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글 Ⅰ]'테마가 있는 글' 의 주제를 찾아서

테마가 있는 글

2017.02.02

테마가 있는 글 Ⅰ

부끄럽지만, 저에게는 필명이 두 개나 있습니다. 하나는 ‘연(蓮)’이고, 하나는 ‘조(Jo)’입니다. 이 필명들은 과거 치기 어린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편할 때, 그것이 스스로에 대한 유일한 위로의 방식일 때, 드러냄과 익명성이 다 필요하던 그 시절에 쓰던 것입니다. 그런데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7년을 보내고 10년 차 판사가 되어가며 저는 이런 필명을 잊고 지냈습니다.
그러한 제 상황에서 ‘테마가 있는 글’이라는 커다란 주제로 글을 쓰게 되자, 나에게 남길 글이 아니라 함께 나눌 글의 주제는 무엇이어야 할지 쉽게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주제는 바로 ‘공중목욕탕에서의 때 밀기’입니다. 이 새벽에 생각해낸 에세이 주제가 ‘공중목욕탕에서의 때 밀기’라니요! 그런데 정말입니다. 학창 시절부터 저는 매주 공중목욕탕에 가서 열심히도 때를 밀곤 했답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저만의 공중목욕탕에서 때 밀기 방법을 소개해드릴까 합니다.
우선 온탕에서 몸을 불린 후, 편히 자리를 잡고 타월을 손에 끼워 ‘왼쪽 엄지발가락’부터 꼼꼼히 밀기 시작합니다. 발가락부터 발등, 발목을 타고 올라와 허벅지까지 마치면(상상은 금물!), 다시 똑같이 오른쪽 엄지발가락부터 밀기 시작하지요. 그러다가… ‘이렇게 밀다가는 다른 부분은 못 밀겠다’며 과감히 손을 ‘휘릭’ 위로 올려 꼭 왼손 엄지손가락부터 찬찬히 밀기 시작합니다. 그러고는 손등, 팔꿈치를 지나 어깨를 밀다가 난관에 부딪히곤 했답니다. 바로 ‘등 밀기’입니다.
하지만 공중목욕탕에서 때를 밀다 보면 이 중요한 ‘등 밀기’를 해결할 다양한 방법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우선, 팔을 최대한 뒤로 꺾어 타월을 낀 손가락을 열심히 꼼지락거리는 방법이지요. 바로 요가에서 한 손은 어깨너머 등 뒤로 넘기고 다른 한 손은 허리 뒤로 보내서 깍지를 끼는 그 어렵다는 자세를 등의 때를 민다는 일념으로 기어코 해내곤 합니다. 그러나 저의 살들이나 또는 뭉친 근육 등 당일 컨디션에 따라 등 한가운데 부분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문명의 진보적 산물의 하나인 ‘긴 타월’을 양손으로 붙잡고 열심히 때를 밀어보지만, 뭔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엄마 찬스’ 입니다. 엄마 찬스는 등을 샅샅이 밀어줄 뿐만 아니라, 이미 스스로 민 부분까지 다시 더 밀어주는 시원함을 주지요. 다만, 가끔 엄마의 잔소리가 함께 따라오는 단점이 있긴 합니다. 또한 나이가 들어 독립하여 멀리 살다 보니 자주 쓸 수 없는 찬스이기도 합니다.
다음 방법은 ‘세신사 아주머니 찬스’입니다. 이 찬스는 돈을 지불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과정과 결과의 차이도 크기 때문에 신중한 선택이 필요합니다. 관상을 볼 줄 몰라, 세신사 아주머니의 팔뚝 두께나 손놀림, 먼저 때를 민 아주머니의 만족스러운 표정 등으로 판단해야 하지요. 어떤 공중목욕탕의 어떤 분이냐에 따라 가끔 뭔가 설렁 밀고 지나간 듯한 아쉬움이 드는 경우도 있고, 어떨 때는 고향에 계신 엄마 찬스를 대체할 만한 만족감과 행복감을 주는 해결 방법이 될 때도 있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입니까. 이런 저의 때 밀기 방법이 제가 법원에서 기록을 보고 판결문을 쓰는 과정과도 많이 닮아 있습니다.
정말 어려운 사건이나 기록을 만났을 때, 저는 우선 소장에 적힌 청구취지 및 청구원인을 보며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쟁점을 정리하며 첨부된 증거까지 샅샅이 살펴봅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검토하다간 기록을 다 보지도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꼭 기록 마지막에 편철된 준비서면을 찾아 뒤에서부터 다시 검토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사건의 해결에 다가가다가, ‘등 밀기’의 난관처럼 사실관계의 확정이든, 법리 부분이든, 증거의 판단이든 막히는 부분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부분들도 아주 컨디션이 좋거나, 기존에 유사한 사건을 맡아보았다거나, 평소 특히 심도 있게 연구하던 부분은 결국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해결이 안 되고 며칠을 더 고민하게 하는 사건들이 꼭 있습니다.
이때 쓸 수 있는 것이 바로 ‘부장님 찬스’입니다. 이 부장님 찬스는 왜 그 부분에서 해결이 안 되는지 알려주고 근본적인 해결을 해주는 고마운 찬스이지요. 다만, 딱히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족한 실력과 ‘좀 더 찾아보고, 더 고민했어야지’라고 말씀하시는 듯한 부장님의 실망스러운 눈빛을 볼 수도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찬스는 단독판사가 되면 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배석판사라도 섣불리 쓰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다음이 바로 ‘동료 판사님 찬스’입니다. 이 역시 과정과 결과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찬스를 쓸 대상을 찾을 때 평소 동료 판사님의 법리적 실력, 관심 분야, 성품 등 많은 정보가 필요합니다. 또한 동료 판사님이 재판 전날인지 아닌지를 파악해야 하고, 어려운 사건으로 저보다 더 큰 고민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감정적인 부분까지 잘 판단하여 사건을 선택적으로 물어봐야 합니다. 척 보면 척인 천재 스타일이거나 말로 설명하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동료 판사님인 경우에는 좋은 조언을 해주시지만 제가 고민하던 부분을 만족스럽게 해결하는 데는 아쉬움이 남곤 합니다. 그런데 어떤 동료 판사님은 저와 같은 사건에서 바로 그 부분에서 고민이 들었고 어떻게 해결했다는 완벽한 경험담까지 말씀해주시면서, 왜 제가 고민에 빠졌는지 공감하며 함께 논의해주시고 심지어 본인도 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 바쁜 업무 시간에 대법원 종합법률정보 문헌이나 희귀한 판례를 출력해서 짜잔~ 하고 알려주시기도 하지요.

