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이야기]듣기 좋은 소리를 위한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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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이야기]듣기 좋은 소리를 위한 고민_목소리와 발음

2018.03.02

이야기

뉴스 보도를 전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듣는 이에게 신뢰감을 준다. 명료하면서도 똑 부러지는 말투는 타고난 목소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신뢰감 주는 목소리는 어떻게 다듬어지며 목소리의 이미지를 만드는 요소와 방법은 무엇인지 알아본다.

좋은 목소리란 무엇인가

2012년 미국 노스이스턴 주립대학 연구팀은 흥미로운 실험을 진행한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뉴욕타임스 신문 기사를 소리 내어 읽는 사람들의 영상을 3분 동안 보여주고 누가 똑똑하고 능력 있는지 가늠해보라고 주문했다. 참가자들의 90% 이상이 정답을 맞혔는데, 판별 기준은 좋은 목소리와 적은 오독(誤讀)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쯤 되면 우선 이런 생각에 다다르게 된다. “좋은 목소리를 가지려면 어떡해야 하나?” 맑고 낭랑한 목소리는 우선 눈에 띄며 칭송을 듣는 일이 잦다. 그러나 따뜻하고 정겨운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 악기로 따지면, 쨍쨍 울리는 바이올린 소리와 오보에의 깨끗한 음향은 정신을 일깨우지만 듬직한 첼로의 움직임과 플루트의 온유함은 우리를 편안하게 만드는 미덕이 있지 않은가.

아나운서도 그렇다. 기름지고 매끈한 음색은 라디오 뉴스나 스포츠 중계에 제격이다. 혼잡하고 시끄러운 차 안에서 특히 그 위력은 빛을 발한다. 그러나 토크쇼나 인터뷰 프로그램에서는 부담스럽기 일쑤다. 외려 그저 평범하고 수수한 음색의 아나운서가 진행해야 맛이 더 나는 법이다. 그러니까 목소리의 관건은 음색이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목소리를 좌우하는 요소는 다름 아닌 발음이라는 생각이다.

모임에 가면 보통 구석 자리에서 가만히 있는 편이지만, 인사를 나누거나 대화에 어쩔 수 없이 끼게 되는 경우가 있다. 직업이 아나운서라고 하면, 상대의 반응은 “어쩐지 목소리가 좋으시다 했더니만 그러시군요.” 대개 그 어름이다. 그러나 목소리가 좋은 게 아니라 발음이 비교적 정확하고 명료한 편이라고 해야 이 33년 차 아나운서를 향한 얼추 걸맞은 평가일 것이다. 여기가 바로 중요하고 흥미로운 지점인데,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은 차지고 옹골찬 발음을 지닌 상대를 쉬 뭉뚱그려 좋은 목소리의 소유자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결국, 타고난 목소리를 갖고 어떻게 해야 좋은 목소리로 만들지 고민할 것이 아니라 발음을 다듬고 벼리는 노력을 꾸준히 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고 더 윗길이란 말이다.

좋은 발음의 첫걸음, 모음의 정확한 음가 내기

한국어는 단모음 10개와 이중모음 11개, 총 21개의 다양한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걸 제대로만 소리 내도 근사한 발음의 종결자로 대우받을 것이다. 모음을 구사하면서 자신의 입 안의 공간의 폭이 넓혀졌다 좁혀졌다 하는 것을 많이 느낄수록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음가를 온전히 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정제되고 가다듬은 소리가 필요한데, 바로 조용한 지적(知的) 야망이 게재되는 대목이다. 이지적인 사람은 자신의 목소리와 발음에 민감하다. 이들은 자신의 목소리가 일부러 꾸민 상태가 아닌 바로 그 직전, 다시 말해 딱 적절하게 매력적인 정도의 임계점까지 곰비임비 연습해온 부류라고 할 수 있다. 수업 시간의 책읽기서부터 문학의 밤에서의 시 낭송, 가곡을 부를 때의 노랫말 전달까지 다른 사람들이 별 관심을 안 갖는 분야에도 열과 성을 쌓아온 사람들인 것이다. 금속의 제련 과정처럼 목소리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올곧은 발음의 강도와 순도를 높이는 과정을 체화한 덕분이다.

마무리로, 반듯한 정통 아나운서라면 반드시 탑재되어 있는 필살기를 공개하고자 한다. 사실 우리 모두가 소싯적에 다 배운 것인데 허투루 여기고 홀대했다. 그 가치를 못 알아본 탓이다. ‘밤’과 ‘밤:’, ‘눈’과 ‘눈:’ ‘말’과 ‘말:’은 어떻게 구별되었던가? 주저 없이 먹는 ‘밤’, 어두운 ‘밤:’, 보는 ‘눈’, 내리는 ‘눈:’, 타는 ‘말’, 입으로 하는 ‘말:’은 또 어떠한가? 구미어(歐美語)가 악센트와 인토네이션(Intonation; 억양)이 발달해 있다면 한국어는 음의 길이, 즉 장단음(長短音)이 리듬감과 전달력을 살린다. 표준발음의 영역은 자음과 모음, 음의 길이, 받침의 발음, 음의 동화, 경음화, 음의 첨가에 관한 것으로 나뉘는데, 이 중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가장 깊은 관련성을 갖는 부분은 음의 길이다. 즉 개별 단어의 장단음을 제대로 살려야 텍스트에 기전(氣轉)을 일으키면서 자연스러운 호흡과 리듬이 장치(裝置)된다고 볼 수 있다.

음의 장단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우리말

우리 고유어 용언(用言)들의 장단에 따른 의미 구분 예들이다. 이걸 모르거나 무시하면 뜻이 혼란스러워질뿐더러 읽기와 말하기가 건조하고 강퍅해진다.

우리말

위에서 보듯 한자어 체언도 마찬가지다. 장단에 따라 뜻이 심지어 반대로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더 오묘하고 매력적인 대목이 있다. 바로 장고모음(長高母音) 셋의 존재감이다. ‘ㅓ:’와 ‘ㅕ:’와 ‘ㅝ:’, 이 세 모음은 혀와 입 모양이 달라지면서 독자성을 띠는 것이다. 이 모음들은 혀의 조음(調音) 위치가 올라가고(그래서 ‘고모음’이다), 자연스레 입은 아래턱이 약간 앞으로 나가면서 위쪽으로 모아지게 된다. 아래의 예들이다.

장고모음

재미를 붙여 자꾸 찾고 익히면 가능하다. 무엇보다 외워야 할 것, 지켜야 할 것이라는 강박과 구속이 아니라 내 읽기와 말하기를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강력하고 고마운 툴(tool) 내지는 스킬(skill)로 인식하면 좋을 것이다. 베토벤, 모차르트의 빼어난 음악이 악보 속에만 잠자고 있다면 헛일이듯 최고의 우리 유산 한글이 정확하고 아름다운 한국어로 구현(具顯)되지 못하면 불행한 일 아니겠는가.

글 강성곤(KBS아나운서실 방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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