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삶 Ⅰ]성경,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많이 읽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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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3

1996년 10월 나는 서초동 사법연수원1)에서 근무했다. 사법연수원 당직 근무는 서울법원종합청사와는 별도로 편성됐다. 당직 근무의 핵심인 영장 업무가 없었으니, 서울법원종합청사 당직 근무가 타조 알이라면 사법연수원 당직은 메추리알 정도로 부담이 가벼웠다. 당직실에 홀로 누워 귀 기울이면 방구들 아래로 지하철 3호선이 덜커덩거리며 지나갔다. 불과 1년 전인 1995년 6월 29일 청사 건너편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50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후였으므로 ‘한밤중 처녀귀신 출몰 조심’이라는 괴기한 소문이 떠돌던 시절이었다. 그즈음 창밖을 내다보면 뭔가 지나가는 것이 언뜻언뜻 눈에 보였다. 바람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건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월이었다.

어느 겨울밤, 초저녁에 당직 순찰과 당직 근무 일지 작성을 마치고 찰스 디킨스2)의 책을 펼쳐 들었다. 성경,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전 세계 독자가 많이 읽었다는 명성에 빛나는 《두 도시 이야기》3)의 첫 문장은 과연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프랑스혁명의 광기를 그린 역사소설이자 숭고한 사랑 이야기였다. 제목의 ‘두 도시’는 파리와 런던을 가리킨다. 현시대의 바빌론이라고도 하는 메가시티 뉴욕도 있지만, 뉴욕은 원주민의 피와 눈물 위에 건설된 정복 도시일 뿐 역사와 전통과 문화적 유산의 무게는 결코 파리와 런던에 미치지 못한다. 소설은 억울하게 프랑스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됐던 마네트 박사, 그의 아름다운 딸 루시, 스스로 샤를 에브레몽드 후작이라는 신분을 버리고 영국에서 살아가는 찰스 다네이와 능력을 펼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변호사 시드니 카턴을 중심으로 혁명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군상이 벌이는 사건을 밀도 있게 그렸다. 찰스 다네이는 선대 에브레몽드 후작 형제가 소작인에게 행한 악행으로 말미암아 혁명군에 체포돼 단두대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찰스의 부인 루시를 사랑하는 시드니 카턴은 자신의 추억 외에는 아무도 자기와 함께하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러나 오직 루시의 행복을 위해 찰스의 목숨을 구하고 대신 기요틴4)의 칼날 아래 이슬처럼 사라졌다. 카턴의 언빌리버블한 행동에 대해 말은 힘이 모자라고 묘사는 초라한 것이 될 뿐이었다. 역사적 사실과 대비된 소설적 서사(敍事)가 깊은 여운을 남겼다.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우리가 도망쳐왔던 모든 사랑에 바치는 눈물 같은 디킨스의 이야기를 읽으며 보낸 그 겨울 당직실의 밤이 지금도 그립다.

세월은 흘러 2011년부터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회생위원 업무를 담당했다. 개인회생절차 가운데 회생위원이 진행하는 면담 시간이 있다. 이 면담을 통해 채무자 본인의 과오가 아니라 주변 사람 또는 외적인 여건 변화로 떠안은 과도한 부채 때문에 곤경에 처한 채무자가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파산한 것은 물질일 뿐 채무자의 인생이 아닌데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가엾은 채무자를 보면서, 삶과 우주5)에 대한 궁극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미 ‘삶, 우주 그리고 모든 것(Life, the Universe and Everything)’에 대한 해답을 내놓은 이가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 컴퓨터 ‘깊은생각(Deep Thought)’6)이 오랫동안 숙고한 결과 나온 답변이었다.

