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필객 2] 내가 살았던 집의 역사 이사(移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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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8.07

낭만필객Ⅱ_8월호_메인사진

낭만필객Ⅱ
글 박지현 실무관(서울행정법원))

내가 살았던 집의 역사 이사(移徙)

알리미가 깜빡.
“선배님 저 이사해야해서 내일 휴가 낼게요.”
“네, 이사 잘하세요.”
작년에도 이사한 것 같은데... 아닌가?
다음날 이사를 마친 A씨가 주민등록초본을 나에게 건넸다. 이사를 했으니 인사정보에 주소를 바꿔 달라는 것이다. 이사 바로 다음 날 전입신고를 마친 A씨의 부지런함과 이를 가능케 한 대한민국의 행정력에 잠시 감탄했다. 초본을 보니 A씨는 시골에서 태어났으며 20세쯤 서울로 올라와 여러 번 이사를 했고, 내 기억처럼 작년에도 이사했다. A씨는 이사가 지겹다며 투덜대다가 그래도 이번 집이 가장 마음에 든다며 자신이 살았던 집의 역사를 초본에 적힌 순서대로 읊어주었다.

대림동 원룸에서, 자신의 방을 처음 갖게 되다
A씨는 시골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까지 지내다가 대학 때문에 서울에 올라왔다. 당시 A씨의 집은 18평이고 그곳에서 5명의 가족이 복작복작 살았다. A씨는 방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고 당연히 ‘프라이버시란 무엇인가, 먹는 것인가’하며 살았다. 설상가상으로 부모님께서 거실에서 주무셔서 새벽에 라면도 끓여 먹지 못하고 강제로 건강한 삶을 살았다. 그러던 A씨가 서울에 살면서 처음 방을 갖게 된 것이다. A씨의 처음 집은 대림동의 어느 원룸이다. 이름은 코끼리 빌라였는데 아무래도 집주인이 반어법을 좋아해서 지은 이름 같다. 웬 대림동에 방을 얻었냐고 묻자, A씨의 어머니의 지인의 지인의 또 지인분께서 운영하는 원룸이라 보증금을 떼일 걱정이 없어서 대림동에 집을 계약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집이 매우 가난한 줄로 알고 부모님께 부담을 주는 것이 죽도록 싫었던 A씨에게 월 10만 원(공과금 포함)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 후 A씨의 부모님께서는 평수 넓은 곳으로 이사하셨다고 하니 A씨의 부모님의 자녀교육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시간을 줄이고 도서관, 카페에서 문화생활 누리다
대림동 원룸은 A씨에게 먼저 우울감을 주었다. 3평 정도 좁은 방에 누워서 A씨는 이곳이 집이 아니라 관이 아닐까 하는 착각도 했다. 누구는 돈을 주고 관에 들어가서 죽음을 체험한다는데, 공짜로 누리며 매일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기이한 집이다.
집이 좁아서 그런지 햇빛도 바람도 찾아주지 않았다. 대신 옆집 아저씨의 생리현상 소리가 너무 명확하게 들려서 이웃의 건강을 억지로 살피게 되었다. 겨울이 되니 결로가 많이 생겼고 안 그래도 우중충한 집에 곰팡이가 친구 하자며 찾아와 더욱 우울했다. 그래서 A씨는 결심했다. 집에 있는 시간을 줄이자.
A씨는 학교 도서관이 닫히는 10시까지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책도 읽고 멀티미디어실에서 명화도 많이 보았다. 도서관이 지겨우면 카페에 갔는데 그때부터 좋은 카페를 찾는 것이 A씨의 특기이자 최고의 행복이 되었다. 카페가 지금처럼 문화로 정착하기 전, 커피를 비싼 돈을 주고 마신다며 비난하는 사람이 많았다. 알뜰한 A씨도 동감하는 부분이라서 카페에 돈을 쓰는 것을 망설였으나, 이내 생각을 고쳤다. 카페 사업이 성장한 가장 큰 이유는 느긋하게 타인과 어울리는 공간의 부재 때문일 것이다. 가정에서 쉴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타인과 안전하게 공유할 수 있는 광장이 도서관 외에 없던 A씨에게 카페는 사치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간이자 조건이었다. 그렇게 A씨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풍요로운 문화생활을 누리고 3년의 대림동 생활을 마쳤다.

