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삶 _국제형사재판소에서 보낸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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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나의 삶

들어가며
국제형사재판소 소장을 지내신 송상현 전 재판관님, 대한민국의 판사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재판관에 선출되어 재직 중이신 정창호 재판관님, 구 유고 전범재판소에서의 풍부한 재판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형사재판소 당사국 총회 의장 선출을 확정 지으신 권오곤 전 재판관님의 활약으로 국제형사재판소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은 굉장히 높은 편입니다. 반면 우리나라 내에서는 국제형사재판소의 재판에 대해 지금까지 그리 큰 관심이 기울여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대량 인권침해 사태에 대한 최고책임자를 국제형사재판소에 회부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국내에서도 조금씩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기 시작하였고, 저 역시 그러한 계기로 국제형사법에 대하여 조금씩 공부를 해나가던 중 2016년 9월 1일부터 2017년 8월 25일까지 국제형사재판소에 파견되어 1심 재판부에서 Visiting Professional의 자격으로 근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제 역할은 재판연구관들의 업무를 지원하는 것으로, 주로 재판 절차와 관련된 법률 쟁점이나 특정 증인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재판연구관들이 작성한 결정문·보고서에 대한 검토 의견을 제시하였고 때로는 결정문의 초안을 직접 작성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재판이 진행되는 법정에 재판연구관들과 함께 배석한 경험이나 재판관들의 중간합의에 참석하였던 경험은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과 도쿄 전범재판은 이른바 국제형사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처벌하기 위한 재판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또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1990년대에 구 유고 지역과 르완다에서 일어난 종교·인종 갈등과 대량 학살의 책임자를 단죄하기 위하여 설립한 구 유고전범재판소와 르완다전범재판소는 국제형사법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러나 사후처벌의 소급효 논란을 불식시키고, 나아가 향후에 이처럼 잔혹하고 인류 보편의 가치에 반하는 범죄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예방적 효과까지 도모하기 위해서는 그때그때 임시재판소를 설립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상설국제형사재판소가 필요하다는 국제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98년 6월 15일부터 7월 17일까지 개최된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에 관한 유엔 전권외교회의(로마회의)는 치열한 토론을 거쳐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Rome Statute of the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을 채택하였습니다. 이후 로마규정은 60개국의 비준으로 2002년 7월 1일 자로 정식 발효되었고, 현재는 우리나라를 포함한 124개국이 당사국으로 가입되어 있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인도에 반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 전쟁범죄(war crimes), 집단살해죄(crime of genocide), 침략범죄(crime of aggression)를 관할대상범죄로 삼고 있는데, 아직 침략범죄에 관한 조항은 발효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국제형사재판 절차의 몇 가지 특징
국제형사재판 절차의 세세한 모든 부분에 대하여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몇 가지 인상 깊었던 부분에 대해서 간략히 말씀드려보겠습니다.
우선, 어떻게 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공정한 재판을 위한 노력입니다. 로마규정의 서문에서는 “국제공동체 전체의 관심사인 가장 중대한 범죄”를 범한 자들이 “처벌받지 않는 상태를 종식시키고, 이를 통하여 그러한 범죄의 예방에 기여”하는 것을 그 목표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에 형사사법기관의 목적이 유·무죄를 가리는 것이 될 수는 있어도 어떻게 ‘불처벌의 종식’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을까, 이러한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하는 것은 자칫 국제형사재판에서의 유죄추정이라는 위험한 발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실제 재판소에 가서 관찰해본 결과 국제형사재판소 또한 여타의 형사법원과 마찬가지로 무죄추정의 원칙과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에 대하여 깊은 주의를 기울이며 재판을 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로마규정에서는 소추관에게 피의자에 대한 유죄의 증거뿐만 아니라 무죄의 증거까지도 수집하도록 하는 객관의무를 부여하고 있고, 엄격하게 운용되는 증거개시 절차 속에서 유·무죄의 증거는 모두 피고인에게 적극적으로 개시되어 피고인의 방어를 위한 증거와 정보로 활용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습니다. 