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껏 에세이2] 이별 후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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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에세이2] 이별 후의 시간

2022.06.09

이별 후 시간

마음껏 에세이 2 I 이별 후의 시간

글 박은진 판사(수원가정법원)

이별 후의 시간

나는 5년 전에 부모님을 잃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잘 하지 않는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이 친정에는 언제 가느냐고 인사처럼 묻곤 한다. 나는 일부러 숨길 의도는 아니지만 물은 사람을 무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 또는 그저 설명하기 귀찮아서‘아 네 가야죠’ 하고 대충 얼버무리고 만다.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더욱 내 앞에서 부모님이 언급될 만한 이야기 자체를 삼간다. 그것이 나를 배려해서임을 잘 안다. 그러나 언제나 마음 한편에서는 죽은 이들에 대해 실컷 말하고 싶은 알 수 없는 충동이 일었다. 이것은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후의 시간들과, 내가 잃은 또 한 친구에 대해 오랫동안 쌓아 두었던 이야기이다.

준비되지 않은 부모님과의 이별
두 분은 비슷한 시기에 암 진단을 받았다. 평생 담배를 입에 대지 않은 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아빠가 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순탄했던 인생이 뒤늦게 뒤통수를 세게 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빠는 ‘괜찮다 금방 나을 거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고, 엄마의 간병도 혼자 하셨다. 나도 늘 낙천적이고 활기찼던 아빠의 말을 주문처럼 외며 잘 될 거라고 믿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나쁜 결말을 떠올리기 두려워서 그저 그 말을 믿고 싶었던 것 같다. 아빠는 한때 잘 이겨내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한 번 컨디션을 잃자 예전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나빠졌다. 건강만 나빠진 것이 아니라, 마치 작별을 알고 준비하는 사람처럼 외모도, 성격도 변한 모습이었다.
아빠는 오월에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서 아빠를 아는 많은 이들이 각자 품고 온 추억들을 들려주고 갔다.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은 장례식이 모두 끝나 손님들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장례 버스에서 내릴 때였다. 날이 참 따뜻해서 ‘아 이제 여름이네’ 하는 생각이 무심하게 스쳤고, 나는 아빠를 잃었는데 세상은 멀쩡하게 잘 돌아가고 날씨도 끝내주고 ‘거참 너무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삼우날 물건을 정리하러 아빠가 30년 넘게 운영했던 작은 병원에 갔다. 어릴 때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접수대를 곧장 지나 노크도 없이 진료실 문을 열고 아빠를 부르면 아빠가 오냐 하고 돌아보았던, 떠올리기만 해도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나는 듯한 곳이었다. 한동안 아무도 드나들지 않아 방 안에 가라앉아 있던 먼지가 오랜만의 인기척에 일어나 춤추는 것이 늦은 봄 오후의 햇빛에 비쳐 보였다. 책상에는 아빠가 방금 벗어놓은 듯한 가운과 슬리퍼, 쓰다 만 메모지와 볼펜, 글씨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그제야 달라진 것은 이 방의 주인뿐이라는 실감이 났다.
엄마는 아마 혼자 남은 집에서 깊은 고독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아이 키우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에게 전화하는 것을 점점 게을리하게 되었다. 어쩌면 자꾸만 우울하고 짜증스러워지는 엄마를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맥없이 떠나버린 아빠를 원망하면서도 혼자 오래오래 잘 살고 싶지는 않으셨던가 보다. 결국 엄마는 아빠가 돌아가신 지 딱 석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부모와 어떤 식으로 작별하게 될지 살면서 궁금해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아주 평범한 주말 아침에, 임종을 지키기는커녕 다음날이 되어서야 엄마가 이미 없다는 사실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나는 엄마의 영혼이 세상을 떠나고 있었을 시각에 아무것도 모른 채 씻고 휴대폰을 하고, 드라마까지 보고 잠들었다. 오빠에게서 밤늦게 부재중 전화가 온 것을 보았지만 늦었으니 내일 전화해 보지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시각이었다.
내가 하나뿐인 엄마의 장례를 보지 못하게 될 거라고는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그때 둘째 아이 예정일을 열흘 앞둔 만삭이었다. 겉으로는 남편과 오빠가 만류해서 어쩔 수 없이 서울에 남았다고 말했고, 다들 잘했다고 위로했지만 결국은 그럴듯한 핑계였다. 내 몸과 내 자식부터 챙기느라 부모와의 마지막 인사를 할 기회를 포기했다는 사실은 그 후에도 오랫동안 죄책감으로 남았다. 어쨌든 일상생활은 해야 했고, 엄마를 잃었다고 아이를 울면서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실제로도 24시간 내내 불행한 것은 아니었다. 큰아이와 눈을 맞추면 억지로 짜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었다. 놀이터도 가고 택배도 주문하고, 누군가를 만나면 농담도 했다. 둘째도 힘들지 않게 낳았다. 이럴 때 친정엄마가 없어 어쩌냐고 걱정하는 소리에 ‘요새 누가 산후조리를 친정에서 해요’ 하고 받아넘기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잠깐씩 혼자 있는 시간이 나면 어김없이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엄습했다. 그럴 때면 멀쩡하게 살고 있는 평소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인격으로 나누어지는 것 같은 괴리감이 들었다.

