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글Ⅰ]WBC, 정대세, 그리고 국적

테마가 있는 글

2017.05.02

정대세

이스라엘이 야구를 한다고?
지난 3월 개최된 야구 세계대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orld Baseball Classic, 이하 WBC)’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안타깝게도 1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말았습니다. 2013년 대회에서 대한민국에 패배를 안긴 바 있는 네덜란드 대표팀에 패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대부분 사람이 그 나라에 야구 대표팀이 있는지조차 몰랐을 이스라엘 대표팀에 연장 승부 끝에 패배한 것은 많은 국민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야구는 이변이 많은 스포츠라고 하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요? 패배 이후 언론 보도를 통하여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와 같은 일은 WBC 특유의 국가대표 선수 선발 규정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야구의 세계화’를 목표로 창설된 WBC인 만큼 되도록 많은 나라가 출전할 수 있게 선수들이 자신의 원래 국적뿐만 아니라 ‘부모와 조부모 중 1명’의 국적을 선택하여 그 나라의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모나 조부모 중 1명이 이스라엘 국적인 경우 그 선수는 이스라엘 국가대표 선수로 뛸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자신은 미국 국적이지만 부모나 조부모가 이스라엘 국적을 가지고 있는 많은 유대인 선수가 이스라엘 국가대표로 참여한 것이 이러한 이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인민 루니’ 정대세의 국적이 북한이 아니라고?
다른 스포츠의 국가대표들은 어떨까요. 2010년 남아공월드컵 당시 북한 국가대표팀으로 출전하여 북한 국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린 장면으로 유명해진 정대세 선수는 특유의 외모와 출중한 실력으로 ‘인민 루니’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그런데 정대세 선수는 본인은 물론 조부모, 부모도 북한 국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 북한에 어떠한 연고도 없다고 합니다. 나아가 정대세 선수의 국적은 법적으로 북한이 아니라 ‘대한민국’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게 되었고, 또 정대세 선수는 이러한 사정에도 어떻게 북한 국가대표가 될 수 있었던 걸까요? 이러한 상황은, 정대세 선수의 가족사 및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의 국적 문제로까지 이어집니다. 정대세 선수의 조부는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재일교포인데, 이러한 재일교포들은 8·15 광복 이후 일본과 미국이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하여 일제시대에 가지고 있던 일본 국적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대한민국과 북한이 분단되어 있었고 일본은 대한민국만을 국가로 승인하고 북한은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위와 같이 일본 국적을 상실한 재일동포들은 일본 내에서는 북한 국적을 취득하였다고 주장할 방법이 없었고, 결국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거나, 어떠한 국적도 취득하지 않은 상태를 유지(이른바 ‘조선적(朝鮮籍)’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대세 선수의 부친은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고 모친은 조선적인 상태였으므로 정대세 선수의 국적 역시 부친의 국적을 따라 대한민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대세 선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북한과 연계된 일본 내 조총련이 운영하는 학교에 진학하게 되어 그곳에서 자신이 북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고, 2007년 국제축구연맹(FIFA)에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는 자필 진술서까지 보내는 우여곡절 끝에 북한 국가대표가 되었다고 합니다.

축구계에는 정대세 선수만큼 복잡한 사연이 아니더라도 국적과 국가대표와 관련된 재미있는 사례가 많습니다.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국제축구연맹은 선수가 국적을 변경하여 변경된 국적의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것을 특별히 규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래전인 1934년에 당시 이탈리아의 독재자이던 무솔리니가 아르헨티나 국적의 우수한 선수들을 이탈리아로 귀화시켜 이탈리아월드컵에서 자국이 우승하도록 한 일도 있고, 비교적 최근인 1998년에도 프랑스월드컵 예선에서 벽안의 ‘로페스’라는 선수(본명은 Wagner Lopes라고 합니다)가 일본으로 귀화하여 한일전에 출전한 일을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이 잦아짐에 따라 국제축구연맹은 이를 규제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따라 몇 번의 규정 개정을 통하여 최종적으로 ①한 나라의 국가대표로 뛰었던 선수는 다른 나라의 국가대표로 뛸 수 없고 ②그렇지 않은 선수라 하더라도 자신 또는 부모, 조부모 중 1인이 새로이 국적을 취득한 나라에서 출생하였거나, 18세 이후 그 나라에서 5년 이상 거주한 사실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그 나라의 국가대표로 뛸 수 있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규정에도 축구계에서는 국적과 국가대표와 관련한 재미있는 일들이 최근에도 계속 벌어집니다. 독일에서 가나 출신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 축구선수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형 케빈 프린스 보아텡(Kevin-Prince Boateng)은 가나 국적을, 동생 제롬 보아텡(Jerome Boateng)은 독일 국적을 선택하여 둘 다 국가대표로 뛰었고, 심지어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서는 맞대결을 펼치기도 하였습니다.

이쯤에서 다시 생각해보는 ‘국적’의 의미
앞서 본 야구와 축구의 사례 외에도 여러 스포츠에서 국적의 선택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규정이 많고, 그에 따라 선수들이 국적을 선택하거나, 자신의 국적과는 다른 국가의 대표선수로 활약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와 같이 국적을 선택하는 동기로는 원래의 국적으로는 출전하기 어려운 세계대회에 출전하고 싶다는 명예욕, 세계대회 출전을 통하여 프로 스포츠에서의 연봉을 보장받고 싶다는 경제적 이유에서부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비단 하나의 동기만으로 그와 같은 선택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요.

그렇다면 국가대표 선수들의 활약을 보며 기뻐하는 우리에게는 국적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우리나라에서도 취약 종목의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외국인 선수들의 귀화를 추진하였고, 그에 따라 많은 외국인 선수가 대한민국의 국가대표 선수가 되었습니다. 귀화 전에는 대한민국과는 별 관련이 없었고 피부색이나 성장 과정 역시 우리와는 판이한 선수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의 활약을 보면서 기뻐하게 될 것은 우리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자각, 그리고 그에 대한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난해 가사사건을 담당하면서 많은 다문화가정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중 다른 외모적 특징과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우리말 실력(어머니가 우리말에 서툴러 어릴 때 제대로 말을 배우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으로 또래들로부터 놀림을 받는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번 WBC를 계기로 스포츠에서의 국적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그 아이들이 생각난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입니다. 피부색이 다른 국가대표 선수들의 경기를 보면서 환호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우리 주변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러한 아이들 역시 우리와 같이 환호할 수 있도록 법원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지 고민해보는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경험이 많지 않아 구체적으로 그러한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직 답을 찾지 못했고 이제 사무분담이 바뀌어 올해에는 가사사건을 맡지 않게 되었지만, 언젠가 다시 법원에서 그러한 어린이들을 만날 기회를 갖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 했던 생각을 실천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글_김동원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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