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순간들1]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테마가 있는 글

2021.06.04

나의아저씨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 드라마 <나의 아저씨>와 법원생활에 대한 짧은 담소 -

글. 이무룡, 이종인 판사(청주지방법원) 사진출처. tvN <나의 아저씨> 홈페이지

※ ‌이 글은 청주지방법원 형사합의부에서 좌, 우배석으로 함께 일하게 된 필자들이 지금까지 생활하면서 나누었던 대화를 기초로 작성한 대화문입니다. 대체로 기존 대화를 재구성하였으나 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추가로 나눈 내용도 있습니다.
※ ‌이하에는 2018. 3. 21.부터 2018. 5. 17.까지 tvN에서 방영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9년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극본상 수상작)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무룡(우배석, 이하 ‘우’) : 안녕하세요, 판사님~ 법관 임용되시고 청주 부임하신지 벌써 2달이 지났네요. 시간 참 빠릅니다... 법원생활은 좀 어떠신가요, 괜찮으세요?
이종인(좌배석, 이하 ‘좌’) : 판사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은 많이 어색하네요ㅎㅎ 형사합의를 맡아서... 불과 몇 달 전까지는 국선변호인으로 선처만 구하다가 이제는 형을 선고하려니 막중한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우 ● 그렇죠, 아무래도? 저도 2년 차 때 서울남부에서 형합을 할만큼하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청주에 와서 다시 해보니 또 새롭습니다. 저보다 경력도 많고 보다 훌륭하신 우배님과 함께 계셨으면 초임 생활 시작이 더 편하셨을 텐데 죄송할 따름이네요.
좌 ● 그런 말씀 마셔요ㅎㅎ 이미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우 ● 저보단 부장님께서 잘 지도해주시는 것이 절대적이죠. 앞으로 더 분발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업무 끝나면 보통 뭐하면서 보내시나요?
좌 ● 저는 뭐 특별한 건 없고 와이프랑 소소하게 시간 보냅니다. 같이 자전거를 탄다거나, 야식 먹는다거나, 드라마 본다거나ㅎㅎ 판사님은요?
우 ● 후후, 소박하지만 부러운 신혼생활이네요. 저는 아직 혼자다보니 취미도 혼자 할 수 있는 걸 찾게 되는데 최근에 핸드폰 바꾸면서 넷플릭스가 연계된 요금제를 쓰게 되어서, <나의 아저씨>라고 아이유 나오는 드라마 얼마 전에 다 봤네요.
좌 ● 어, 나의 아저씨요!? 저 그거 한 3번인가 봤는데ㅎㅎ
우 ● 정말요? 3번씩이나!? 진짜 인생 드라마 하나 봤다고 생각했거든요. 역시 사람들 보는 눈은 다 비슷한가... 그럼 말 나온 김에 드라마 얘기 좀 나눠볼까요?
좌 ● 좋습니다ㅎㅎ
우 ● 제일 먼저 얘기할건 뭐니 뭐니 해도 여주 이지은, 그러니까 아이유가 아닐까 하는데요. 정말이지... 예전에 KBS 드라마 <프로듀사>에서의 연기가 워낙 인상적이었는데, 이 작품에서 보여준 모습은 그걸 넘어 가히 충격 그 자체였어요. 얼마 전에 배우 공유씨도 비슷한 취지의 인터뷰를 했더라고요.
좌 ● 그렇죠. 저도 원래부터 가수 아이유의 팬이기는 했는데 드라마를 보면서 팬심이 더 두터워졌습니다.
우 ● 이지은이 맡은 이지안(이름도 비슷하네요)은 참 불행한 소녀죠? 엄마는 가출했지, 돌아가신 아버지의 빚 떠안았지, 청각장애가 있는 할머니 돌봐야지... 거기다가 중학생 때 사채업자에게 폭행당하는 할머니를 구하기 위해 정당방위로 그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기까지 하고, 죽은 사람 아들이자 대를 이어 사채업자인 남자⑴한테 계속 쫓기고 맞고... 말하기만 했는데도 진이 빠지네요. 보기 드문 비극적인 캐릭터를 배우로서 경험이 많다고 보기 어려운 이지은이 완벽하게 소화해낸 것 같아요.
좌 ● 맞습니다. 이름인 지안(至安)은 ‘편안함에 이르다’라는 뜻인데 실제 삶은 이름과 정반대죠. 그런데 이지안 뿐만 아니고 이 작품에 나오는 대부분의 인물들이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네요.

