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세상 X 낭만필객] 슬기로운 야간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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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08

글 임태혁 부장판사(의정부지방법원)

헤어질 결심
광주지방법원으로 전보 발령을 받아 2022년 2월 20일 일요일 아침 간단한 세간살이를 싣고 처와 함께 광주로 내려와 인터넷을 검색해서 찾은 광주 맛집(?)에서 저녁 식사 후 처를 서울로 올려보내고 관사에 혼자 남게 되자, 머릿속에는 ‘맡은 업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걱정도 있었지만, 광주에서 지내는 동안 ‘저녁에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걱정이 더 많았다. 광주는 시애틀이 아니고 난 톰 행크스가 아니기에 아무리 잠 못 이루더라도 맥 라이언이 나타날 리는 없잖은가? 물론 나타나면 더 문제이긴 하다. 나는 <우묵배미의 사랑>에서 박중훈이 유혜리에게 붙잡혀 끌려가는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법연수원 교수를 마치고 2011년 지방법원 부장판사 발령을 받아 ‘격무’라는 춘천지방법원 영월지원에서 근무할 때에는 업무도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고, 저녁에도 무엇을 할 것인지 걱정하지 않았다. 당시 대부분의 지원에서와 마찬가지로 영월에서의 ‘격무’란 재판기일을 격주로 지정하여 격무이고 일과시간을 마치고 지역사회와 동행하는(?) 저녁 업무가 많아 일반적인 격무와는 조금 다른 의미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컴맹에다 비대면과 디지털을 끔찍이 싫어하는 생래적 아날로그인이라 유튜브나 넷플릭스는 처음부터 선택지에서 제외하였고 밤새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소설 그중에서도 대학 시절 읽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마지막으로 손절했던 대하소설을 읽어보자는 것이다. 기록을 핑계로 인문과학과 담을 쌓은 지 벌써 30년이 지났고, 설거지가 싫어 삶은 달걀이나 라면류의 일품요리(?)만 고집하는 게으름, 10분 이상 집중하지 못하는 산만함, 시간외 근무를 해야 겨우 따라갈 수 있는 업무능력, 특히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오랜 세월 저녁 일과 중 큰 부분을 차지했던 음주·가무와 헤어질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기에 광주에서의 첫날밤 나는 고뇌하는 햄릿이었다. 그러나 맘은 아직도 30대이지만 몸은 50대 중반을 넘어 연약해진 체력, ‘-’ 기호만 없으면 일론 머스크도 부럽지 않겠지만 영끌로 인하여 내핍이 요구되는 재력도 음주·가무와 헤어질 결심을 하라고 재촉했다. 책들이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라고 소리치는 듯했지만 난 결심이 약해질 때마다 15년간 군만두만 먹으면서 버틴 최민식을 생각했고, 난 올드했고 새벽잠도 없었다. 결국 난 몇몇 대하소설을 완독할 수 있었다.

처음 선택한 책 <토지>
새로운 업무에 조금 익숙해질 무렵 찾아간 광주지방법원 도서관에서 처음 선택한 책은 박경리의 <토지>였다. 대학 때부터 몇 번 시도했었지만 80년대의 사회 상황 그리고 뒤이은 고시 공부로 번번이 1권 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미수에 그친 토지는 나의 첫 결심 상대로 안성맞춤이었다. <토지>는 동학농민전쟁이 실패로 끝났지만 그 여진은 남아있는 1897년 최참판댁의 한가위 풍경부터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항복 방송을 했다는 소식을 서희가 수양딸 양현에게 듣는 장면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섬진강가에 있는 하동 평사리라는 작은 농촌마을부터 지리산, 진주, 서울, 동경, 만주까지를 공간적 배경으로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의 삶을 그린 소설이다. 한민족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였으리라는 어렴풋한 생각만 갖고 있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소설 속으로 빠져들면서 마치 내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소설 속의 인물인 것 같았고 특히 이용, 김한복, 오가다 지로에게는 좀 심하게 감정이입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는 왜 그리 억울하면서 슬픈 일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가슴도 너무 답답했다. 특히 땅이 없는 농민들 그리고 대부분의 여성들.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김이평이 두만 아비와 동일인물이고 용이의 성이 이씨이고 월선과 월선네는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한참 읽고 나서야 깨닫는 등 난독증으로 인한 어려움은 있었지만 좋은 글이란 이런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에는 어려움이 없는 소설이었고 작가의 문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간에 역사와 사회과학에 관한 이론이 길게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잠시 지루해서 포기할까 생각도 했었지만 작가가 서문에 쓴 ‘포기함으로써 좌절할 것인가, 저항함으로써 방어할 것인가, 도전함으로써 비약할 것인가’라는 문장이 나를 두고 적은 것 같아 힘을 냈고 결국 5부 5권을 마무리하면서 뿌듯하게 마지막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자신감 얻은 후 <임꺽정>
<토지>를 완결하고 자신감을 얻은 후 선택한 책은 홍명희의 임꺽정이었다. <토지>라는 큰 산을 넘어서인지 <임꺽정>은 조금 쉽게 넘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서 연수받던 시절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까지 4박 5일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가서 바이칼 호수를 보고 다시 4박 5일간 열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다음 달 오로라를 보여 달라는 아이들의 성화에 모스크바에서 무르만스크까지 1박 2일간 기차를 타고 다녀온 적이 있는데 바이칼 여행의 여운이 남아있어 오로라 여행은 너무나 짧게 느껴졌던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임꺽정>을 읽기 전에는 막연히 의적 임꺽정이라는 상상 속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로만 생각했는데 내가 모르거나 잘못 알고 있던 사실이 몇 가지 있었다. 첫째, 임꺽정은 실존 인물이다. 임꺽정이 무리를 지어 재물을 약탈하기 시작한 1559년 3월경부터 체포되어 처형될 된 1562년 1월경까지 황해도를 중심으로 한 임꺽정의 난에 관하여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열람만 가능하고 필사를 허용하지 않던 일제 강점기에 홍명희는 임꺽정 관련 대목을 열람하고 암기한 후 기록에 남아있는 역사적 사실에 맞춰 상상력을 동원하여 임꺽정에 관한 이야기를 썼다고 하니 홍명희를 이광수, 최남선과 함께 당시 조선의 3대 천재라고 했던 것에 수긍이 간다.
둘째, 홍명희의 임꺽정은 미완성이다. 굴욕적 패배를 거듭하던 관군이 임꺽정의 책사 서림을 회유하여 임꺽정을 배신하게 만들고 토벌대를 조직하여 임꺽정의 근거지를 쳐들어가자, 임꺽정은 청석골을 포기하고 자모산성으로 근거지를 옮기는데 부하 중 오가만 청석골에 남아있는 장면에서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아마도 일제 말기의 시대적 배경이나 작가의 월북이 더 이상 집필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 같다. 셋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임꺽정뿐 아니라 홍명희의 임꺽정도 의적은 아니다. 힘은 매우 세지만 잔인하고, 부하들을 산중에 남겨두고 혼자 서울에서 여자들을 거느리며 놀다가 따지는 부인을 때리고, 부패한 관리뿐 아니라 무고한 평민의 재산도 약탈하고, 기분에 따라 또는 분풀이로 사람을 죽이고, 빼앗은 재물은 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사용하는 임꺽정에게 실망이 컸다. 물론 임꺽정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전제로 인권을 존중하고 법 앞에 평등을 실현할 것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빼앗은 재물이라도 선물로 착한 아이 아니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줘야 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심한 시대에 천한 신분으로 태어난 임꺽정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도 상을 받지 못했기에 세상에 대한 분노, 울분이 너무 커서 의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너무 동화적이고 그냥 복수의 화신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홍명희는 생각했던 것 같다. 역시 작가는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다.