시간이 멈춘 이들을 기억하며
부모님을 잃은 다음 해 봄에 원래 다니던 경주지원으로 복직했다. 경주는 어릴 때부터 벚꽃을 보러 가족들과 자주 나들이하던 곳이었다. 그 해에도 벚꽃 핀 경주는 너무나 화사했지만, 나는 이 아름다운 풍경을 함께 볼 수 없는 이들만 자꾸 생각나서 꽃구경을 즐겁게 할 수 없었다. 마치 내 인생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다시는 예전처럼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그늘처럼 드리워졌고 그 그늘을 걷어낼 수 없었다. 말 못하던 아이들은 시간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나를 엄마라고 부르는데, 나는 이제 엄마라고 부를 사람이 없었다. 어렸을 적 나와 신기할 정도로 닮은 딸을 보여주며 엄마는 그때를 기억하느냐고 묻고 싶지만 무슨 수를 써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들을 먹이고 재우며 일상으로 돌아가 소소한 웃음을 짓다가도 문득 죽음이란 과연 절대적인 차단임을 매번 새롭게 절감해야 했다. 다시는 만날 수 없고, 전화도 할 수 없다. 그것이 나에게 남겨진 명백하고 잔인한 사실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오후에 거실에 앉아 볼이 통통하게 빛나는 아이들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본다. 내 몸에서 태어나 새싹처럼 싱그럽게 피어나는 어린 생명. 말 그대로 봄날 같은 나의 다음 세대를 볼 때면, 이렇게 나를 지켜보았을 젊은 날의 내 부모가 떠오른다. 그들의 시간은 멈추었고, 나는 아직 살아서 그들을 기억하는 시간을 소화해 내고 있다. 그들의 기념일은 생일에서 기일로 바뀌었다. 부모를 잃은 후부터 나는 내가 떠난 후에 아이들이 살아갈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버릇도 생겼다.

잊을 수 없는 또 한 사람
그리고 잊을 수 없는 또 한 사람. 2020년 9월에 사고로 세상을 떠난 내 친구, 웃음소리가 무척 컸던 김영주 판사. 1년간 한 방에서 지내다가 육아휴직을 했던 나는 휴직 중에도 영주 언니와 카톡으로 아이들과 남편 이야기며 법원 이야기를 자주 했었다. 육아로 고민하는 내게 영주 언니는 추석에 강원도로 여행가니까 연휴 지나고 한번 보자며 만날 약속도 잡았다. 그리고 그 대화가 끝이었다. 그는 자기 목숨보다 아꼈던 아들과 함께 고성 앞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한동안 우리 법원 사람들은 갑자기 떠나버린 친구에 대한 언급 자체를 피했던 것 같다. 어쩌다 영주 언니에 대해 이야기할 일이 생기면 그저 조금 글썽글썽해진 눈으로 우리 그때 재미있었지, 하고 웃으면서 말할 뿐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어김없이 아무도 말을 잇지 않는 침묵이 여백처럼 잠시 머물렀다. 시간이 흘러 영주 언니를 공유했던 사람들은 인사이동으로, 각자의 사정으로 하나둘씩 흩어졌다. 사람들이 들고 나는 자리에 빈틈이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영주 언니의 빈자리도 묻혀 희석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러다가도 서글픈 생각은 예고 없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출근길 라디오에서 영주 언니가 좋아하던 장범준 노래가 나올 때, 함께 자주 갔던 닭갈비 집에 갔을 때. 큰아이 초등학교 입학식 날, 우리 아이와 동갑이었지만 영원히 여섯 살로 남게 된 어린 친구 생각이 나서 등등. 기억의 기습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비극, 그 사이사이에 채워지는 작고 즐거운 날들
세상에 애달프지 않은 죽음이 있겠으며, 살면서 한 번쯤 아끼는 이의 죽음을 치러 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 스스로도 어렵고, 읽는 사람도 고통스럽게 만들 어두운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것일까. 그 마음이 어디서 나오는지 아직 모르겠다. 다만 나는 가족을 잃고 긴 터널 같은 시간을 그럭저럭 잘 견디다가도, 어느 날 갑자기 길 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내 심정을 토로하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여러 번 겪었다. 사람을 잃은 후에 드는 감정은 꼭 널뛰기를 하는 것 같아서, 어떤 날은 아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비현실적이다가 또 어떤 날에는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날카롭고 새삼스러웠다. 그런 마음을 참을 수 없는 날에는 버스를 타고 부산까지 가서 오랜만에 만난 선배 앞에서 다짜고짜 엉엉 울기도 했다. 하지만 대개는 불쌍해 보이고 싶지 않아서, 혹은 막상 이야기할 데가 마땅치 않아서 혼자 삭히고 말았다. 그리고 영주 언니가 떠난 후 남은 사람들에게서도 나와 같은 표정을 보았다. 각자 일상을 잘 살아내고 있으므로 굳이 슬퍼질 이야기를 먼저 꺼내지는 않지만, 어쩌다 언니 이야기가 나오면 의외로 다들 반가운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이들의 마음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는 떠난 이에 대해 함께 이야기할 기회가 남아있을 때 좀 더 실컷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척의 문상을 가던 또 다른 날 오빠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이렇게 큼직한 비극들과, 그 사이사이에 딱 비극을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작고 즐거운 날들로 채워지는 것 아닐까.

미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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