사계절을 몸소 느낀 2번째 집, 신촌 옥탑방
A씨는 다음 집은 신중하게 고르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단 현관에서 침대까지 세 발자국은 가야하고 빛과 바람이 문지방이 닳게 찾아오는 곳을 우선으로 하였다. 그리고 이왕이면 학교와 가까운 곳으로 찾기 위해 여러 부동산을 다녔다. 그렇게 신촌의 한 옥탑방을 보았다. 무려 9평에 베란다가 있고 같은 층에 다른 방이 없어서 이제 이웃의 건강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더해 환기마저 무척 잘되었다.
바람이 너무 잘 통해서 빨래가 태극기처럼 펄럭거릴 것을 상상하니 서울 대림동에서
쿰쿰하던 물 냄새 스트레스가 일순에 해소되었다. A씨는 확신했다. 이 집이다. 종이 울렸다. 들뜬 마음으로 A씨는 부모님께 집을 계약하겠다고 전화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 옥탑방은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고 계약을 만류하셨다. 하지만 더우면 벗고 추우면 입으면 그만이라며 부모님의 말씀을 가볍게 반대편 귀로 흘려보냈다.
하지만 A씨는 그래선 안 되었다. 더 신중했어야 했다. 부모님 말씀은 언제나처럼 틀리지 않고 가혹하게 적중했다. 옥탑방에서 A씨는 정말로 우리나라가 사계절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에어컨을 틀어도 끄고 나면 금방 더워졌다. 더 심각한 것은 겨울이었다. 너무 추워서 난방 텐트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보일러를 틀어도 웃풍이 심해서 코가 시렸다. 장갑도 있고 양말도 있는데 코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집은 분명히 9평인데 활동반경은 난방 텐트 안에 만 있어 참 서글펐다.
또 하나의 복병은 소음이었다. 옥탑방 가까이에 술집들이 있었는데 밤이 되니 고성방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차라리 대림동 옆집 아저씨가 나았다. 집을 구할 때는 아침, 저녁 모두 가봐야 한다는 것을 몰랐었다. 집을 구하는 것은 그 집뿐 아니라 반경 100미터까지 고려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깨달았다. 그래도 신촌 옥탑방이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주변에 처지가 비슷한 학생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저렴한 식당들이 많았다. A씨가 자주 갔던 곳은 ‘신촌 수제비’이다. 찾아보니 현재 수제비 5,000원 김밥 2,000원으로 여전히 저렴하다. 재료가 다양하게 들어간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맛!있!다! 이상하다 하고 다시 후루룩 마시면 여지없이 맛!있!다! 1988년 개업 당시 사진과 그 이후 크게 바뀐 것이 없는 인테리어, 오픈 주방, 일하시는 어르신들의 정겨운 수다가 음식의 맛을 더 살려준다. 그렇게 신촌에서 3번의 폭염과 3번의 혹한을 견뎠다.

입사 후 서초동 관사 입성
그리고 A씨는 입사 후 1년 넘게 대기하던 서초동 관사로 입성한다. 월 15만 원. 더욱 직장에 충성해야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처음으로 전망이라 할만한 ‘마운튼 뷰’를 갖게 되었다. 늘 험한 스트릿 뷰와 벽만 보다가 녹색을 보니 마음이 편안했다. 비가 오면 흙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워서 행복하고 맑은 날은 나무 잎 사이로 햇빛이 쏟아져 행복했다.
주말마다 신이 나서 서리풀 공원으로 산책을 가고 조금 더 걸어 반포한강공원에서 물멍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물이 일렁일렁거린다. 그러다 물고기가 튀어오르고 옆에 두루미도 물멍을 하는지 하염없이 물을 보고 있다. 큼큼한 물 냄새가 난다. 옆에 놀러나온 가족들이 지나간다. 그러면 기분이 좋다. A씨는 그래서 한강이 좋다. 한강이 서울을 숨 쉬게 한다고 생각한다.

가슴 벅찬 서울, 역세권 청년주택서 새로운 시작
A씨는 처음엔 서울이 벅찼다. 복잡하고 거대해서 자신을 작고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서울이 즐겁다. 집값만 생각하면 서울은 숨 막히게 불공평한 도시지만, 한강과 공원은 모두에게 열려있고 잘 찾아보면 보석처럼 좋은 기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일단 A씨는 서울에서 더 살기로 한다. 이번에는 역세권 청년주택에 당첨되어 임대료 부담이 적고, 근무지와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좋은 동거인과 살게 되었고 처음으로 거실과 (무려) 아일랜드 식탁이 있는 집에 살게 되었다.
A씨는 당분간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되어서 홀가분하다.
여기서도 잘 지냅시다, A씨. 아니, 나 자신아.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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