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필객Ⅰ
글 노형미 판사 (대구지방법원)
드디어, 울릉도
오래전부터 울릉도에 가보고 싶었지만 뱃멀미에 관한 괴담으로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대구지방법원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고 2021년에는 포항, 2022년에는 울진 후포항에서 크루즈가 출항하기 시작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울릉도를 관할구역으로 하는 대구에는 최근에 울릉도에 다녀오신 분들도 많았고, 크루즈로 뱃멀미 걱정도 덜게 된 김에 용기를 내어 울릉도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울진 후포항에서 출발
새벽 다섯 시. 동도 트지 않은 새벽에 후포항으로 향합니다. 포항을 거쳐 7번 국도에 오르자 바다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6월 초 바다는 장판이라더니 과연 흰색 포말 한 점 보이지 않는 매끈한 해수면에 한시름 놓습니다.
크루즈 갑판 위 가장 전망이 좋은 곳에는 주막이 있습니다. 파전, 닭발과 어묵을 팔더군요. 테이블은 당연히 모자라고 여행객들은 익숙한 듯 주변에 돗자리를 펼칩니다. 지금 시각은 오전 8시 30분. 다들 한껏 들뜬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단 하나의 섬도 보지 못하고 약 네 시간을 달리자 울릉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바다에서 높은 산이 불쑥 솟아오른 듯한 지형입니다. 평평한 곳이 보이지 않아 도대체 공항이 어디에 생긴다는 것인지 물었더니 바다 위로 활주로를 만든다고 합니다. 초반엔 80인승 정도의 비행기만 오갈 수 있다고 하네요. 사동항 앞바다에 뭔가 만들고 있는 것이 활주로였나 봅니다. 바다 위 활주로라니. 겁이 많은 저로서는 가능한 한 미뤄두고 싶은 경험입니다.
깃대봉에서 가벼운 트레킹
울릉도에 왔으면 모름지기 성인봉에 올라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했지만 일행과의 원만한 관계 유지를 위하여 깃대봉으로 노선을 정합니다. 깃대봉은 오르는 데 크게 힘이 들지 않고 전망도 좋아 울릉도에서 가벼운 트레킹을 즐기고자 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곳입니다.
숙소가 있는 저동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순환버스를 타고 북쪽 마을인 천부로 가서 나리분지행 미니버스로 갈아탑니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거의 누운 자세로 실려 가는데, 미니버스는 마주 오는 관광버스들을 능숙하게 피해 가며 구불구불한 산길을 달립니다. 외지인은 울릉도에서 운전할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을 실감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약 10분쯤 지나니 거짓말처럼 넓은 평지가 나타납니다. 조선 후기 이규원이 「울릉도검찰일기」에서 사람이 살 만한 지역으로 나리분지를 꼽은
데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늘을 가려주는 울창한 원시림을 한참 걷다가 눈부신 메밀밭을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깃대봉에 도착합니다. 구름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맑은 날씨에 나리분지를 둘러싼 봉우리들과 자그마한 마을들, 울릉도 북쪽의 푸른 바다 풍경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안내판에 적혀 있는 울릉도 자생 식물들을 하나씩 찾아보며 설렁설렁 걷다 보니 두 시간 반짜리 코스가 세 시간 반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왕 늦어진 김에 나리분지 초입에 있는 식당의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습니다.
삼나물, 부지깽이 등 울릉도산 나물로 한 상이 차려지고 우산고로쇠 물과 씨껍데기 막걸리로 갈증을 해소합니다. 바로 옆 평지에는 하얀 꽃이 지천에 피었는데 그게 명이꽃이라고 합니다. 마늘 맛이 나서 산마늘이라고 불리지만 울릉도에서는 겨울이 끝난 뒤 캐 먹으면서 생명을 이어갔다고 하여 명이라는 이름도 붙었다는군요. 시원한 바람과 맛있는 음식으로 피로를 풀다 보니 마음이 느긋해져 원래 타려던 버스를 그냥 보내봅니다.
저동에서 시작한 울릉도 한바퀴 관광
하루는 맘껏 돌아다녀 보고 싶어 차를 빌렸습니다. 평지가 드문 탓에 2019년에야 울릉도 한 바퀴를 연결하는 순환도로가 만들어졌고, 여전히 종종 낙석도 있다고 하여 조심스런 마음입니다.
렌터카 사장님의 추천대로 저동에서 시계 방향으로 출발합니다. 거북바위, 삼선암 등 관광버스가 멈춰 있는 곳은 어김없이 관광 포인트입니다.
태하항에 이르러 태하향목관광모노레일을 타고 가파른 경사로를 순식간에 이동하여 숲길을 걷다 보면 향목전망대가 나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까마득한 발밑이 훤히 보이는 발판을 딛고 스카이워크 끝에 서니, 왼쪽으로는 육지로 가는 배가 적당한 바람을 기다리는 곳이었다는 대풍감이, 오른쪽으로는 울릉도 북쪽 마을 중 하나인 현포가 보입니다.
사진작가들이 꼽은 한국 10대 비경이라는 아찔한 절벽과 에메랄드빛 바다, 그 위를 날아다니는 하얀 갈매기의 모습에 손에 땀이 배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참을 자리에서 떠나지 못합니다.
천연 바닷속 전망대 ‘천부 해중전망대’
다시 차를 달려 고릴라를 닮은 추산을 지나 천부 해중전망대에 이르렀습니다. 등대 같은 건물의 회전 계단을 걸어 내려가면 ‘해수면, 1m, 2m…’ 표시가 되어 있고, 5m 되는 지점에 벽면 360도가 유리로 된 천연 바닷속 전망대가 나타납니다.