재판소의 첫 번째 사건인 Lubanga 사건의 재판부는 소추관이 피고인의 무죄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개시하지 않은 것을 이유로 하여 공판 절차의 정지를 명하고 피고인의 석방을 명하였을 정도로, 증거개시는 재판소에서 주요한 쟁점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재판의 투명성을 증진하기 위한 재판소의 노력입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각국이 형사사법주권을 조금씩 양보한 결과로서 설립될 수 있었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재판소가 합리적이고 정당한 방법으로 재판을 진행해나가지 않는다면 언제라도 그러한 양보는 철회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재판소는 그 절차를 공정하게 진행하는 데 노력을 기울일 뿐만 아니라 공정하게 진행하고 있다는 점을 널리 알리는 데 마찬가지의 노력을 해야 합니다. 권오곤 재판관님께서 자주 인용하시는 법언 중에 “Justice should not only be done, but should be seen to be done”이라는 영국 판례의 법언이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국제형사재판소의 상설법정은 범죄발생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하고 있어서 실제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이 자칫하면 절차로부터 소외될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도 재판의 결과뿐만 아니라 그 진행 과정을 널리 알릴 필요가 매우 큽니다. 이러한 이유로 국제형사재판소는 재판 공개의 원칙을 법정뿐만 아니라 법정 밖으로까지 확대, 비공개 심리절차를 제외한 모든 재판을 인터넷을 통하여 전 세계에 30분 지연 중계하고 있습니다(지연 중계를 하는 이유는 재판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당사자나 증인이 비공개 정보를 언급하는 경우가 있어 방송에서 이 부분을 삭제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판결은 물론 재판 중간에 이루어지는 절차에 관한 결정을 함에 있어서도 그 이유를 구두 또는 결정문으로 상세히 밝히고자 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형사 절차 내에서의 피해자의 참여 보장과 피해 회복을 통하여 회복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재판소의 노력입니다. 구 유고전범재판소나 르완다전범재판소와 같은 임시국제형사법정에서는 피해자에게 독자적인 지위나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던 반면, 로마규정에서는 피해자의 구제를 국제형사재판의 중요한 목표로 인식하였고, 피해자를 능동적인 절차 참여의 주체로 인식해야만 그러한 피해 회복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아 피해자의 재판절차 참여권과 피해배상 신청권을 인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재판 절차에 대한 참여를 허가받은 피해자들은 자신들이 공동으로 선임하거나 재판부로부터 지정받은 피해자 변호인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관심사항을 재판부에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또 금전배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피해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이 단순히 명목상의 절차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피해자들의 관점을 반영한 절차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재판부뿐만 아니라 소추부, 사무국 산하의 여러 피해자 관련 부서가 피해자 지원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법조 종사자들의 국제형사재판소 진출 필요성
재판소에서 1년을 보내면서 여러 가지 배운 것도 많았지만, 그 못지않게 우리 사법부 구성원들의 성실성과 우수성은 그 어느 나라 출신의 법률가 및 직원들과 비교해보더라도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제형사재판소에의 한국인 진출은 아직 매우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1,000명에 육박하는 재판소의 전체 인력 중 한국인 출신 정직원은 디지털 포렌식 전문 수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홍일영 수사관님 한 명에 불과한데, 우리나라의 국제형사재판소에 대한 재정기여도를 감안하면 적어도 12명의 한국 출신 정직원을 더 뽑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합니다. 재판소에는 재판관들을 보좌하는 재판연구관이나 검사, 피해자 변호인뿐만 아니라 재판지원 또는 사법행정과 관련된 다양한 직역이 존재하므로, 우리 사법부에서 쌓은 근무 경험과 지식 또한 재판소에서 근무할 수 있는 충분한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국제사회의 보편적 가치 실현에 대한 열망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 사법부 구성원들에게도 파견법관 제도뿐만 아니라 국제기구 고용휴직과 같은 제도를 활용하여 국제형사재판소 근무에 도전해 볼 것을 권유해드리고 싶습니다.

송상현 전 소장님 방문 당시 재판소 로비에서.
왼쪽 끝부터 장지용 판사님(HccH 파견), 김휴리 인턴, 필자, 홍일영 수사관님, 송상현 전 소장님, 정창호 재판관님, 이유선 검사님(ICC 파견), 이충호 인턴,
강종선 부장판사님(주 네덜란드 대사관 파견)

Ongwen 사건에서의 재판 진행 모습.
재판관석 앞의 재판연구관석 맨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필자.

글_ 홍진영 춘천지방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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