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필객] 초대 지원장 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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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필객] 초대 지원장 분투기

2024.02.08

즐거운 세상 X 낭만필객 ❷ 초대 지원장 분투기

유영근 지원장(의정부지방법원 남양주지원)

중앙법원 형사합의부장을 하면서 롤러코스터 타는 것 같은 3년을 보냈다. 소송법에 따라 재판하고 증거에 따라 판결한다 생각했지만, 논평하는 입장에 따라 최우수 법관이 되기도 했다가 최악의 걸림돌 판사로 전락하기도 했다. 2021년 가을경 다음 임지를 지원하면서 재판에 지친 나는 사법행정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지원장, 그 중에서도 신설 남양주지원을 순위에 올렸다. 2월 정기인사에서 영광스럽게도 초대 지원장으로 발령났다. 들뜬 마음으로 하루인가 보냈는데 남양주에서 총무과장님이 찾아왔다. 개원준비단에 속해 이미 몇 개월을 보낸 과장님은 피로에 찌든 것 같은 표정이었다. 뭔가 한마디 하고 나서는 꼭 ‘그런데 말입니다….’를 덧붙였다. 다 기억나진 않지만 요지는 모든 것이 불균형(unbalance)이라는 취지였다. 그때부터 나의 2년이 분투적(adventurous)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은 들었다.

개원일인 2022년 3월 1일로부터 열흘쯤 전부터 남양주로 출근했다. 남양주시, 구리시, 가평군이 관할구역이고 인구가 100만 명 정도 되는데, 판사 10명, 직원 120명 정도 규모로 시작하게 되었다. 첫날 출근길부터 지원장실에 이르기까지 정말 행복했다. 교통정체도 없이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를 번갈아 타고 한강의 풍광을 감상하면서 서울 도심에서 불과 35분 만에 닿는 길이 아주 시원했다. 지상 8층, 지하 1층의 건물 외양이나 부지도 전통적인 법원 형태로 품위 있어 보였고, 5층 지원장실은 면적도 넓고 접견실, 내실 등도 갖추어져 웬만한 법원장실보다 좋았다.

주요 업무 중 하나, 건물 내 하자보수

건물 자체는 견고하고 큰 하자는 없었다. 하지만 디테일이 문제였다. 지원장실에 들어갔는데 7~8m 앞에 1.5m 정도의 콘크리트 벽이 가로막혀 아래가 안보이고 멀리 하늘만 내다보였다. 옥상 정원을 만들면서 공사업자들이 추락방지용 담을 쌓다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덕분에 나는 2년 내내 바깥 풍경을 보지 못하고 살았다. 바깥 담장은 없애되 건물 보안을 강화하는 방안 중 하나로 별채 직원 숙소에 창살을 달았는데 나중에 보고 구치감이냐고 묻는 사람이 많았다.
자재비를 포함한 공사비가 치솟고 예산이 부족해지면서 마감재를 저렴한 것으로 쓰다 보니 사소한 문제들이 계속 생겼다. 예를 들면, 그냥 홑겹 합판으로 만든 문짝들이 봄부터 뒤틀어져 아귀가 안 맞는 경우가 많아 일일이 덧대거나 목공을 다시 해야 했다. 비가 오면 바닥이 푹 꺼지는 곳들이 생겼고, 장마철에는 검찰청 쪽 기울어진 축대가 무너질까봐 전전긍긍하다 결국 추가공사를 하기도 했다. 나무가 죽고, 벽에 습기가 차서 곰팡이가 생기는 경우도 많았다. 점심 먹고 늘 한바퀴씩 돌면서 건물이나 조경에 문제가 없는지 살피고, 기간 내에 하자보수를 받도록 하는 것이 주요 업무 중 하나였다.

