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필객 2] 승탑(僧塔) 나의 문화유산 탑사기(塔事記)

공감

2023.07.05

적인선사탑(출처_문화재청)

낭만필객Ⅱ
글 이준영 부장판사(울산지방법원)

승탑(僧塔)
나의 문화유산 탑사기(塔事記)

예전에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 흩어져 있는 로마 유적들을 틈틈이 보면서, 오래된 석조 건축이나 예술품에 매료된 바 있다. 세월이 흘러 코로나 시국이 되어, 우리들의 시공간이 제약되는 듯한 답답함 속에서, 과연 우리나라의 석조 건축이나 예술품은 뭐가 있을까 불현듯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집에서 가깝고 아주 오래전에 가보았던 경주 분황사와 감은사 터가 생각나, 가보았다. 분황사는 선덕여왕 때 만들어졌으니 그곳에 있는 모전석탑(국보)은 약 1,400년 된 것이고, 신문왕 때 세워진 감은사 터 동·서 3층 석탑(국보)도 약 1,340살이다. 이때는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인데, 서유럽은 서로마제국이 멸망1)하고서 약 500년 동안의 암흑시대가 한창일 때에 해당한다.
당시 서유럽에 일어난 일 중에는 732년의 투르푸아티에 전투(Battle of Tours-Poitier) 정도가 눈여겨볼 만하다. 참고로, 유명 관광지인 로마 콜로세움이나 판테온, 포로 로마노의 대부분, 트리어 포르타 니그라, 님 근처 퐁뒤가르 등은 기원전부터 기원후 1세기 무렵에 지어진 것들로서, 우리에게는 고조선 시대이다. 서유럽은 서로마제국 시절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 있었지만, 서로마제국 멸망 후 그 500년의 암흑기 동안에,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남북국시대와 고려 전반기를 거치면서 서유럽과 대등하게 발전하였다.
이렇듯 서유럽에 새로운 문화재의 출현이 주춤하던 시기에, 한반도에서는 찬란한 문화재들의 향연이 펼쳐졌음을 깨닫자, 벅찬 감동과 함께 우리 조상들이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런 계기로 시간이 나면 우리나라의 석탑을 찾아다니게 되고, 옛절터에 혼자 남겨진 석탑이나 석등, 석조(石槽, 돌 수조), 비석, 당간지주(幢竿支柱, 깃대를 끼워 고정하는 돌), 건물터에 대한 관심이 커지게 되었다. 승탑2)도 그렇게 다가왔다.

사명대사탑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 승탑(보물)
경남 합천군 해인사 홍제암 뒷동산에 있는 사명대사 승탑이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구한 영웅 중 한 분으로 누구나 알텐데, 사명대사의 놀라운 업적과 활약에 비하여 그의 승탑은 기단(基壇, 탑신을 아래에서 지탱하는 부분)조차 없이 아주 소박하다. 아마도 임진왜란 이후의 궁핍한 여건과 사명대사의 성품 등에 기인한 것이리라.
이 승탑을 비롯하여 특히 조선 중기 이후에 만들어진 승탑은 석종(石鐘)형이라 하여, 종모양을 하고 있는데, 보통 절의 입구나 구석진 곳 승탑이 몰려 있는 부도전(浮屠殿)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이다. 그런데, 이런 석종형 승탑 이전에 남북국시대와 고려시대까지의 승탑은 원에 가까운 팔각형 집, 즉 팔각원당(八角圓堂)형으로서, 석종형보다 훨씬 화려하다.

