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필객 1] 어떤기억 추억인지? 악몽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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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5

테니스

낭만필객Ⅰ

글 김대만 사무관(제주지방법원)

어떤 기억
추억인지? 악몽인지?

어떤 기억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더니 수원법원에서 함께 근무했던 R선배의 딸이 법원직 50기로 합격한 것을 기념하여 얼마 전 가족들과 제주도 여행을 왔길래 같이 소주한잔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 나누다 보니 추억인지 악몽인지 모를 13년 전의 기억들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2009년 즈음, 난 테니스에 미쳐 있었다. 전국 동호인 테니스대회 우승을 목표로 새벽 5:20 타임에 레슨을 받았고 하루 8시간 정도를 1주일에 5일 이상 테니스를 했다. 테니스 경력 13년 6개월 중 9년 6개월을 새벽 레슨을 받았다. 그것도 모자라 주말엔 분당 수내동으로 왕복 3시간 걸리는 20만원짜리 특별레슨까지 받으러 다녔으니 지금 생각하면 미치지 않고서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R선배와는 2009년 수원지방법원 민사합의과에서 같이 근무했다. 나는 합의6부에서 초임계장으로, 지금은 과장님으로 승진하셨지만 R선배는 나보다 3기수 선배 고참계장으로 말이다. 당시 내가 테니스에 미쳐 있었던 것 마냥 R선배는 골프에 미쳐 있었다. 주말에 전국동호인테니스대회 나갔다가 예선탈락해서 풀이 죽어있던 어느 월요일 오전, R선배 왈 “야 김계장! 내가 알아보니까 테니스 전국대회 우승하기가 엄청 어렵다더라. 내가 보기에 넌 우승 못할 것 같으니까 포기하고 그 열정으로 나랑 골프나 하자. 그정도 열정으로 골프를 3~4년 하면 금방 싱글도 하겠다” 라며 염장을 질렀다. 나름 죽어라 열심히 하고 있는데 시합만 나가면 예선탈락이나 본선 1회전 탈락이라 자존감에 심한 손상을 입고 있었는데 옆에서 불을 질러대니 내 특유의 욱하는 성질에 “그럼 내기 한번 할까요? 내가 지금부터 1년 안에 전국동호인 테니스 대회에서 우승을 하면 R선배가 100만원어치 술을 사고, 만약에 우승을 못하면 제가 사고 어때요?” 평소 내기라면 사족을 못쓰던 R선배도 당근 오케이 했다. 그래서 바로 ‘100만 원 빵 내기’의 주요내용을 서면으로 작성해서 R선배와 나 그리고 당시 R선배 재판부 실무관이었던 G계장, 우리 재판부 실무관이었던 K계장 이렇게 네명이 모인 자리에서 각 조서도장을 날인한 약정서가 작성됐다.

