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 스타일링룸에는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한 법원가족이 참여했다. 20살에 법원에 입사하여 올해로 40여 년간의 법원생활을 마치고 퇴직한 서울서부지방법원 민사신청과 김미라 전 행정관. 낮에 마트 가고 병원 가는 일이 아직은 낯설다는 그는 스타일링룸에 참여하며 다시금 법원에서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퇴직 후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아침에 1시간씩 집 앞에 있는 공원을 걷고, 스트레칭하고 들어옵니다. 다른 사람들이 출근준비로 분주한 시간에 한가롭게 공원을 걷는 제 모습이 아직은 낯설면서도 기분 좋고 온몸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신선하고 짜릿합니다. 아들 아침밥을 차려주고, 청소하고 쉬면서 TV, 인터넷 등을 보다 보면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금방 저녁때가 와요. 퇴직 전에 남편이 제게 “이제 퇴직하면 저녁밥 해놓고 기다리는 건가?”라고 물을 때 “무슨 소리?” 했는데 지금은 밥을 해 놓고 기다리진 않아도 남편이 빨리 들어오길 기다리기는 하네요. 저녁 식사는 항상 남편과 함께 만들어 먹어요. 아들도 일찍 들어오면 같이 먹고… 전에는 없던 일이에요. 또한 낮에 병원에 가고, 마트에 가고, 관리사무소 가는 등의 일들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법원에는 언제 입사하셨나요? 입사 후 맡아온 일들을 소개해 주세요.
서부등기소(당시 명칭)에서 부동산 등기 이기작업을 시작으로 법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녔기 때문에 졸업하면서 타자를 배우던 학원에서 갑자기 단체로 법원에 시험을 보러 간다고 하여 따라갔다가 유일하게 합격하여 정말 뜻하지 않게 시작한 법원생활이 평생직장이 되었습니다. 첫 발령이 등기업무였기 때문에 서울서부지방법원, 서울동부지방법원, 서울남부지방법원, 서울북부지방법원 등에서 약 15년 동안 등기업무를 주로 담당했고, 그 후에는 약식, 신청, 경매 업무와 법원공무원교육원, 가정법원, 사법연수원 등에서 근무했습니다.
발령 초기 법원 업무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을 텐데 근무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으세요?
법원생활을 40여 년 했지만 첫 근무지와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기억이 제일 또렷합니다. 모든 문서가 전자화된 지금과 달리 종이로 된 등기부책에 유리펜으로 먹물을 묻혀 한자로 기입을 하고, 기름종이에 철필로 글씨를 써서 등사하던 일, 글씨 쓴 사람마다 필체가 달라 글자를 알아내느라 전전긍긍하던 일, 등기부책을 찾는다고 현상금까지 걸며 야근하던 일… 아마 기록보존소에 있는 등기부책에는 아직 제 글씨도 남아 있겠죠?
직장생활 하시면서 동료들과의 추억도 많으실 텐데 떠오르는 소중한 인연들이 있으신가요?
지금까지 만남을 이어오고 있는 27~28년 전 (법원공무원교육원이 서초동에 있을 때) 함께 근무하던 7명의 여직원들과 2004년 가정법원 조사관실에서 가족처럼 근무했던 천사회 회원들이요. 오랜 시간 함께 할 수 있어서 더없이 기뻤습니다. 특히 마지막 근무지인 서부지방법원 행정관 후배들에게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선배라고 해 준 것도 없는데 모두들 저의 앞날을 축하해 주고 응원해 주어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더없이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법원에 계실 때는 주로 어떤 출퇴근 복장을 선호하셨나요?
움직일 때 부담스러운 옷은 사지도 않고 잘 입지도 않는 편이에요. 정장은 불편해서 잘 안 입었고요. 좋아하는 스타일은 잡지책에 나오는 보이시한 스타일의 옷이지만 사실 입어본 적은 없어요. 지금도 티셔츠, 청바지나 통바지처럼 편한 옷을 선호하지만, 때로는 과감하게 입기도 하지요. 여가시간에 아르헨티나 탱고를 추는데 그때는 조금 과감해지기도 해요. 춤을 춘 지는 16년 정도 됐어요. 나이에 비해 젊게 보는데 이것이 삶의 활력이 되는 것 같아요. 아르헨티나 탱고를 배우며 현지의 탱고 문화를 직접 접해보고 싶어 아르헨티나로 일주일 정도 여행 다녀온 기억도 나네요. 법원에서는 워낙 조용히 지낸 터라 제 취미가 아르헨티나 탱고라면 놀랄 분도 계실 거예요(웃음). 평소 옷차림도 튀는 스타일보다는 편하면서도 젊어 보이는 스타일을 선호해요. 하지만 여기에 뭔가 하나쯤 포인트를 살리죠. 컬러는 푸른색 계통을 좋아하지만 옷장에는 검정색 옷이 많은 걸 보면 무난하면서 편한 스타일로 입었던 것 같아요.