망해사 탑

울산 망해사 터 승탑(보물)
이 승탑으로 인하여, 승탑에 대해 관심이 생기게 되었다. 망해사(望海寺)는 처용과 관련된다. 남북국시대 신라 헌강왕이 울산까지 행차하여 외황강 어귀, 개운포(開雲浦)에 오니 갑자기 이상한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여, 이것이 동해 용의 조화라는 일관의 말을 듣고, 동해 용을 위해 바다(海)를 내다보는(望) 곳에 절을 지으라고 하니, 동해 용이 기뻐하면서 구름과 안개도 걷히고 자신의 아들 처용을 보내 신라 국정을 돕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망해사가 생겼다. 처용이 물에서 나온 처용암은 지금도 조그마한 바위섬으로 그 자리에 있다. 울산 울주군 옛 망해사 자리에는 팔각원당형의 동서 쌍 승탑이 있는데, 이런 모습의 승탑은 사실 이전에도 무의식중에 봤겠으나, 승탑에
대한 인식이 생기고 난 이후로는 처음 제대로 본 승탑이다. 그때 마음속으로 ‘집에서 가까운 곳에 이렇게 아름답고 오래되고 대단한 문화재가 있는데, 왜 나는 그동안 모르고 지냈을까? 내가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은 아닐까?’ 생각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그 승탑이 말을 하는 것이다. ‘준영아, 지금이라도 왔으니 됐다.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1,100년에 비하면, 네가 울산에 자리잡아 나에게 오기까지 20년도 안 되는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인내심이 많다.’ 사람들에게 이런 느낌을 말하니, 유흥준 교수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온다고 해서, 해당 부분을 읽어보았다(그 전에 그 책을 읽지 않았다). 그때 그 유흥준 교수님의 제자가 감은사 터 3층 석탑을 보고, 탑이 자신에게 말을 해온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하는 부분에 완전히 공감이 갔다.
이 승탑은 옥개석(屋蓋石, 지붕돌) 낙수면(落水面, 지붕 윗면)에 기와 모양이 없이 단조로운 편이고, 옥개석 위의 상륜부(相輪部, 마치 꼬치에 고리와 구슬을 꿴 것같이 높게 장식한 부분)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문비(門扉, 문 모양)가 새겨진 탑신(塔身, 지붕을 아래에서 지탱하는 몸통 부분)과 기단의 비율이 적당하고, 기단 상대석 앙련(仰蓮, 위로 핀 연꽃)의 꽃잎을 서로 엇갈리게 겹으로 새겨서 너무나 아름답다. 높다란 탑신 괴임돌(탑신 받침 돌)이라든가, 기단 하대석의 복련(覆蓮, 아랫부분에
아래로 핀 연꽃), 기단 받침돌의 안상(眼象, 코끼리 눈 모양 새김)도 멋지다. 승탑은 스님의 사리를 모신 탑인데, 부도탑(浮屠塔)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부도(浮屠)란
불타(佛陀, 부처)와 같은 말이었다가, 부처와 관련되는 모든 것을 넘어 부처의 제자인 스님까지 의미하게 되었고, 그러다가 ‘스님의 사리를 모신 탑’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3). 즉 부도란 탑(塔, 스투파)과 같은 말로서, 부도탑이란 결국은 탑탑, 또는 부도부도, 마치 역전앞처럼 동어반복으로 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냥 부도라고 하든지, 스님의 탑이란 뜻에서 승탑이라는 말이 정확하다.
부처의 사리4)가 있는 불탑(佛塔, 줄여서 탑)은 부처를 숭배하기 위한 것으로서, 지역과 시기에 따라 여러 모양과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큰스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한 승탑은 스님의 수가 많은 만큼 더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그런데, 아무리 큰스님이라도 부처를 능가할 수 없으므로, 승탑을 만든 예술가로서는 ‘기존의 탑(불탑)과 다르면서도, 큰스님을 기릴 수 있게 멋지게 하고 싶고, 그렇다고 탑보다 더 튀지는 않게 만들 방도가 무엇일까?’ 크게 고민하였던 것 같다.

