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필객] 나의 올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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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필객] 나의 올레 이야기

2024.02.08

즐거운 세상 X 낭만필객 ❶ 나의 올레 이야기

글 백인숙 행정관(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평소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나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날이 좋아서 밖으로, 날이 흐려서 밖으로, 갖은 이유를 붙여서 틈만 나면 집 밖으로 나갔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사회적 거리두기로 외부 활동이 뜸한 틈을 타서 개인위생을 철저히 하며, 뭐든 혼자 하는 것에 거부감이 없던 나는 홀로 쏘다니기를 감행하였다.
그런 모습을 옆에서 보던 단짝 친구가 제안을 해왔다. “혼자 다니는 거 괜찮아? 그러지 말고 나랑 제주 올레길 다니지 않을래? 당일 한 코스 정도는 가능하대. 가고 싶은데 혼자는 못 하겠고, 같이 할 사람이 아무리 생각해도 너뿐이다.” 뜬금없이 시작된 말 한마디에 우리의 제주 올레길 투어는 시작되었다.
‘올레’란 제주 방언으로 큰길에서 집의 대문까지 이어지는 좁은 길을 말한다. ‘제주 올레’는 제주도를 한 바퀴 걸어서 여행할 수 있는 제주특별자치도 둘레길이다. 주로 해안을 따라 길이 나 있으며 총 437킬로미터, 스물일곱 개 코스로 조성되어 있다.
우리는 2019년 5월 1코스를 시작으로 열세 개의 코스를 완주하였다. 날이 좋아서, 날이 흐려서, 비가 와서, 바람이 불어서, 혼자여서, 둘이어서 좋았다. 각 코스의 매력과 제주의 매력은 우리를 올레길로 다시 불러들인다. 그동안 다녔던 열세 개 코스의 간단한 정보와 그날그날 적어둔 메모를 중심으로 그때의 소중한 감정을 떠올려 보려 한다. (나열 순서는 탐방 순서이다.)
나에게 여행은 놀이이고 내 삶을 나답게 살아내는 방법 중 하나이다. 나의 삶을 살기 위해, 놀기 위해, 즐기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 첫 번째가 제주 올레였다.

1코스 총길이 15.1Km, 소요시간 4~5시간, 난이도 중(2019년 5월)
올레길을 걷는 첫날이라, 두려움과 설렘이 같이하였다. 차 없이 뚜벅이로 제주를 다니는 것도 낯설었고, 올레길 표시인 리본을 보는 것도, 길잡이 조형물 간세를 보는 것도, 올레 방향을 알려주는 화살표를 보는 것도 낯설었다. 하지만 아담하고 예쁜 시흥초등학교에서 출발하는 1코스는 두 개의 오름과 성산포의 들판과 바다와 함께하며, 성산일출봉과 우도를 바라보고 걷는 매력적인 코스였다.

14코스 총길이 19.1Km, 소요시간 6~7시간, 난이도 중 (2019년 11월)
올레 짝지의 음력 생일과 나의 양력 생일이 만나는 신기한 날 우리는 다시 올레길을 찾았다. 시작점의 스탬프를 포부도 당당하게 찍고 열심히 걸었다. 저지에서 월령에 이르는 평화로운 들과 숲, 그 속에서의 짧은 휴식으로 숨을 고르고 걷고 또 걸었다. 잠깐의 쉴 곳도 음식을 먹을 곳도 없어, 갈대숲을 이쁜 식당인 양 햇살을 눈 부신 조명인 양 약간의 간식으로 허기를 달랬다. 긴 여정에 지쳐갈 때쯤 만난 동네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인적이 없고 돌이 많아 힘들고 무서웠던 코스를 6시간 만에 완주하여 도착 스탬프를 찍었다. 코스는 힘들었지만, 도착지 한림항에서의 석양은 하루의 피로와 뼈마디의 고통을 잊게 하였다.

10-1코스 총길이 4.2Km, 소요 시간 1~2시간, 난이도 하 (2021년 3월)
봄이면 온 섬에 청보리 파란 물결이 일렁인다는 가파도의 봄소식을 듣고 제주의 청보리가 보고 싶어서, 급작스레 스케줄을 잡아 홀로 여행을 떠난 곳이다. 청보리축제 기간이라 많은 인파로 가파도를 제대로 누리지는 못하였지만, 파란 하늘 아래 파란 청보리와 노란 유채가 가득했던 가파도는 삶의 여유를 즐기게 해주었다. 축제 기간에는 방문 시간이 ‘가파도 선박’ 운항표에 따라 정해져 있어서, 아쉽지만 올레 코스만 걷고 가파도를 떠났다. 배에서 내린 후에는 근처에 있는 ‘본태박물관’과 ‘방주교회’에 다녀왔다. 물과 빛을 이용하는 건축가 안도 타다오의 설계로 유명한 곳이다. 코스가 짧은 날에는 올레길 근처의 다른 곳을 경험하는 묘미도 누리게 되었다.

