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법원 이야기] 두번째 법원을 떠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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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07

법원이야기

두 번째 법원을 떠나며

홍기태 전 사법정책연구원장 (2020. 2. ~ 2023. 2. 재임)

2020년 2월, 7년 만에 다시 돌아온 법원의 상황은 전보다 암울하였다. 일부 사법행정권의 남용과 이를 틈탄 과잉 수사가 맞물려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졌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안타깝게도 사법신뢰의 추락과 사법부 구성원의 사기저하라는 큰 후유증을 남겼다. 아마도 한 세대는 지나야 정확한 평가와 회복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성실히 일하는 대다수의 법원 구성원들은 답답해하고 억울해한다. 법원과 재판에 대한 편견, 사실왜곡, 근거 없는 비난과 정치적 해석 등등에 대하여. 사법부를 존중하기는커녕 일방적으로 매도하는 행태에 한숨만 쉬고 있다.
우리나라가 더 심한 편이지만, 사법부에 대한 공세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판결에 대한 무절제한 공격과 법관에 대한 직접적 비난으로 법원 구성원들이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 비단 사법부뿐만 아니라 모든 공적 권위에 대한 부정과 불신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부정의 시대가 지나면 안정의 시대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그때는 법률지식과 자료의 생산, 축적, 접근이 법원을 비롯한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폐쇄적으로 이루어지던 시절이었다. 법적 정보와 소식의 전파가 특정 언론을 통해서만 가능하던 시기였다. 교육받고 선택받은 소수가 지식과 정보의 생산, 유통을 독점하면서, 법을 만들고 집행, 해석하는 일방적 권력을 행사하였다. 지식과 정보에서 소외된 다수의 시민은 이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복종하는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과거의 권위는 이런 구조 속에서 탄생하고 지탱되어 왔다.
하지만, 오늘날 보편적 교육을 받은 누구라도 법적 지식에 접근할 수 있고(정확성은 알 수 없지만), 누구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전파할 수 있는 도구를 가지게 되었다. 그야말로 지식과 정보의 팽창, 확산의 시대에 살게 된 것이다. 이제 나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는 판사라는 사람이 정의를 선언한다는 것 자체가 마뜩잖은 반권위주의 시대에 들어섰다. 이렇게 기존의 권위는 하염없이 무너지고 있지만 새로운 권위의 틀은 아직 형성되지 못한 과도기적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쯤에서 나올 법한 질문, 그래서 어쩌라구? 이와 같은 혁명적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법원사람들께서는 너무 초조해하거나 답답해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역사의 큰 흐름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민주적 국가가 존재하는 한 법원의 존속은 보장되고(존폐를 걱정하는 민간 기업에 비하면 얼마나 다행인가), 부정의 시대가 지나면 안정의 시대가 오리라 믿기 때문이다.

법원이야기

미래를 설계하는 법원의 모습 기대

걱정거리가 가득한 이때, 한번쯤은 먼 미래를 내다보며 방향타를 다잡을 필요가 있다. 사건처리에 급급한 법원의 특성상 과거의 일에만 매몰되기 쉽다는 점도 자각하면서.   두려워서 외면하고 싶지만 너무나 확실한 미래가 다가온다. 27년 후인 2050년을 기준으로 보자. 대한민국 인구는 4,700만 명 정도로 예측되어 인구수는 그런대로 유지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인구구조를 들여다보면 심각하다. 2050년의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는 전체 인구의 40%까지 증가하여 일본을 제치고 세계 1위의 초고령 국가에 등극한다. 25~55세의 핵심 생산활동 인구는 전체 인구의 1/3 이하로 떨어져 저성장의 늪에서 벗어나기 더욱 어려워진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초유의 위축사회가 도래하는 것이다.
법원은 재판을 기본 업무로 하고, 재판은 법원이 창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유입되는 일의 처리이다. 그 일의 많고 적음은 인구(당사자 수)와 경제 상황에 가장 크게 달려있다. 그 상관관계를 정밀하게 분석하기는 어렵겠지만, 급격한 인구 감소와 저성장 속에서 법원 사건만 증가하는 현상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2010년을 넘어서면서 이미 사건 감소의 조짐이 통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법조일원화 시스템 하에서 선발된 법관은 정년까지 대략 25년을 재직하게 된다. 신규 직원들도 평균 25년 이상 법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 기간 동안 서울 경인지역에서는 천천히 다가오겠지만, 그 밖의 지역에서는 상당한 사건 감소를 체감하게 될 것이다. 당사자와 민원인이 감소하면서 판사와 직원의 수가 줄어들고 청사 내 빈 공간이 생기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건은 감소하겠지만, 상속이나 후견, 유언, 신탁, 연금 등 노령인구의 증가에 따라 예외적으로 증가하는 사건 유형도 생겨난다.
이로써 분명한 것은 이제부터라도 법관이나 직원의 임용, 청사 신축, 전문화 등에서 이와 같은 상황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사법행정 책임자나 담당자뿐만 아니라 법원 구성원 전체가 이러한 변화를 이해하고 수용할 필요가 있다. 당장의 인력 확충이나 공간 확보, 법원 신설 및 신축에만 초점을 맞추다보면 언젠가는 과잉 인력으로 인하여 정년보장 시스템 자체에 상당한 위협이 닥칠 수도 있다.
더 높이 올라야 멀리 보이고, 멀리 보아야 많이 보인다. 인력의 공급이나 운영, 시설 확충, 전문성 확보 등 모든 면에서 눈앞의 이해에 급급하지 말고 긴 안목으로 구상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법원의 모습을 기대한다.

법원을 지키는 동료와 선후배에게 감사

봄날을 기다리던 금년 2월, 3년 동안 머물렀던 사법정책연구원장의 직을 내려놓으면서 다시 한번 법원사람들과 이별하게 되었다. 재판처럼 현안을 해결하는 역할은 아니지만, 법률과 재판제도, 실무의 개선을 이루기 위한 연구를 차근차근 해나가는 것이 사법정책연구원의 기능이다. 연구원장은 그러한 연구를 옆에서 지원(assist)하고 아래서 지지(support)하는, 그래서 위에 있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지내려 하였다.
돌이켜 보면 연구원장으로서 또한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저러한 사설(辭說)을 늘어놓는 시간이었다. 연구원의 방향을 설정하고 연구 과제를 선정하며 연구 내용에 대하여 코멘트를 하거나, 학술행사에서 인사말을 하고, 외부 기고・강연을 하는 등의 모든 일의 중심에는 그저 말과 글이 있었을 뿐이다. 30년 이상 법조인으로 살아온 기성세대로서, 미흡하고 부족한 법제도나 법현실에 대한 책임을 지거나 실천적 행동을 하는 데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별 수 없이 여기서 또 하나의 사설을 풀고 있지만.
60세의 전과 후를 사법정책연구원에서 보내면서 인생에서 공부나 지식도 중요하지만, 진정 필요한 것은 지혜와 인간존중이라는 생각이 깊어졌다. 지식이 쌓인다고 지혜로 전환되지는 않는다. 우리 가족을 지켜낸 것은 거친 말을 내뱉던 가부장 시대의 할아버지가 아니라 말없이 가족을 품에 안던 할머니였다. 우리 할머니들의 삶의 지혜는 공부를 통해 얻은 것이 아니다. 깊은 사랑과 관심, 배려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부디 법원사람들이 서로 보듬고 이해하면서, 지혜를 모으고 보태어 슬기로운 길이 열리길 기원한다. 법원 생활을 다시 마무리하면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 법원을 지키는 동료와 선후배들에게 감사한 마음, 그리고 그보다 더 무거운 미안함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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