도의선사탑 양양 진전사 터 도의(道義) 선사(禪師, 선승) 승탑(보물)
이 승탑을 보면, 그런 고민을 느낄 수 있다. 강원 양양군의 옛 진전사 터 귀퉁이 소나무들 사이에 있다. 도의 선사는 당나라에서 공부를 하고 헌덕왕 13년(821년) 남북국시대 신라로 돌아와, 선종(禪宗, 참선)을 펼치려 하였으나, 당시 주류였던 교종(敎宗, 교리) 분위기에서 배척당하여, 시골로 낙향하여 이곳에서 염거(廉居) 화상(和尙, 스님) 등 제자들을 키우고 정진하다가 입적하였다. 이 승탑은 도의 선사의 승탑으로 여겨지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승탑으로 추측되는데, 그 까닭은 처음에는 승탑을 주로 선종 계열 절, 즉 선문(禪門)에서 큰스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하여 그 제자들이 만들었기 때문이고, 도의 선사가 우리나라에 선종을 처음으로 소개한 스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양을 보아도 딱 알 수 있다. 탑신과 옥개석은 팔각형으로 되어있는 반면, 그 아래 기단은 육면체 사각형의 2중 기단으로서 신라 시대의 탑(불탑)과 똑같다. 기단 면석(껍데기 돌)에는 탱주(撐柱, 가운데 기둥)까지 새겼다. 즉, 이 승탑을 만든 사람은, 기존의 탑(불탑) 모양으로 승탑을 만들면 스님과 부처를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탑신을 크기가 작은 단층의 팔각형으로 만듦으로써 탑과의 중복·충돌을 피하였던 것이다. 팔정도(八正道) 등 숫자 8이 갖는 불교적인 의미도 나타낼 수 있는, 아주 절묘한 방법이다. 그러다 그 뒤로는 기단까지 팔각형으로 바꾸고, 기단 아래와 위로는 모래시계 모양으로 수미산(須彌山, 불교에서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산)처럼 만들기 시작한다.

연곡사동탑 구례 연곡사 동(東) 승탑(국보)
우리나라의 승탑 중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되는 것이다. 전남 구례군 연곡사는 지금은 작은 절인데, 이 승탑 외에도 북(北) 승탑(국보), 소요대사탑(보물) 등 여럿과 함께, 이들에 대한 탑비(塔碑, 승탑에 대해
설명하는 비석)들도 있는 것에 비추어 보면, 아주 옛날에는 그 세력이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승탑을 아래에서부터 보면, 아래 기단받침돌의 구름과 용무늬부터 예술혼이 느껴진다. 그 위 하대석에는 각 면마다 다른 자세의 역동적인 사자를 새겼다. 그 위 중대석 각 면에는 팔부신중[八部神衆,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하급 군인]을 새겼다. 그 위 상대석 아랫부분에는 겹겹의 연꽃무늬가 있고, 꽃잎 가운데에는 또다시 꽃무늬가 있다. 상대석 윗부분에는 아주 작은 꽃띠를 두른 난간이 있고, 그 난간 사이에는 여덟 면에 각각 여러 모습의 가릉빈가(迦陵頻伽, 사람 얼굴에 새의 몸을 지닌 극락조)가 있다.
그 위 탑신에는 문비와 함께 사천왕(四天王, 불법과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들을 수호하는 일종의 장성급 군인)을 새겼다. 지붕은 또 어떠한가? 목조 건물 지붕처럼 서까래와 기와를 새기고, 지붕 아래는 겹처마까지 새겼다. 상륜부는 복발(覆鉢, 국그릇을 뒤집어 놓은 듯한 부분) 바깥에 가리비껍데기 같은 앙화(仰花, 위로 핀 꽃) 또는 보개(寶蓋, 귀한 덮개)가 감싸고 있고, 그 위 연꽃무늬를 한두 개의 보륜(寶輪, 도넛 모양 바퀴)과 이를 받치는 작은 꽃띠, 그 위에는 비둘기처럼 생긴 봉황들, 그 위 또다시 보륜과 제일 위에 보주(寶珠, 구슬)가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연곡사 동 승탑은, 약 1,000년 뒤에 서울 강남구 봉은사의 영암당(暎巖堂) 임성(任性) 대종사(大宗師, 큰스님) 승탑으로 다시 나타난다.