직장 다니면서 퇴직 후의 삶을 설계하셨나요?
특별히 플랜을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아직도 퇴직했다는 게 실감이 안 나거든요. 그저 긴 휴가를 즐기는 중이랄까? 매일 ‘9 to 6’의 생활이 몸에 뱄던 터라 그저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싶어요. 어떤 이들은 퇴직 후에도 무언가 일을 하거나 취미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지만 꼭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아요.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루하루가 평화로우면 좋은 게 아닐지…, ‘소확행’이라는 게 있잖아요.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일보다는 그동안 해 보지 않았던 취미생활과 여행을 계획하고는 있습니다. 퇴직기념으로 남편과는 북유럽 쪽으로, 동갑내기 학교친구들과는 코카서스로 가는 여행계획이 있고요. 찬바람이 좀 나면 근처에서 취미생활도 찾아보려고요. 기타도 치고, 댄스도 하고….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어 가족들도 좋아하시겠어요?
나이가 드니 남편이 주방일도 잘 해 주고, 없으면 서로 심심해요. 남편은 느긋하면서 여유가 있는 스타일이고 저는 정해진 규칙 안에서 움직이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라 결혼 초반에는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이제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든든한 동반자이자 가장 가까운 사이지요. 그리고 32세 장가 안 간 아들이 있는데요. 그동안 유학이다 지방근무다 해서 같이 지낼 시간이 별로 없어서 편했는데 마침 올해부터 서울근무를 하게 돼 세 식구가 자주 저녁 식사를 같이 하게 되었어요. 퇴직하고 아들 케어 하는 일이 생겨버렸네요(웃음).
법원에서 40여 년의 직장생활 후 퇴직하신 지금, 돌아보면 나에게 법원은 어떤 곳인가요?
법원은 나에게 생활 그 자체였어요. 고등학교 졸업 후 40여 년을 한결같이 다닌 곳이니까요. 그리고 타의 모범까지는 아니더라도 법원 직원으로서 책잡히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에 스스로를 삼가면서 저 스스로 도덕적 기준을 조금 더 단단히 세운 것 같아요. 그리고 이 답변을 하며 생각해보니 남편과도 법원에서 만났네요. 제 삶의 참 많은 부분에서 법원이 함께 했군요. 제가 법원에 들어온 지 약 5년쯤 됐을 때 남편은 당시 복학을 준비하며 법원 등기소에서 6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이후 남편이 대학 축제에 저를 초대하면서 이렇게 부부의 인연까지 됐죠.
법원가족 새내기나 한창 법원의 중추적 역할로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씀 한마디 부탁드려요.
편하고 즐겁기만 한 직장은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앞으로 직장생활을 계속하겠다’ 생각한다면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일에 연연하지 말고 조금 멀리 보며 ‘내가 조금 더 손해 보면 되지’ 하는 생각으로 스트레스받지 말고 지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건강하게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어느새 퇴직하는 날까지 오더라고요.
이번 스타일링룸에는 어떻게 함께하게 되셨나요?
퇴직 송별회에서 후배들이 그동안 해보고 싶었던 일 중에 못해본 게 뭐냐는 질문에 무심코 스타일링룸에 한 번 참여해 보고 싶었다고 말했죠. 그런데 그 말을 기억한 후배가 주선해서 갑자기 참여하게 되었는데 신기하고 설렙니다. 재직 중이었다면 아마 쑥스러워서 못했을 일이에요. 이런 기회를 만들어 준 진문희 행정관에게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퇴직하셨지만 <법원사람들>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법원가족들에게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정말 긴 시간을 함께 했던 ‘법원’이라는 곳이 이제는 낯설게도 느껴지지만 법원은 내 인생의 3분의 2가 이뤄진 곳이에요. 그동안 힘들었던 기억들은 하나도 안 나고 제 삶과 함께하며 제 삶을 유지하게 해준 제 유일한 직장 ‘법원’이 고마운 기억으로만 남네요. 이제는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 없는 법원…, 시간은 너무 빨리 가고 지난날이 그리워집니다. 열심히 일하는 법원가족 모두가 그만큼 보람 있고 행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취재 한경희 | 사진 김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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