나의아저씨

우 ● 누구보다 우선 이선균이 연기했던 남주 박동훈이 떠오르는데요.
좌 ● 그렇죠. 건축구조기술사라는 자격증에다 나름 대기업 부장 달고 월 5, 600씩 벌지만, 그 뒷면에는 대학 후배⑵이자 자기 부인⑶이랑 바람난 회사 대표가 자기를 자르려고 하지, 형하고 동생은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해서 홀로 어머니 챙겨야지.⑷ 이지안만큼은 아니지만 오히려 삶의 무게는 훨씬 현실적으로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오죽하면 이지안으로부터 ‘성실한 무기징역수’라느니, 불쌍하다느니 하는 말까지 들었을까요.
우 ● 그러게요. 일단 주인공들 얘기를 했으니까, 서사를 한번 살펴볼까요? 제일 중요한 내용은 박동훈과 이지안의, 뭐라 정의내리기 힘든 상호 의존관계와 그를 통한 삶의 회복이겠죠? 그 밖에 ① 박동훈이 다니는 회사 내의 암투, ② 박동훈, 도준영, 강윤희 사이의 삼각관계, ③ ①과 ②에 대한 이지안의 개입, ④ 박기훈과 최유라⑸의 로맨스와 상호 성장, ⑤ 삼형제의 우애와 동네 친구들과의 우정, ⑥ 승려 겸덕⑹과 정희⑺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정도로 정리할 수 있으려나요.
좌 ● 인정사실...인가요?
우 ● ....죄송합니다. 습관적으로...
좌 ● ㅋㅋ 아닙니다. 잘 정리해주신 것 같아요. 이제 40대에 들어선 저로서는 서사에 스며들어있는 우리네 아저씨들의 애환과 인생살이가 남일 같이 느껴지지 않았네요. 작품 제목은 거기에서 연유했으려나요.
우 ● 그렇네요. 어찌 보면 가장 중요한 작품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겠어요. 서사를 토대로 좀 더 얘기를 나눠볼까요? 우선 사내 권력다툼이나 불륜 같이 흔한 소재를 약간은 색다른 방식으로 풀어나갔다는 점에도 작품만의 매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좌 ● 네, 맞아요. 회사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박동훈과 도준영이 동시에 불륜에서의 삼각관계를 구성하기도 하고, 거기에 이지안이 박동훈 핸드폰을 도청하는 등으로 개입하는 구조가 몰입감을 높였던 것 같습니다.
우 ● 도청이라는 설정은 처음에는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극 후반부에 가서는 그야말로 핵심적인 소재가 되죠. 박해영 작가의 전작인 <또 오해영>에도 미래예지라는 다소 무리한 설정이 있었는데 그걸 무난히 활용해가는 걸 보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어요.
좌 ● 엇, 같은 작가인가보네요? 전 몰랐어요.
우 ● 생각보다 모르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등장인물 이름이 같거나 비슷한 데에서 생기는 이벤트나 뽀글머리를 한 사연 있는 골드미스 캐릭터는 작가의 시그니처인 것 같아요.

나의아저씨

좌 ● 오해영도 꼭 챙겨봐야겠어요. 다시 돌아와서, 말씀하신대로 박동훈이 주변인들과 나눈 대화를 이지안이 도청한 것이 이지안 본인은 물론 박동훈이 삶을 회복하는 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우 ● 그렇죠. 도청을 통해 듣게 되는 박동훈의 윤리의식과 사람됨, 그리고 자신에 대한 지지, 응원이 그런 걸 받아 본 적 없던 이지안을 어둠에서 빛으로 끌어낸 것 같아요. 특히 후반부에 박동훈이 도청사실을 알고도 핸드폰에 대고 ‘이지안, 전화 줘’라고 말하는 장면은 지금 떠올려도 전율이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로 박동훈이 이지안이 한 나쁜 행동을 알게 됐을 때마다 ‘괜찮다’고 말해주는 장면들에서는 죄사함이나 구원 같은 기독교적인 메시지들을 떠올려보았네요.
좌 ● 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판사님 말씀을 전제로 한다면 동시에 승려 겸덕을 통해 불교적인 메시지들이 전해지는 것도 참 재밌어요. 작가님이 동서양, 종교를 아우르는 삶에 대한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걸까...
우 ● 마치 우리가 무슨 평론가들이라도 된 것 같습니다ㅋㅋ 암튼 뭐 그 정도로 작가의 많은 고민이 담긴 것이겠죠. 우리가 깡치 판결을 쓰듯...
좌 ● 역시 창작의 고통이란...ㅠ
우 ●일 얘기가 나왔으니 잠시 강윤희 얘기를 해볼까요? 한국 드라마에서 늘 빠지지 않는 변호사 캐릭터죠? 강윤희 방에 꽂혀있는 눈에 익숙한 법서들이 작품 몰입에 좀 방해가 되기는 했었어요. 저거 수험생 때 봤던 사례집인데... 이러면서요ㅋㅋ
좌 ● ㅋㅋ그렇죠. 극화된 법조인의 모습은 늘 오글거려서... 근데 극중에서 변호사라는 직업이 가지는 의미가 크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강윤희는 불륜녀로서의 역할이 주된 것이었죠. 그렇지만 작가가 나름 불륜의 핑계거리를 설정해두긴 했네요.