1년이라는 시간이 긴 줄 알았다. 아니 1년이면 충분할 줄 알았다. 1년 정말 짧더라. 어떻게 1년이 그렇게 후딱 가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정말 죽자사자 테니스에 올인 했는데.....어떤 날은 새벽 세시반에 나와서 혼자 연습하다가 다음날 아침에 총무과에 불려가서 혼나기도 했는데.(전기세 많이 나오는 테니스장 전등을 혼자 켜놓고 연습했다고) 결국 약속한 날짜까지 우승을 못해서 R선배와의 약속을 이행하고 말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당시 법원근처에서 가장 핫 하다는 ‘신라갈비’에서 최고급 생갈비로, 내 기억으로 1대에(180그램) 48,000원짜리를 네 명이서 실컷 먹었더니 870,000원 나왔다. 그것도 ‘조니워커 블루’를 미리 도매상에서 사갔기에 그 정도지 만약 거기서 시켰더라면 훨씬 더 나왔을 뻔 했다. 맛있는 고기에 좋은 술을 곁들여서 즐겁게 먹고 마시는걸로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술이 과했는지 고기가 과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술을 마시면서 R선배에게 또 내기를 제안했다. 동일한 조건으로 한번 더 하자고. 결국 다시 한번 ‘100만 원 빵 내기’가 성사되었다.
다음날부터 어떻게 해야 우승을 할지에 대한 깊은 장고에 들어갔다. 자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지금 하던 대로 하면 우승할 수 있을까?’ 대답은 ‘노’였다. 지금 이대로라면 절대 안될 것 같았다. 물론 지금처럼 매일 렛슨받고, 테니스 동영상 보면서 이미지 트레이닝 하고, 1년에 30번 정도 전국대회 시합나가는 것 말고 다른 특별한 무언가가 필요해 보였다. 그래서 우승자들을 만날 때마다 어떻게 해야 우승할 수 있는지를 수없이 물었다. 여러 사람으로부터 받은 조언중에 내 가슴에 팍 와닿는 말이 있었으니, “대만아 전국대회 우승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단다. 될 듯 될 듯 하면서도 안되는게 우승이다. 난 우승하고 싶은 대회가 있으면 최소 보름 전부터는 술도 안마시고 와이프하고 각방 쓰면서 생활한다”라는 말이 귀에 쏙 들어왔다. 왜냐하면 그때 난 술을 너무 좋아해서 시합 전날에도 술을 마신적이 여러 번 있었기에. 그래서 결심했다. ‘전국대회 우승할 때까지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그러나 마음 한켠에서는 이런 안이한 생각도 들었다.
‘그동안 시합에서 16강까지는 몇 번 갔으니 술 안마시는 기간이 길어봐야 6개월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그때 그 생각이 얼마나 안이한 생각이었는지는 한참 뒤에야 알았다. 술을 안 마신다고 했으니 밖에서야 당연히 안 마시겠지만 제사 지낸후에 한 모금씩 하는 음복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음복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번 안 마시기로 했으면 술이란 술은 다 안 마시는거지 예외를 두면 결심이 무너질 것 같아 결국 음복도 거절하고 안 마셨다. 제사 지내고 나면 큰 사발에 모아놓은 정종을 덥혀서 환장하고 마시던 인간이 갑자기 안 마시겠다고 하니 가족들이 “너 어디 아프냐?”고 매우 의아스럽고 걱정스러운 눈길로 묻지만 차마 “테니스 우승 내기해서 그래요”라고 말하기도 민망해서 그냥 쭈삣쭈삣 하면서 “어제 술을 많이 마셨더니 속이 안 좋아서 그래요”라고 둘러댔다. 결국 음복까지도 한 모금도 안 마시고 테니스에 열중했다.

음복까지도 고사하는 절주는 물론이고 시합이 다가오면 와이프하고 각방을 쓰면서까지 최선을 다했건만 그해에도 준우승 한번 3등 한번으로 결국 우승을 못하고 약속한 시간은 허망하게 지나고 말았다. 이제 또 ‘신라갈비’에서 ‘100만 원 빵 내기’를 집행할 일만 남았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했던가. 난 “빨리 집행일자를 잡자”고 R선배를 재촉했지만 R선배는 그 이후에도 이리저리 미루면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내가 여러차례 독촉(?)을 했음에도 R선배가 이행을 하지 않아(추심포기? 자연채무?) 결국 두 번째 ‘100만 원 빵 내기’는 지금까지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마 R선배의 보이지 않는 배려였으리라. “R선배님! 감사허요. 대신 신라갈비 생고기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이번 제주도에서의 삼겹살 대접으로 너그러이 퉁쳐 주씨요.”

