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친 자의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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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친 자의 유토피아

2016.08.01

* 이 글의 제목과 일부 내용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동명 소설로부터 차용하였습니다.

“들었지? 우리 서로를 위해서 이쯤에서 놔 주는 건 어때?”
이제 곧 등장시간이다. 눈앞이 깜깜한 건 내가 무대 뒤에서 곰처럼 웅크리고 있어서만은 아니리라.
쿵쾅거리는 심장은 입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다.
“이혼하자는 소리야?”
다음 대사 뒤에 나는 무대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오른손이 오른발과 함께 나가면 어떡하지? 이 날을 위해 무려 36년을 연습해 왔는데... 아니다, 그나마 얘들은 믿음직하다. 문제는 들어가서 수행해야 하는 1분 30초간의 연설이다. 나에게는 큰 소리로 이야기하면 30초에 한 번씩 뒤집어지는 성대가 있다.

분명히 목소리가 두 번은 뒤집어질 테고,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릴 텐데, 큰일이다. 아니, 더 큰 문제가 있다. 혹시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지난 20분 동안 목소리를 내본 적이 없다. 나는 왜 집에서 준비해준 우황청심환을 먹지 않은 것일까. 아니다, 어차피 우황청심환을 먹는다고 안 나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황청심환은 목소리와 관계가 없다. 어쨌든 여러모로 큰일이다.
“거봐, 엄마랑 아빠랑 이혼하는 거 맞잖아?”
아니다, 괜찮을 것이다. 그간 해온 연습이 얼만데...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왼발을 먼저 내딛으며 무대로 걸어 들어간다.

이 모든 일의 발단은 재밌을 것 같은 일이라면 꼭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내 성격 탓이리라. 작년에 같이 근무하던 판사님께서 메신저로 “판사님, 우리를 위해 마련된 이벤트가 있습니다.”라며 판사들을 상대로 연극 ‘여보, 고마워’의 오디션이 열린다는 이야기를 시작하였을 때,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재미있는 일로 가득한 유토피아의 도래를 기다려 왔던 나는 이미 반쯤 연극인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나는 1984년도에 뽀뽀뽀에 출연한 경력도 있는 무대경험자가 아니던가. 무대라면 자신있다.

지친 자의 유토피아_박건창 서울가정법원 판사

그런데 세상만사가 그렇듯, 재미만으로 시작한 일은 어떠한 형태로든 철퇴를 맞게 된다. 룰루랄라하며 오디션장에 들어섰을 때 나를 반겼던 것은 영화배우 같은 부장판사님과 아나운서 같은 판사님, 연극인 출신 판사님, 중국어로 실감나게 동화를 구연하던 판사님 등 정말 어디에 이런 분들이 숨어계셨을까 싶을 정도로 다재다능한 판사님들이었다. 32년 전의 뽀뽀뽀 출연경험 따위는 그들의 재능에 댈 것도 아니었다. 거기다 자기소개서가 성의 없다며-사실 정말 성의가 없긴 했다-탈락을 예고하던 심사위원까지 계셨으니 그때의 절망감이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다. 누가 뭐래도 나는 탈락 1순위였겠지만, 1:1이란 경이로운 경쟁률 덕택에 당당히 오디션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토록 비웃어 왔던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현실 세계에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약 6주에 걸친 연극연습이 시작되었다.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해 ‘여보, 고마워’의 줄거리와 그 중 남자판사의 등장장면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하도록 하겠다.

‘여보 고마워’는 전업주부인남편 준수와 대학교수인 아내 미영이 딸인 유빈을 양육하면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해 발생하는 다툼과, 그로 인해 이혼을 생각하는 과정, 그리고 준수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서로의 소중함과 서로에 대한 고마움을 깨닫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남자판사는 그 중 세 장면에서 등장하는데, 첫 번째 장면은 유빈을 앞에 두고 준수와 미영이 다투자 관객들에게 부부싸움이 아이에게 어떠한 상처를 주는지에 대하여 연설하는 장면이고, 두 번째 장면은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준수와 준수 친구에게 아내가 무서워 귀가하기 싫다며 투정을 부리다 결국 아내에게 적발되는 과정을 담은 장면이며, 세 번째 장면은 위와 같이 적발된 이후 아내에게 가벼운 폭행을 당해 다리가 부러져 목발을 짚고 나타나,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아내 옆에서 애처롭게 서있는 장면이다.

연습시작 전의 나는, 첫 번째 장면에서는 ‘그것이 알고 싶다’의 김상중, 두 번째 장면에서는 ‘응답하라 1988’의 성동일, 세 번째 장면에서는 ‘라임라이트’의 찰리채플린이 된 나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당시 ‘여보, 고마워’의 무대는 나의 유토피아였다.