테마가 있는 글 Ⅰ

저는 여전히 왼쪽 엄지발가락부터 한 올의 때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때를 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법원 생활 10년을 내다보는 단독판사가 된 지금 저는 여전히 기록 소장부터 살펴보다가 다시 마지막 준비서면부터 거꾸로 검토하는 일도 반복하곤 합니다. 가끔은 그 어렵다는 팔 꺾기 신공이 발휘되는 날처럼 몇 년씩 진행되던 장기 미제 사건을 저 나름의 최선을 다해서 해결했다는 안도와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고요. 고향에 계신 엄마가 그리워지게 혼자서 등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어느 날처럼, 혼자서 낮에도 밤에도 한 사건을 부여잡고 고민도 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같은 방 동료 판사님 찬스를 자주 쓰며, 혜성 같은 선배 판사님을 찾아 복도를 종종걸음치면서 말이죠.

이렇게 글을 마치려다 보니, 이 새벽에 새로운 사실을 하나 깨달았습니다. 제가 가장 행복하던 시간은 ‘공중목욕탕에서의 때 밀기’를 ‘마친 시간’이었다는 것입니다. 등 밀기까지 끝이 나면 괜히 찬물에 발만 담그고 물장구도 치며 휴식하던 그 시간이 주는 여유와 휴식이 저에겐 정말 귀중했던 것이지요.

지금의 저에게 그 시간은 아마 남편과 이제 7살, 5살이 된 두 아들과 함께 보내온 시간들, 법원 가족들과 함께한 시간들인 것 같습니다. ‘테마가 있는 글’의 주제인 ‘공중목욕탕에서의 때 밀기’를 함께하기는 어렵지만! 이들이 지난 수년간 저를 위로해주고 제 삶의 여유였기에, 과거 저를 위로해줄 유일한 수단이던 ‘연(蓮)’과 ‘조(Jo)’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심지어 그 좋아하던 공중목욕탕도 자주 못 가면서요.

이제는 다시 한 번 가보려고 합니다. 공중목욕탕에도, 연(蓮)과 조(Jo)에게도요. 조금은 새롭게, 때 밀기 말고 때 밀기 전과 후도 좀 더 관찰해보러 말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테마가 있는 글’의 주제로 더 멋지게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올 테니까요. Coming someday!

테마가 있는 글 Ⅰ

글_김연주 인천지방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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