“FOURTY TWO”
물론 이 답을 이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컴퓨터도 애초에 궁극의 질문을 모르는 상태에서 해답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궁극적인 질문을 알기 위해 ‘깊은생각’의 설계로 우주에서 첫째가는 컴퓨터인 지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사실 ‘42 ☞ The answer to life, universe and everything’에 대해 원작자 더글러스가 이미 사망했으므로 이제는 누구도 그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다만 ‘*’의 아스키 코드가 0101010인데 10진법으로 고치면 42가 되며, ‘*’는 ‘와일드카드’ 문자로 모든 것을 나타낸다. 또한 42를 이진법으로 변환한 101010에서 1을 양, 0을 음으로 하여 괘를 만들면 화수미제괘(火水未濟卦)7)가 된다. 이것이 육십사괘의 마지막 괘로서 미완성된 상태, 변화무쌍하게 흘러가는 우주의 모습을 상징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경험자아(experiencing self)와 기억자아(remembering self)라는 뚜렷이 구분되는 두 존재가 공존한다. 경험자아는 실제로 내가 경험하는 것을 느끼는 자아이고, 기억자아는 지나간 경험을 회상하고 평가하는 자아다. 지난 주말 친구들과 소주와 해물탕을 맛있게 먹은 나는 경험자아이고, 막걸리와 낙지전골을 먹은 것으로 기억하는 것은 기억자아다. 나는 이제 법원생활 28년간의 애환이 점철된 경험자아와 그 시간들을 불과 몇 사건의 명멸(明滅)로 생각하는 기억자아를 거느리고 오늘에 이르렀다.

현재 나의 일터인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은 261명의 법원 가족이 100만 고양시민·43만 파주시민과 더불어 법률 생활의 희비(喜悲)를 함께하고 있다. 경매절차에 관해 보직된 5명의 사법보좌관이 한마음으로 업무 협의와 사례연구, 실무자인 경매계장과의 간담회를 통해 제도 개선 및 사법 서비스의 질적인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 사법보좌관은 법원조직법 제54조8)로 1994. 7. 27. 법률 제4765호로 근거 규정이 마련된 이래 2005. 7. 1. 대법원규칙 제1939호로 시행되기까지 만 11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사법보좌관제도가 시행된 지 어언 13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이카로스의 날개(Icarus' Wings)와 같은 측면이 있다. 밀랍으로 붙인 약한 날개를 국민의 법원에 대한 신뢰를 밑거름으로 하여 강철 날개로 만드는 것이 전국 사법보좌관 184명의 시대적 소명이자 책무라고 생각한다.

삶을 설명하는 데는 때로 한 문장이면 충분하다. 개와 늑대의 시간, 즉 해 질 녘 모든 사물이 붉게 물들고 저 언덕 너머에서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던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세상을 건널 때 나를 지켜낸다는 것에 관하여 에픽테토스9)가 말해주었다.

“이 비밀을 알면 그대는 행복해질 수 있다. 어떤 것은 우리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는
영역 안에 있지만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마라.”

1) 2001. 12. 24. ‘고양시 일산구 장항동 872’로 청사 이전2002. 3. 2. 사법연수원 제33기생 976명 입소(사법연수생 1000명 시대 개막)

2)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년)는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한 영국 소설가. 작품은 자전적 요소가 짙은 《데이비드 코퍼필드》《위대한 유산》《올리버 트위스트》《크리스마스 캐럴》이 있다.
3) A Tale of Two Cities: 찰스 디킨스는 1859년 자신이 발행한 주간지 <올 더 이어 라운드>에 ‘두 도시 이야기’를 연재했다.

4) 단두대(斷頭臺, guillotine) : 1791년 프랑스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참수형(斬首刑) 죄수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새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기요탱 박사(1738~1814)는 도끼나 교수형(絞首刑)으로 형을 집행하는 것은 인도적이지 않고 형 집행자에게도 심리적 압박이 심하므로 기구를 사용해 형을 집행하자는 논문을 제출했다. 실제로 앙투안 루이가 기요탱 박사가 제안한 생각을 발전시켜 제작하였다.
5) 宇宙의 어원(출전 : 《회남자(淮南子)》) ☞ “四方上下謂之宇(사방상하위지우), 往古來今謂之宙(왕고래금위지주)”

6)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에 등장하는 컴퓨터. 저자 더글러스 애덤스(Douglas Noel Adams, 1952~2001년)는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나 세인트존스 칼리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7) 화수미제괘

8) 법원조직법 부칙 제1조 제2항 ; 제54조의 개정규정은 대법원규칙이 정하는 날부터 시행한다.
9) 에픽테토스(Epictetus, 55년경~135년경)는 고대 그리스 스토아학파의 대표적인 철학자. 그의 사상은 의지의 철학으로 실천적인 면을 강조했다.

글_ 김희준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 사법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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