보람되고 재미 있는 일, 공간 이름 짓기

공간에 이름을 짓는 것은 보람 있고 재미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1층 카페 이름을 ‘여유당(餘裕糖)’으로 지었다. 남양주가 고향인 다산 정약용의 당호(堂號) ‘여유당(與猶堂)’에서 발음을 따온 다음 한자를 마음과 시간의 여유(餘裕)와 설탕 당(糖)으로 바꾸고, ‘이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고 적당한 당을 흡수해 활력과 너그러움을 되찾자는 의미’라고 써 붙였다.
직원 숙소의 이름은 ‘왕숙재(往宿齋)’라고 지었다. 구리와 남양주의 경계인 ‘왕숙천(王宿川)’에서 발음을 따온 것인데, 임금이 잠자는 곳이라고 하기엔 너무 과해서 임금 왕(王)을 갈 왕(往)으로 바꿨다.
‘이따금 가서 학문을 연마하기 위해 소박하게 지은 집’이라고 설명을 붙였는데, 막상 직원들은 ‘왕숙제’를 하고 가서 쓰러져 자는 집이라고 농담을 했다.
건물 뒤쪽 현관을 나가면 그늘진 공간이 있는데 그냥 두기가 아까웠다.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는 의자와 탁자를 4벌 정도 주문했는데, 없는 돈에 장만하다 보니 총무과에서 며칠간 드라이버로 조립을 해야 했다. 벽에다 ‘쉼터, 그늘’이라는 표지판을 하나 걸어놓으니 그럴듯했고, 봄가을에는 점심 먹고 들러 차를 마시는 아지트가 되었다.
1층 로비는 걸어 다닐 때마다 많이 아쉬웠다. 직원 공간과 민원인 공간을 구분하고 일일이 벽으로 구획을 하다 보니 건물 내부가 미로처럼 나뉘고 막혔다. 거기다가 종합민원실, 신청과, 법정 2개, 민원상담실, 은행, 카페 등 많은 것들을 배치하면서 공간이 옹색해졌고, 특히 현관 로비에 들어설 때 너무 좁고 낮은 느낌이 들었다. 여러 가지 개선 아이디어를 짜내긴 했지만 이미 세팅이 된 것을 개원 초기에 바꿀 수 없었고, 많은 숙제만 뒤로 남기게 됐다.

초기의 가장 큰 애로사항, 예산과 인원의 부족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건물과 관계된 것들은 대충 해결하거나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어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신설지원의 특성상 사람 수는 적고, 행사는 많고, 판사든 직원이든 모두 여러 가지 일을 겸직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 맡은 일에 불만이 많았다. 그나마 판사들은 출퇴근의 편의나 깔끔한 청사 사정 때문에 지원해왔지만, 직원들은 이미 극한의 업무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남양주가 기피대상이었다고 한다. 예산도 마찬가지였다. 청사관리를 위한 예산은 크게 부족하지 않았지만, 소속 인원에 따라 지급되는 기관업무추진비나 기타운영비 같은 것들은 정말 눈물 나는 수준이었다. 규모에 비해 사람 수가 아직 적기 때문이었고, 특히 개원 후 행사나 부서별 모임이 많은데 예산이 부족해 1년 내내 애를 먹었다. 고심 끝에 점심식사는 거의 구내식당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런데 5월쯤 돼서 구내식당 측에서 손을 들었다. 식수가 하루 50-60식밖에 안 나와 도저히 운영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하던 중 구리의 한 도서관 구내식당이 유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가보았다. 구내식당 치고는 비싼 6,000원짜리 점심을 제공하는데 웬만한 한식뷔페보다 나았고, 감동한 나는 바로 사장님과 협상에 들어갔다. 7월 1일부터 5,500원으로 정해서 우리 구내식당으로 들였는데, 시작하는 날부터 인기폭발이었다. 손 큰 사장님이 집밥 같은 음식을 푸짐하게 퍼주는 우리 구내식당은 민원인과 인근 사무실 직원들까지 몰리는 맛집이 되었고, 얼마 안 돼서 하루 평균 식수가 직원 수를 넘어섰다. 몇 달 후 사장님은 규모가 훨씬 큰 고양지원에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아직도 우리 직원들은 초대 지원장이 와서 제일 잘한 일이 구내식당 유치라고 하는데, 사실상 최대수혜자는 식비로 쓰던 개인 카드 비용이 현저히 줄어든 나 자신이었다.