도서관에 가장 길게 비치된 <대망>
<토지>와 <임꺽정>으로 얻은 자신감은 드디어 도서관 서가에 가장 길게 비치된 <대망>에 손을 내밀게 하였고 2024년 2월 의정부지방법원으로 전보발령을 받아 짐을 정리하면서 개운한 마음으로 깔끔하게 모두 반납할 수 있었다. <대망>은 여러모로 복잡한데 협의의 대망과 광의의 대망으로 나누면 조금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협의의 대망은 야마오카 소하치가 쓴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가리키는 것이고 광의의 대망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활동하던 일본 전국시대부터 일본이 개화에 성공하여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시바 료타로의 언덕 위의 구름까지 일본의 역사소설들을 모아놓은 소설집이다. 이걸 모르던 난 광의의 대망을 1/3쯤 읽었을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죽어 당황했었다. 대부분의 영주, 신하가 반대하고 심지어 가족들까지 반대하는데도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광기와 과욕, 조명연합군에 의해 대륙정벌이라는 목표가 좌절되고 파멸하는 과정, 일본군에게 연이은 패배를 안겨준 넘사벽 이순신으로 인한 좌절감을 일본인의 시각에서 그린 점이 참신했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광주에 내려와 인터넷을 검색하여 찾아가 처음 저녁 식사를 한 곳은 양동시장 입구에 있는 ‘양동통닭’이었다. 줄을 서고 기다린 다음이어서인지 맛있게 먹었고 이것이 남도의 맛이라는 나의 언급에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연잎밥, 대통밥에 육전까지 다양한 음식의 다양한 맛집이 많았고 2년 차에는 광주에 오래 거주했던 분들도 모르는 나만의 맛집을 발굴하기까지 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사는 동안 소설 읽기 대신 소질은 없지만 외국어를 공부하거나 악기 또는 그림을 배웠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대하소설을 읽으면서 인간, 인생, 사회, 자연에 관한 진지한 생각을 많이 해봤으니 만족한다.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언제나 아쉬움은 남는 것 아닐까? 상자를 열면 어떤 초콜릿이 나올지 미리 알 수 없는 것처럼 인생은 예상치 못한 일로 가득하고, 인생은 무엇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 살아가는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 않을까? 야근을 하면서 소설만 읽는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판결문 초안도 열심히 검토하고 조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건에 공도 많이 들였지만, 부족한 점이 많았음에도 양해해준 배석판사님들에게 미안한 마음과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광주에서 나름 슬기로운 야간생활을 마치고 의정부지방법원에서 새로 맡은 업무에도 조금 익숙해질 무렵 난 의정부지방법원 도서관을 찾아가 <레미제라블>을 빌려왔다. 어릴 적 읽은 <장발장>은 단편이지만 <레미제라블>은 장편이고 난 어른이니까.이제 출퇴근을 위해 매일 왕복 2시간 넘게 전철을 타는 동안 슬기로운 전철 생활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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