5코스 총길이 13.4Km, 소요 시간 4~5시간, 난이도 중 / 6코스 총길이 11Km, 소요 시간 3~4시간, 난이도 하 (2021년 11월)
시작부터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다. 생각보다 수월한 코스로 여유 있게 카페도 즐기고 모래밭에서 파도도 즐기며 바다를 옆에 두고 걸었다. 길이 편해서였는지 5코스를 일찍 마무리하게 되어 6코스 중간까지 하루에 한 코스 반을 끝내기로 하고 열심히 걸었다. 가을이라 생각보다 날이 빨리 어두워졌다. 숲길의 으스스한 분위기에 잔뜩 긴장하고, 중간에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던 덩치 큰 남자 올레꾼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의 눈치를 보며 핸드폰(무기로 유용하겠지)을 만지작거리며 뛰듯이 빠져나왔다. 올레길은 해 떨어지기 전에 빠져나와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7코스 총길이 17.6Km, 소요 시간 5~6시간, 난이도 중 (2022년 4월)
동백, 유채, 산벚꽃, 야생화, 산새 울음소리, 도시와 바다와 수풀의 어울림. 어렵지 않은 길을 참 오래 걸었다. 오래 걷고 싶을 만큼 참 좋은 길이다. 분명 봄인데 겨울에 피는 동백꽃도 보았다. 동백꽃 팔찌도 하나씩 착용하며 더없이 여유로움을 즐긴 코스였다.

3코스 총길이 14.6Km, 소요시간 4~5시간, 난이도 하 (2022년 6월)
따스한 봄에는 수국이지. 단짝 친구와 쿵짝이 맞아 수국을 찾아 제주로 갔다. 다행히 올레길을 조금 벗어난 ‘혼인지’라는 곳에서 수국이 만개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코스를 살짝 틀어 수국을 보고 올레길 투어를 하기로 하였다.
혼인지는 제주의 혼인 설화가 전해 오는 곳으로, 제주 돌담길과 전통 혼례관도 있었다. 수국을 원 없이 보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가끔 나타나는 차량도 반갑고, 올레꾼도 반갑고, 한적하고, 조용하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 지르고, 도로 가운데로 다니고, 우비를 입고 걷고, 벗고 걷고, 뛰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수국과 같이했던, 날씨가 도와줘 운치 있는 길로 기억되는 올레길이다.

1-1코스 총길이 11.3Km, 소요시간 4~5시간, 난이도 중 (2022년 11월)
갈 때마다 새롭고 갈 때마다 좋은 곳 제주. 우도 올레길은 하나부터 열까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내어주었다. 맑은 하늘부터 파란 바다까지 모든 것이 도와준 하루였다. 우도의 억새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전해주었고, 잔잔한 바다와 파란 하늘은 11월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따뜻한 날씨 속에 행복한 하루를 알차게 보냈다.

13코스 총길이 15.9Km, 소요시간 4~5시간, 난이도 중 (2022년 12월)
날이 춥다는 기상예보에 긴장했지만, 걷기에는 좋은 날씨였다. 저지예술정보화마을과 한라산 어귀 산길을 조용히 걷고, 특전사 병사들이 길을 만들었다는 숲길은 투덕투덕 걸었다. 지난 14코스에서처럼 먹거리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씩 챙겨 간 간식으로 중간중간 허기를 채웠다. 길고 지루한 길이었으나, 코스 마지막에 있던 오설록 티뮤지엄의 따스한 차 한 잔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였다. 무리해서 계획을 잡으면 몸도 마음도 고생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코스였다.

14-1코스 총길이 9.3Km, 소요시간 3~4시간, 난이도 하 (2023년 1월)
겨울의 꽃인 동백 보러 출발~! 올레 투어를 하면서 동백을 보려고 짧은 코스를 선택하였다. 동백 군락지 방문을 위해 차도 빌렸지만, 전날의 추위와 많은 눈으로 예쁜 동백은 보지 못하였다. 가끔 제주가 우리의 방문을 시샘하는지, 이번 여행의 목적인 동백은 눈이 많이 내리는 바람에 다 떨어져 버렸다. 차로 이동하여 생긴 여유로 한라산 1,100고지의 상고대도 보고 눈도 많이 보고 왔으니 아쉬움은 덜자. 편하게 짧게 알차게 다녀왔으니 그래도 제주는 우리 편이지. 여행은 항상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그 틀어짐 속에서의 우연과 불확실성은 새로운 것을 만난다는 매력과 설렘을 선사한다.