하지만 연습을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토씨 하나까지 외웠다고 생각했던 대사는, 사람들 앞에서 주어와 서술어도 제대로 품지 못한 채 두서없이 흘러나왔고, 무대에서의 걸음걸이는, 내가 지난 36년 동안 직립보행을 한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딱딱하고 어색했으며, 심지어는 내 심장이 꽤 불규칙하게 뛰는 존재라는 사실을, 목발을 짚고 가만히 서 있을 때 난생 처음 깨닫기도 하였다. 그레고르 잠자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무대에서의 나는 아르마딜로가 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여기가 유토피아였던가?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업무가 우선’이라는 방패를 들고, 타고난 뻔뻔함과 임기응변으로, 눈앞에 닥친 위기만을 모면하며 별다른 연습을 하지 아니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어느 날의 연습에서, “박 판사님의 술 취한 연기가 판사님 가운데 가장 드라이하지 않아요?”라며 배우들에게 던진 연출님의 질문에, 위태롭게 지나가던 하루하루가 무너지고 말았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 연극의 가장 약한 사슬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어줍지 않은 임기응변으로 연기의 프로들과 관객들을 속일 순 없겠지. 머리가 차가워졌다. 이런 식의 연명은 옳지 않다. 일이 많으면 잠을 줄이면 된다.

지친 자의 유토피아_박건창 서울가정법원 판사

일단 나의 대사를 모두 녹음하기 시작했다. 녹음한 대사를 수없이 들어가며 어색한 부분을 하나하나 체크한 후 다시 녹음하고 청취하는 일을 반복하였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에도,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에도 이상적인 대사 톤을 찾기 위해 계속 중얼거렸다. 도저히 안 되는 부분은 같이 출연한 전문배우에게 녹음을 부탁하여 그 부분만 수백 번 반복해 듣고 따라 말했다. 음악처럼 흘러가는 한국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새삼스럽게 느끼기도 하였고, 쉼표가, 매끄럽고 논리적인 문장 구성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글이 말로 표현될 때의 입체감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였다.

그리고 걸었다. 걷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걸었다. 갑작스레 방향 전환도 해보고, 멈추었다 걷기도 하고, 고개를 돌리며 걷기도 하였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걸어본 적도 많았다. 무엇이 문제인지 어렴풋이 깨닫게 되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는 말, 허리가 긴장하고 있다는 말의 의미도 이해가 가기 시작하였다. 주먹을 쥐고 걸을 때와 펴고 걸을 때 팔이 움직이는 속도와 형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고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 어떠한 인상을 주는지도 알게 되었다. 내 몸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이해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술집에도 가고 병원에도 갔다. 어떤 술이든 한 잔 이상을 못 마시는 나였지만, 술자리가 생기면 따라다니며 사람들을 관찰했다. 술 마실 때의 가장 편한 자세가 어떤 것인지, 술에 취하면 목소리가 어느 부분에서 울리고, 어떠한 발음들이 흐려지는지 알게 되었다. 퇴근 후 집 앞 종합병원에서 사람들을 관찰했다. 하지만 목발을 짚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었다. 이 부분은 실패였다. 뭐, 중요한 건 목발 걸음보다는 표정 연기니까.

가끔 궁금할 때가 있었다. 이런 내 모습이 주변에서는 어떻게 보였을지. 양복을 입고 버스에서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사람. 군인처럼 걷다가 갑자기 방향 전환을 하고는 술 취한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걷는 사람. 술집에서 술은 안 마시고 주변인들만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 지금 와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하지만, 뭐 괜찮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아내에게 지난 몇 주의 내 모습을 물어본 적이 있다. 미친 사람 같았다고 한다. 역시 괜찮지 않았나 보다.

그리고 신기한 점 한 가지. 이렇게 연기에 빠져 몇 주를 보냈을까. 어느 날부터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연기를 하고 있었다. 고민을 얘기하는 친구도, 뛰어노는 아이도, 버스를 기다리는 회사원도, 장을 보는 아주머니도. 모두 연기자였다. 그것도 아주 뛰어난... 연기는 결국 우리네 생활이다.

무대는 항상 따뜻하다. 그리고 따뜻한 빛이 느껴지는 순간 마음속의 흥분과 걱정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내 옆의 배우들과 내 앞의 관객들... 모두 내 호흡 속에서 함께 숨을 쉰다. 내 손과 발은 지난 36년 간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는다. 목소리도 힘차게 나온다. 물론 뒤집어지지도 않는다. 힘차게 걸어가 강한 어조로 이야기할 때에는 주먹을 쥔다. 사람들에게 설명할 때에는 주먹을 편다. 작가님이 마련한 웃음 포인트에서는 어김없이 관객들의 웃음이 터져 나온다. 물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고 멋진 연기는 아닐 것이다. 김상중이나 성동일, 찰리채플린은 당연히 언감생심이다. 그래도 지금의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첫 무대 후 연출님이 웃으며 말씀하신다. 박판사님 포텐이 드디어 터졌다고.

그리스어로 유토피아는 “그런 곳은 없다”라는 뜻이다. 내가 꿈꾸는 유토피아 역시 존재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도 삶에 자그마한 빈틈을 마련해 놓고 그 안에 재미와 노력을 심어둔다면, 지칠 때 잠시 쉬어가며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열리는 그런 공간 하나는 가질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게 ‘여보, 고마워’는 그런 곳이었다.

글_박건창 서울가정법원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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