태안사탑

곡성 태안사 적인(寂忍) 선사 승탑(보물)
이 승탑이 있는 전남 곡성군 태안사는 지금은 첩첩산중에 있는 아주 작은 절이지만, 남북국시대 신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동리산문(桐裡山門) 종찰(宗刹)로서, 옛날에는 선암사(아주 크고 아름다운 천년고찰), 송광사(현재 승보사찰), 화엄사(현재 대한불교조계종 본사), 쌍계사(현재 쌍계총림 사찰) 등을 거느린 엄청난 절이었다.
이 절은 안타깝게도 6·25 때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다행히 몇몇 문화재는 굳건히 버티고 있는데, 그 중에 적인 선사 승탑이 으뜸이다. 이 승탑은 절의 제일 뒤 높은 곳에 있고, 선원 옆 배알문(拜謁門)으로 들어가면 볼 수 있는데, 기단이 다소 납작하여 전체적으로는 통통하면서 안정된 느낌을 준다. 위에서부터 보면, 상륜부는 온전히 남아있으나 연곡사 동 승탑과 달리 봉황은 없고, 옥개석은 연곡사 동 승탑과 거의 같다. 탑신에 사천왕상은 세월의 흐름 속에 거의 지워졌고, 기단 상대석 윗부분에 난간은 없이 안상이 각 면에 있고, 상대석 아랫부분에는 매우 아름다운 겹겹의 앙련이 있다. 기단 중대석은 얇아서 전체적으로 통통한 느낌을 주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 승탑의 가장 강렬한 부분은 하대석에 새겨진 8개의 사자상이다.
이 사자상은 매우 발랄한 동작을 대단히 사실적으로 표현했는데, 8개의 사자가 모두 다른 동작을 하고 있다. 지금 날뛰는 듯이 수사자들이 갈기를 힘차게 드날리고 있다. 이것을 보고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쩜 그 옛날 1,000년도 전에 사자를 이렇게도 완벽하게 새길 수 있었을까? 그냥 밋밋하고 경직된 자세가 아니다. 저 사자상을 보면서, 아마 둘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나는, 불교에서 사자는 지혜의 상징으로 중요시하기 때문에, 여러 모습의 사자를 잘 표현하기 위하여 아주 많은 자세의 참고용 사자 그림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당시에 사자를 잘 표현하기 위해 실제로 살아있는 사자를 키우는 동물원이 있었고, 이를 통해 그토록 사실적으로 새길 수 있었다는. 계속 마음속으로 고뇌하다가, 두 번째 견해를 믿고 싶어졌다. 단, 사료상 근거는 전혀 없는 개인적인 견해이다.
승탑에 대하여 몇 자 끄적이다 보니, 불과 5개에 대해서 적었을 뿐인데도 분량이 제법 늘어났다. 승탑을 보러 돌아다니는 길은 시골길이 아주 많은데, 산에 푸른 잎이 듬성하다가 늘기도 하고, 논에 그루터기만 있다가 물이 대어져 있고, 어느새 벼가 익고 있는 길이기도 하다. 오가는 동안 새들과 다람쥐, 도마뱀 등 짐승, 커다란 호랑나비를 비롯한 곤충들이 수줍게 반겨주기도 한다. 어쩌면 승탑들이 이런 자연을 느껴보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각주
1 멸망 연도인 476년은 고구려 장수왕, 백제 문주왕, 신라 자비마립간 시절이고, 가야 연맹도 있었다.
2 ‌유럽의 많은 성당들, 예컨대 부다페스트의 성 이슈트반 대성당에는 이슈트반 성인의 오른손 뼈를 매우 소중하게 모시고 있고, 밤베르크 대성당에는 교황 클레멘스 2세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이러한 성당들은 불교로 치면 승탑(매우 거대한 승탑)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3 부도의 뜻에 대하여는 「부도」(정영호 글, 안장헌, 김종섭 사진, 대원사) 13쪽 이하를 보면 좋다.
4 진신사리(眞身舍利, 부처 몸에서 나온 진짜 사리), 법신사리(法身舍利, 부처의 가르침을 적은 고귀한 경전), 그밖에 금이나 옥 같은 공양품(供養品) 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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