절하게 대응하시는 변호사들이 다 기억에 남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영화 ‘재심’ 포스터
<출처 : 이디오플랜>
Q. 우리 세상이 덜 억울하고 더 행복하기 위해서 법조인과 법원에서는 각각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박 : 저는 분쟁이 확대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법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법치주의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법대로 모든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를 사람답게 사는 세상과 멀어지게 한다고 여겨져요. 변호사들이 많아지다 보면 문턱이 낮아져서 국민이 법률서비스에 쉽게 접근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법적 분쟁으로 가지 않아도 될 사건들을 법정으로 가져갈 수도 있거든요. 그런 부분들은 법조인들이 경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 법원은 절차적인 공정성을 보장하는 부분을 더 개선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장애가 있는 분들의 의사가 정확히 전달되는지, 통·번역을 비롯한 우수한 조력자들을 관리하는 것은 법원이 해야 하는 부분이지요. 그 역할을 통해 절차적인 기회 균등을 보장하고, 사회적 지위 때문에 국민의 사법제도 접근성이 떨어지게 하는 일은 없도록 계속 개선해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Q. 흙수저나 금수저 등 운명론적 좌절에 빠져 있는 젊은 세대들, 향후 법조인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박 : 저는 흙수저, 금수저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저를 당연히 흙수저 변호사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요. 물론 집이 어려웠고 부모님의 배움도 짧았지만 그렇다고 제가 흙수저 출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세상에는 수많은 가치가 있어요. 세상의 수많은 가치 중에서 오직 경제적 관점만으로 사람을 흙과 금으로 나눈다는 것은 불행한 겁니다. 저는 우리 부모님은 성실했으며 정직했고 제가 그런 가치를 보고 자랐다는 점에서 ‘난 금수저가 아니겠냐’고 이야기해요. 너무 경제적인 관점만으로 세상을 보는 건 옳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돈이 아닙니다. 물론 현실적인 부분도 무시할 수 없지만, 우리가 좀 힘들더라도 소중한 가치를 지향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삶을 좀 더 밝게 가꾸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 그렇다면 박 변호사님께서는 어느 부분의 가치가 제일 크다고 생각하시나요?
박 : 저는 기본적으로 남의 불행에 공감하는 가치, 남의 불행을 내 불행으로 받아들이는 ‘측은지심’이 세상을 움직이는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익산 사건에서 ‘군산경찰서 황?? 반장님’이 재수사를 할 때 주변에서 다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옆 동네 익산에서 벌어진 일이고 동료 경찰을 파는 것이며 게다가 이미 판결이 확정됐는데 왜 그러느냐는 거였죠. 그런데 황 반장님이 하신 이야기가, ‘범인으로 몰린 그 아이가 너무 어렸고 가난했고 고아였다, 나도 자식 키우는 입장에서 어떻게 이걸 그냥 두고 볼 수 있느냐’ 하는 그런 측은지심이었거든요. 삼례 사건의 경우에도 재심사건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진범이었습니다. 자기 때문에 억울한 옥살이를 한 당사자들의 고통에 공감해버린 거죠. 그게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이 : 저도 아직 젊은 세대라 조언을 할 입장은 아니지만(웃음), 박 변호사님이 말씀하신 것도 결국은 ‘관계’의 문제인 것 같아요. 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판사·검사·변호사 어느 한쪽이 위라는 고정적인 관계는 없다고 생각해요. 법조인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가 있다면 저는 ‘똑같은 귀’를 가진 사람이 됐으면 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대립이 팽배해 있지만, 적어도 상대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똑바로 들어줄 수만 있다면 그 사람들의 아픔도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목표를 가지고 힘든 과정들을 뚜벅뚜벅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Q. 마지막으로 박 변호사님께서는 이 판사님께 궁금하신 점은 없으신지요?
박 : 현재 사법 불신이 있고, 재판에 대한 일부 기사만 보고 오해해서 법원을 비난하는 사람도 많거든요. 그런데 교대역에 내려서 서울중앙지방법원 건물을 바라보면 밤 10시에도 불이 켜진 방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요. 저는 ‘법원에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저분들은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알아주지도 않고 때로는 왜곡된 시선으로 선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비난도 많이 받는데 대체 어떤 힘으로 저렇게 열심히 일 하실까?’ 하는 점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이 : 저도 그게 궁금합니다(웃음). 방금 변호사님이 하신 이야기는 요즘 경력 법관으로 오신 분들이 동료 판사님들에게 가끔 물어보시는 내용 같습니다. 사법 불신은 과거의 역사적·정치적 상황들이 작용한 부분도 부인할 수 없지만 이제부터 조금씩 바로 세워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어요.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계속 법원 건물에 불이 켜져 있고 사건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이다 보면 신뢰가 쌓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진실불허’라는 말이 있어요. 끝까지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면 그건 공허한 게 아니라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대담 후 영블로거 위원들의 질의응답이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박준영 변호사는 꼭 하고 싶었던 말이라며 덧붙였다.
"재심이라는 건 단순히 억울한 사람을 구제해주고
누명을 벗겨주는 제도가 아닙니다.
억울함의 대상은 사건이나 진범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거예요. 삶이 파괴되는 것,
그 사람의 삶뿐만 아니라 한 가족의 삶까지
파괴되는 게 억울한 일인 겁니다."
재심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끔 해준다는 것,
판사님들께서 그것을 조금 더 알아주시길 부탁드려요.
재심은 한 사람의 삶을 구제하는 것입니다.
이재신 판사와 박준영 변호사, 그리고 대법원 영블로거들
영블로거와의 질의응답은 3월 15일부터 대법원 블로그(http://blog.naver.com/law_zzang , http://blog.daum.net/law_zzang)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글_이경희 사진_고인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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