결국 우승은 그로부터 6개월이 더 지나서 이루어졌다. 술 끊은지 정확히 1년 6개월 뒤에. 술을 단 한잔도 안마신 날이 장장 1년6개월이나 이어진 셈이었다. 술! 이라면 환장하던 인간이, 냉면 사발에 소주 두병도 원샷하던 인간이, 코로나 발병 전까지만해도 동기모임에 가면 냉면사발 2개에 각 소주 한 병씩 따라놓고 “한잔은 제가 마실 것이요. 다른 한잔은 제가 얘기하는 동안 제일 시끄럽게 떠드시는 분한테 드릴 것입니다” 라고 한 후 하고 싶은 이야기 실컷해도 조용하다. 물론 얘기 끝나고 나면 한 사발은 내가 원샷하고 다른 한 사발은 제일 떠든 사람한테 벌주로 권한다.
이렇게 술을 좋아하고 사랑하던 인간이 1년6개월을....
술끊기 정말 힘들었다. 소주병에 날개가 달려서 나한테 날아오는 환상도 봤다. 배고플 때 사람들이 고기 한 점에 쏘주 한잔 하는 것을 보면 온몸이 바르르 떨렸다. 다른 사람들 다 술 마시는데 혼자 술 참는 것도 고역이었지만, 그동안 잘 마시던 놈이 왜 갑자기 안마시는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은 더 곤혹스러웠다. 그렇다고 죽을병 걸렸다고 거짓말 할 수도 없고.
임용되어 법원에서 근무한 26년 동안 1년에 평균 책 80권정도 읽었고, 하루에 신문 4개씩 읽었다(제일 많이 읽었을 때가 하루 11개 읽었었고, 지금은 7개 읽고 있다). 혹 여행을 하거나 일이 있어 읽지 못한 신문은 모아놓았다가 나중에라도 반드시 읽었다. 하도 신문 읽을 시간이 없어 차에 가지고 다니면서 운전하다가 신호대기 중에 읽기도 했다. 아이가 둘이니 나름 아이들도 케어해야 하고 와이프가 직장생활하니 가사도 나름 신경써야 했다.(물론 제 와이프는 성에 안 찼겠지만) 더불어 술도 마셔야 했고. 이런 와중에 매일 새벽에 레슨받고, 주말에도 레슨받고, 1년에 시합 30번 뛸려니 정말 부지런히 생활해야 했다. 아침까지 술 마시다가 바로 테니스장으로 레슨 받으러 간적도 여러 번이었다. 몸이 항상 피곤해서 잘려고 베게에 머리대면 30초내에 꿈나라로 안간 적이 거의 없었다. 차 운전하고 가다 신호대기 하면서 깜박 잠든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항상 시간에 쫓겼다.

그런데 테니스 내기로 인해서 술을 안마시면서 지내는 1년 6개월 동안 한가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술을 안마시니까 시간이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동안 내가 술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는지 술을 끊어보니 확연히 알게 됐다. 술을 끊은 해에는 처음으로 책도 130권 읽었다. 아이들 케어하고 집안일도 평소 하던 대로 다 해도 시간이 충분 했다. 과정은 이렇다. 1차 술자리에는 참석한다. 그런데 술은 안마시고 식사만 한다. 1차 끝나고 나면 나는 집에 별로 가고 싶지 않은데도 가라고 한다. 왜냐하면 내가 술도 안마시고 맨정신에 앉아 있으니 자기들이 부담스러운 거다. 그때가 대략 저녁 9시 정도다. 그때 집에 가도 이것저것 정말 많은 일을 할 수가 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알겠지만 술을 떡이 되도록 마시면 술 마신 당일 날도 새벽에 들어가니까 시간이 없지만 그 다음날도 몸이 피곤해서 아무것도 못한다. 그런데 술을 안마시니까 그 다음날도 피곤한 게 하나도 없으니 정말 많은 시간이 생겼다. 술을 참는 것은 정말 고역이었지만 어쨌든 그해 개인적으론 정말 많이 성장했다.

우승 이후로 술을 아예 끊을까 말까를 정말 많이 고민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자문을 구했는데, 결론은 ‘다시 마시자’였다. 다른 것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서라면 끊어야 했지만 술을 끊어보니 대인 관계에서 딱 2%가 부족함을 느껴서다. 술을 끊은 동안 아무리 점심을 자주 먹고 많은 얘기를 나눠도 저녁에 쏘주 한잔 하고 고주망태가 되어 건물 담벼락에 같이 소피 본 것만 못하더라. 하지만 술 끊었던 경험은 아직도 내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어 그전만큼 많이 마시지도 않을 뿐더러 단지 술 생각이 나서 마시는 술은 자제하게 됐고, 특히 술이 아까워서 남겨진 술 다 마시던 버릇은 이젠 없어진 듯하다. 진짜로 요즘은 아무리 아까워도 그냥 두고 온다. 집 근처에서 마실 때는 가끔 싸오기는 하지만....
그때 당시에도 시간의 쓰임이나, 술값으로 지출되는 돈의 절약이나, 절약된 시간으로 인하여 가족들이나 나 자신에게 더 충실할 수 있었던 시간들의 고마움을 느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되돌아보니 그때 이후로 내가 한층 더 성장했음이 확연히 느껴진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던 나에게 강력한 멘탈과 술의 의미와 무엇보다 시간의 소중한 쓰임에 대해서 큰 깨달음을 준 R선배님께 이 지면을 빌어 정말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더불어 아빠가 걸어온 30년 법원공무원의 길을 따라 걷게 될 선배님의 딸아이도 미래법원의 훌륭한 주역으로 성장하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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