남양주지원 조정위원회, 모범적인 체계 갖춰

조정위원을 모집하고 조정참여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각계의 추천을 받아 인품과 실력이 훌륭한 분들을 영입했지만, 처음에는 조정위원의 지위와 역할을 이해하는 분이 많지 않았다. 내가 직접 조정담당 판사를 맡아 매번 조정기일마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거나 차를 마시면서 근황도 듣고 의견도 나누었다. 이렇게 90여 분 모두와 친분을 쌓고 이해도를 높이다 보니 자발적으로 봉사하고자 하는 분들이 많이 생겼다.
열의가 있는 분들을 중심으로 조정위원회를 꾸리고, 내가 일일이 조정위원의 이력을 보고 분류해서 5개조로 나누고, 전문성이 있고 실적이 좋은 분들을 조장으로 배치했다. 각 재판부별로 조정위원 수요가 생기면 해당 조장들에게 통지하고, 조별 단톡방에서 참석 신청을 받아 위원을 배정하는 방식을 취했다. 몇 달간 시행착오를 거쳐 시스템을 완성하니 재판장이나 실무관들의 일이 많이 줄고 위원들에게 고른 참여 기회가 부여되면서 이른바 무늬만 조정위원들이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위원들끼리 친목도 도모되고, 조정위원회 전체 모임 뿐만 아니라 소모임도 종종 이루어졌다. 그런 모임이 있을 때는 꼭 나에게도 참석 요청이 왔고, 나도 기꺼이 참석하곤 했다. 이제 남양주지원 조정위원회는 시스템이나 자발적인 참여 측면에서 홍보해도 될 만큼 효율적이고 모범적인 체계를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과중한 업무부담에도 정은 쌓이고
지원장 2년차가 되면서 판사 18명, 일반직 포함 200명 정도로 인원이 보충되었고, 예산도 늘고 경험도 쌓이면서 한결 수월해지는 듯했다. 그런데 문제는 사건 수의 폭증이었다. 단적으로, 미제사건 수가 민사단독 1인당 700건, 형사단독 1인당 600건에 이르러 판사들마다 타 법원의 1.5배에서 2배 가까운 사건부담을 안게 되었다. 나는 판사들에게 저녁 회식을 하자는 말도 잘 하지 못했고, 사건처리를 독려하는 말은 애초부터 2년 내내 꺼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8월 인사에서 판사 1명이 줄면서 그 일을 나눌 수밖에 없었는데, 나의 경우 기존의 사법행정과 가족관계등록 및 조정전담, 약식명령 외에 재산명시, 공시최고, 제소전화까지 맡게 되면서 함께 일하는 실무관만 해도 7~8명이 되었다. 작년에 비해 직원들의 업무는 중복이 해소되고 다소 경감되어 표정들이 한결 밝아졌는데, 판사들은 증원보다 몰려오는 사건 수가 현저히 늘어 오히려 더 힘든 표정이 되었다.하지만 지원장 입장에서 가용한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아서 참 답답했다. 나름 진심을 다해 귀 기울이고, 판사나 직원들의 일을 단순화할 수 있는 방법을 다소 강구하긴 했지만 그래도 늘 힘들어 하는 판사들과 직원들이 많아 임기 내내 미안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2년이 다 되어 가면서 판사들이나 직원들도 이런 고충을 이해하는지 가끔은 나를 오히려 안쓰러워 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지난 12월 29일에 몇 명의 직원들이 다른 법원으로 떠났다. 2년간 먼지를 뒤집어쓰고 고락을 함께 했던 역전의 용사들을 떠나보내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법원에서 환송식을 많이 하지만 떠나보내면서까지 이래보긴 처음이다. 아마도 나 역시 떠날 때가 가까워서인지 요즘은 법원 안에서 추억이 깃든 것을 보기만 해도 생각하기만 해도 울컥할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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