나의아저씨

우 ● 네, 남편인 박동훈에게는 마땅히 지켜야 할 어머니, 형제들 그리고 친구들이 강윤희에게는 숨을 막히게 하는 환경이었죠. 실제로 중간중간 강윤희가 창문을 열고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장면들은 도준영과의 불륜이 오히려 숨 쉴 공간이 되었음을 설명해주는 것도 같아요.
좌 ● 그러고 보면 확실히 작품 분위기가 대체로 무거웠네요... 그나마 형 박상훈의 궁상맞은 모습이나 박기훈, 최유라의 로맨스가 밝은 분위기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마냥 그러기만 했던 것은 아니지만...
우 ● 네, 왕년의 명감독이었으나 최유라와 영화를 찍다가 쫄딱 망한 박기훈과 그 때 너무 많이 혼나서 슬럼프에 빠진 최유라는 사실 원수지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둘 사이에서 로맨스가 생긴 게 아이러니이기도 하고... 암튼 최유라를 맡은 권나라는 뛰어난 미모로 워낙 유명하고 박기훈을 맡은 송새벽의 능청스러운 연기도 원래부터 유명했으니까요.
좌 ● 저는 특히 최유라가 자존감이 바닥 친 상태를 ‘구겨졌다’고 표현하면서 박기훈보고 ‘펴 달라’라고 말한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제 초임생활이 구겨지면 부디 판사님이 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ㅜㅜ
우 ● 제 코가 석자인데요ㅠ 서로 잘 펴가면서 생활해보시지요ㅎㅎ
좌 ● 오늘 덕분에 짧게나마 참 재밌게 대화 나눴습니다. 저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이지안의 모습이 조금씩이지만 밝아지는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졌는데, 부디 이제 시작하는 저의 법원생활도 앞으로 그러하였으면 좋겠네요...
우 ● 판사님 정도의 인품과 실력이라면 그러고도 남으실 겁니다. 함께 하는 남은 시간 저도 열심히 노력해보겠습니다ㅎㅎ
좌 ● 감사합니다. 참, 판사님. 이거 투고하면 원고료를 준다는데, 반씩 나눠가지면 되려나요?
우 ● 벌써부터 탐나네요(입맛 다심). 그래도 좀 참았다가 부장님 모시고 고기라도 드시는 건 어떨까요? 우리에게 이렇게 짧게나마 대화 나눌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있는 것도 늘 배려해주시는 부장님 덕분이니.
좌 ● 오오... 좋습니다. 코로나 좀 잠잠해지면 한번 도모해보시죠!
우 ● 기대되네요ㅎㅎ 아무튼 판사님, 부디 법원생활 내내 편안함에 이르시기를 기원드립니다.
좌 ● 네, 부디 판사님도 그러하시길.

※ 이 글을 읽어주신 법원가족 여러분도 모두 편안함에 이르시길 바랍니다.

⑴ 이광일(장기용 분)
⑵ 도준영(김영민 분)
⑶ 강윤희(이지아 분)
⑷ 형 박상훈(박호산 분), 동생 박기훈(송새벽 분), 어머니 변요순(고두심 분)
⑸ 권나라 분
⑹ 박해준 분
⑺ 오나라 분

"테마가 있는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 2 3 4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