물속에 먹이 바구니를 두어 물고기가 제법 모여 있는데, 돌돔, 쥐치, 벵에돔 등 도시어부에서나 보던 물고기들이 먹이를 먹고 노는 모습을 구경하며 이름을 맞춰보는 것이 상당히 흥미로워 꽤 오랜 시간을 머물렀습니다.
아찔한 절벽이 있는 내수전몽돌해변
울릉도와 독도에서 군인들이나 독도경비대가 오리발과 마스크를 챙겨 물에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학포야영장 근처에는 이른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여행 내내 본 아름다운 물빛에 해중전망대까지 다녀오고 나니 6월 초이지만 물에 꼭 들어가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챙겨온 스노클 마스크를 들고 내수전몽돌해변으로 향합니다. 애매한 계절의 늦은 오후라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근처에 텐트를 치고 차박을 하면서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울릉도는 모래사장이 없고 모두 돌로 된 해변이라 물속 시야가 제법 좋습니다. 해중전망대에서 보던 물고기들이 손에 닿을 듯 앞에 있습니다.
아쉽지 않을 만큼 물놀이를 즐기고 몸을 말리며 주위를 보니, 해변임에도 바로 옆에 아찔한 절벽이 있는 풍경에 이곳이 울릉도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울릉도의 바닷속까지 만끽하였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져서 뒤뚱뒤뚱 몽돌을 밟고 들어오는 관광객들에게 먼저 나서서 사진을 찍어 주는 친절을 베풀어 봅니다.
마지막 여행지, 울릉도 관청이 모여 있는 ‘도동항’
마지막 밤이라 아쉬운 마음으로 숙소 앞마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데, 관광차 온 아코디언 동호회에서 팬플룻과 함께 공연을 펼칩니다. 뜻밖의 행운입니다. 가족과 함께 관광을 온 듯한 어머니는 애수의 소야곡을 신청하고는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연주자 앞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 모습에 왠지 울컥 눈물이 솟다가, 아버지를 쿡쿡 찔러 마지못해 팁을 주게 하는 모습에 웃음이 납니다. 마지막 날 일정은 도동항에서 시작합니다. 도동항은 울릉도 대부분의 관청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단체여행의 출발지이기도 하여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인파를 피해 도동항에서 저동항으로 이어지는 행남해안산책로로 들어서 봅니다. 도동항터미널과 이어진 행남해안산책로는 접근성이 좋으면서도 금세 놀라운 풍경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동굴 같은 통로를 지나면 쪽빛 바다가 드러나고 곧 쏟아질 듯한 절벽이 반복됩니다. 태풍피해로 900m 지점에서 길이 끊어진 점이 아쉽지만, 울릉도의 비경을 조금이라도 더 감상하고 싶은 여행자의 마음을 달래주기에 충분합니다.
울릉도가 가까이 보이기 시작하면 제일 먼저 마중을 나오는 것이 괭이갈매기이고, 여기까지 따라와도 되나 싶은 곳까지 나와 배웅을 해주는 것도 괭이갈매기입니다. 흔히 보던 갈매기와 달리 눈매가 매섭고, 주둥이 끝이 검고 붉습니다. 우아한 비행으로 울릉도의 아름다운 풍경에 큰 지분을 차지하지만, 울릉도 내에서는 흔하디흔한 말썽꾸러기입니다.
생선 좌판에서 상인이 한눈을 파는 틈에 슬금슬금 다가와 판매 중인 잡어를 탐하는 모습은 고양이 같기도 하고(울음소리도 고양이 같다고 해서 괭이갈매기라는군요), 동료들이 날아다니면서 새우깡을 채가는 수고를 하는 가운데 아래층 갑판에 서서 떨어지는 것을 주워 먹는 녀석들은 영특한 까마귀 같기도 합니다. 주차된 차량 위에 하얀 칠을 가득 해 놓는 것은 비둘기 같기도 하고요. 도시의 다양한 동물들이 맡아 하는 행동을 울릉도에서는 괭이갈매기가 모두 해치우는 것 같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생활, 내가 사는 세상의 확장
종전에 살던 지역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발령을 받으면 낯선 곳에서의 생활이 두려우면서도 설렙니다. 제가 새로이 일하게 된 곳의 관할은 내가 사는 세상의 확장이기도 합니다.
그 핑계로 주변 지역을 구석구석 다녀보게 되는데요, 당사자의 주소나 사건의 장소로 기재된 곳을 보면 그곳에 갔던 계절의 느낌과 풍경,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들의 느낌, 사투리의 미묘한 차이, 먹었던 음식과 샀던 물건들, 그날 내가 했던 생각들을 떠올리게 되고 사건에 더 몰입할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울릉도는 어떻게 기억될까요? 육지와의 머나먼 거리감, 그래서인지 필터가 세 겹 정도 제거된 듯한 맑은 시야와 공기, 거침없이 내리쬐던 햇볕에 비해 서늘한 날씨, 우리나라 어느 곳과도 다른 독특하고 아름다운 풍경, 친절한 듯 무뚝뚝한 사람들, 그리고 동창, 동향 사람들과 함께하는 수많은 단체관광객을 보며 느낀, 나고 자라 온 곳을 떠나서 살아왔고 현재 살고 있는 곳도 조만간 떠나게 될 사람의 쓸쓸함이라는 개인적인 감상이 마음에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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