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필객 2] 국민과 함께하는 좋은 재판 형사재판에서의 피해자진술권 보장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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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5.04

낭만필객Ⅱ
글 류영재 판사(남양주지원)

국민과 함께하는 좋은 재판 형사재판에서의 피해자 진술권 보장에 관하여

피해자 진술 청취 필요성 절감하게 한 형사재판
단순한 상해 사건이었다, 공소장만 보면. 피고인은 만취한 상태에서 피해자를 때리고 목을 조르다가 상황을 목격한 동네 사람들에 의해 저지당했다. 피해자는 전치 3주의 상해를 입었다.
피고인은 전과가 없는 평범한 사회인이었다. 만취 상태에서 행한 범죄라 범행의 동기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반성했고, 피해자와 합의하고 싶어 했다. 피고인의 가족과 지인들은 선처를 호소했다. 공소장에 기재된 객관적 가해 행위와 피해의 정도, 피고인의 양형 사유를 참작하여 판결을 선고하면 끝날 사안이었다. 그러나 피해자가 법정에 나와 자신의 피해에 대해 진술하자 이 사안은 더 이상 단순 상해 사건이 아니게 되었다.
피해자는 처음 본 사람에게 이유 없이 폭행당하고 수 분간-피해자에게는 너무나도 긴 시간 동안-목을 졸렸던 그 날을 1년 가까이 지난 그날의 법정에서도 생생히 기억해냈다. 전치 3주의 상해지만, 피해자에게는 ‘죽어가는 과정을 경험한 순간’으로 각인되었다. 상처는 치료되었지만 대인공포가 심해져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범죄로 인한 피해는 아직도 현재진행 중이었다. 피해자 진술 청취 이후로 이 사안은 내게 ‘피해자가 죽을 뻔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형사재판에서의 피해자 진술 청취 필요성을 절감하게 해준 재판이기도 하다.

사건에 대해 거리두기
재판을 하다 보면, 사건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삶을 담은 기록처럼 다가오는 동시에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해야 할 서류더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모든 사건들의 구체적 타당성을 지나치게 고려하다 보면 사건 간 형평성을 놓치게 될 수 있고, 사안들에 깊숙이 들어가다 자칫 잘못하면 어느 한 쪽의 입장에만 매몰되거나 판사의 권한을 넘어 사안에 개입하게 될 위험도 있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는 사건에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러한 거리두기가 지나쳐 사안을 형식적이고 납작하게만 바라보게 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 나가는 것이 매번 어렵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재판 절차, 원칙에 가깝게 운영하기
이런 어려움에 절절 매며 작년 형사 단독 재판을 맡았다. 사건이 많고 기일이 촘촘히 잡히는 형사 단독 재판의 특성상 특히 자백 사건은 1회 내지 2회 기일만으로 종결될 때가 많고, 다투는 사건들도 유무죄를 가리기 위한 심리 이외에 더 충실한 심리를 진행하기가 쉽지 않다.
그 속에서 내가 사건들을 지나치게 형식적으로 대하지 않으면서도 사안에 매몰되어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했다. 별 뾰족한 답이 나오진 않았다. 그래서 동료, 선·후배 판사님들의 노력을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여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재판 절차를 원칙에 가깝게 운영하는 것, 내가 보고 배운 바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피고인, 방어권 최대한 보장하기
우선 피고인의 방어권을 최대한 보장해 주기로 결심했다. 가능한 한 불구속 상태에서의 재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신경 썼고, 당사자의 의견을 들었을 때 다툼의 여지가 있거나 양형 자료를 수집할 필요가 있어 보이면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수 있도록 안내했다. 실질 심리가 최대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피고인과 검찰의 증인 신청 및 피고인 신문 신청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허가했다. 때로는 직권으로 증인을 불렀다. 절차 자체가 충실해질수록 나의 부족함에 대한 보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금은 불안이 사라지는 것도 같았다. 그럼에도 내내 머리 한 켠을 떠나지 않는 것이 있었는데, 피해자의 존재 그 자체였다.

사안의 본질 파악하기 위해 피해자 진술 필요
형사재판에서 피해자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의 고소로부터 시작된 사건들이 부지기수이고, 수사과정에서 취득된 피해자 진술은 제1의 직접 증거다. 객관적 수사자료에서 피해가 드러나고, 피해자가 제출하는 탄원서가 재판에 현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모든 자료들을 취합해도 범죄가 피해자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재판하는 현재 피해자는 범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살고 있는지, 피해자에게 있어 범죄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은 경우도 많다. 유무죄를 가릴 증거로서의 피해자 진술이 아니라 사안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하여 피해자 진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 진술을 듣자고 결심했지만, 생각보다 피해자 진술권을 보장하기란 쉽지 않았다. 법규에는 피해자 진술 절차가 규정되어 있으나 일단 피해자에게 진술권이 보장된다는 점을 알려야 피해자가 진술권 행사를 신청할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검찰을 통하거나 양형조사를 실시하는 등의 절차를 별도로 거쳐야 했다. 많은 경우 피해자가 양형조사를 통해 피해 상황을 진술하는 것으로 그치고 법정에서의 진술은 거부한다는 의사를 밝히지만, 어떤 피해자들은 법정 진술권 행사를 희망했다. 피해자로부터 진술권을 법정에서 행사하고 싶다는 의사가 확인되면 피해자 진술 기일을 별도로 잡아야 하는데, 이는 한 사건 당 증인신문을 한 번 더 진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백 사건의 경우에도 피해자 진술 의사 확인 절차를 거친 후 피해자 진술 기일을 지정해야 하니 재판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이 그만큼 늘어나게 된다. 그럼에도 피해자 진술을 듣는 방식으로 재판을 운용하니 작은 변화가 생기기도 했다. 검찰 측에서 먼저 피해자 진술 청취를 위한 기일 지정 신청을 하게 된 것도 그 변화 중 하나다.

피해자의 진술, 범죄 죄질 판단에 있어 필수적
피해자의 진술은 증언이 아니기에 증거자료로 삼지 못한다. 피해 진술이 아무리 절절하더라도 이를 근거로 법원이 기소된 죄명을 변경하거나 공소장 내용을 첨가하지도 못한다. 유무죄는 물론이고 양형에 있어서도 피해 진술 내용만을 이유 삼아 범죄 유형에 따른 객관적 양형 기준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형사재판의 본질이 (유죄로 입증된) 범죄 행위에 대한 적정한 책임을 지우는 것이라면 그 범죄의 죄질을 판단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범죄가 피해자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파악하는 것은 범죄의 죄질 판단에 있어 필수적일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피해자의 진술을 듣는 것이 내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 적정한 양형을 정하기 위해 비단 범죄 행위 그 자체뿐만 아니라 피고인의 삶 전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과 사이에 균형추를 올리는 것과도 비슷하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나의 형사 피해자 진술권 보장 시도는 여러모로 어설프고 소란스러웠다. 그럼에도 속 시끄러운 재판에 함께 참여하며 노력해주신 참여관님, 실무관님, 속기 실무관님, 경위님께 깊은 감사를 올린다. 형사재판에서의 피해자 진술권 보장이 보편적인 실무관행으로 자리 잡을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참고: 서두의 재판 사례는 특정을 피하기 위해 약간의 변형을 거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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