10코스 총길이 17.56Km, 소요시간 5~6시간, 난이도 중 (2023년 3월)
봄의 전령사 유채꽃을 보기 위해 우리는 또다시 일정을 잡았다. 지금 가야 유채가 이쁘다며, 없는 시간을 짜내서 올레길을 다시 찾았다. 화순 금모래해수욕장에서 흐린 날씨로 출발했지만, 우리의 길을 따라 날이 개면서 노란 유채꽃도, 파란 하늘도, 파란 바다도 모두 예뻐지기 시작하였다. 역시 제주는 우리 편이다. 노란 유채꽃의 색이 밝게 빛나고 웃음이
나고 노래를 절로 흥얼거리니 마냥 신나고 마냥 좋은 하루였다. 산방산 앞에 펼쳐진 유채꽃밭에서, 우리는 3월 달력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잔뜩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으며 추억의 장을 만들었다.

15코스 총길이 13Km, 소요 시간 4~5시간, 난이도 하 (2023년 5월)
제주의 정겨운 마을과 밭, 작은 연못, 울창한 난대림, 두 개의 오름이 있다고 했지만, 우리는 15코스의 A, B 중 조금 쉬운 B 코스를 선택하여 걸었다. 천둥 번개와 먹구름과 장대비와 부슬비도 올레길을 같이 걸으니, 억수같이 내리는 소낙비에 카페로 피신하고, 바닷가에서 간식으로 도넛을 먹다가 우두두 쏟아지는 소낙비에 또 카페로 피신하였다. 올레길의 변화무쌍함을 카페에서 즐기며 비를 피하게도 되었고, 유유자적 이동하며 오로지 올레길의 여유를 만끽한 하루였다.

16코스 총길이 15.8Km, 소요시간 5~6시간, 난이도 중 (2023년 9월)
멋진 구름이 드리운 바닷길, 오르락내리락 항파두리 토성길을 다녔다. 옛 선인들은 이 토성을 만들려 얼마나 애썼을까. 그 많은 흙을 짊어지고 이 길을 걸었을 텐데…. 잠시 감상에 젖어본다. 길이 그리 어려운 것도 힘든 것도 아니었지만, 뜨거운 햇살에 지쳐갔다. 가져온 간식으로 연명을 하고, 마침내 올레길 완료 스탬프 찍을 때는 너무 힘들어 만세를 불렀다. 매번 제주 시골장이 궁금했던 차에 이번 코스에서는 날짜도 장터도 맞아 오일장에 다녀올 수 있었다. 장에서 간식도 먹고 먹거리도 사 왔지만, 이것이 진정 제주 작물일까, 의문은 피할 수 없었다. 올레길이 끝나고 먹은 식사는 오일장에서의 맛있는 간식을 그림의 떡으로 만들었다. 코스가 끝나면 무조건 밥집을 찾기보다는 그다음 일정을 위해 한 번 더 생각을 해야겠다. 오일장 갈 때는 빈속으로 가야지, 현금 들고 가야지 다짐을 하며 마무리했다.

* * *

지금까지 다닌 코스를 되짚어보고 남아 있는 코스를 확인하면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걸 실감한다. 그동안 편한 길 위주로 골라 다녔는지, 오름이 하나씩 또는 두 개씩 있는 코스들이 남아 있다. 체력 단련을 다짐하며 다시 제주의 올레길을 생각한다.
나에게 제주 올레는 만기를 앞둔 적금통장과 같다. 비행기 가격을 알아보고, 예매하고, 스케줄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기대와 설렘은 시작된다. 날짜가 다가오면 날씨를 확인하고 그달의, 그날의 적당한 코스를 선택하고,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찾아가며 단짝과 조율을 하고, 사전 지식을 습득하고, 때로는 혼자 갈까 생각도 하며 여행의 기대에 부풀어 하루를 보낸다.
둘레길, 성곽길, 순례길, 우정길, 황톳길… 지역마다 걷기를 위한 다양한 길이 조성되어 있다. 가까이 있는 길들을 마다하고 제주의 올레길을 찾는 것은 제주의 산과 바다, 오름과 숲, 마을과 도시를 하루에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으며, 눈으로 담고 마음으로 담으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나만의 추억이 되기 때문이다. 제주의 올레길은 나에게 최고의 행복을 주며, 그 행복이 그리워서 나의 제주올레 투어는 계속 진행 중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10년 후 나의 퇴직 기념으로 제주 한 달 살기를 계획 중이다. 지금은 올레길만 다니고 있지만, 나의 계획을 위해서라도 제주를 더 많이 알고 싶다. 아는 만큼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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