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삶2] 「여행의 이유」를 읽고 나서

테마가 있는 글

2019.09.04

「여행의 이유」를 읽고 나서

글. 이지혜 판사(부산지방법원)

어느덧 휴정기가 지났습니다. 휴정기에는 왠지 모르게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이번 휴정기는 건강상, 일신상의 이유로 다소 느긋하게(?) 사무실에서 보내기로 마음먹고는, 지금까지 했던 여행사진들을 꺼내어 틈틈이 추억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김영하의 산문집 『여행의 이유』도 함께 읽으면서 말입니다.

사실 어떤 여행이든,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여행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온전히 쉰다는 느낌이 들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바쁜 일정 중에 틈을 내어 여행을 구상하고 있다면 미리 일을 해놔야 하고, 그러다 보면 여행 준비를 위한 시간은 부족하게 됩니다. 그리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난 여행도 의외로 일정이 고되어서 또는 여행지의 상황에 따라 마음껏 즐기지 못하고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이유로 여행을 떠나시나요?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행기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마르코 폴로는 중국과 무역을 해서 큰돈을 벌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여행을 떠났지만, 이 세계가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과 짐승, 문화와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와 그것을 『동방견문록』으로 남겼다.”

우리는 계획된 일정대로 여행을 무사히 마치기를 바라지만, 사실 그 계획된 일정이 그대로만 진행된다면 정작 별다른 감흥 없이 집으로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계획된 여행 속에서도 마법 같은 순간, 잊을 수 없는 장면, 뜻밖의 경험을 바라게 되고, 그것이 실현되는 어느 순간을 잊을 수 없거나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에 여행을 떠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2015년 남편과 함께 핀란드를 경유하여 프랑스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핀란드라는 나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고, 경유지라고만 생각해서 별다른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도착해서 보니, 여름이 시작된 헬싱키 도심의 풍경은 정말이지 잊지 못할 장면들이 많았습니다. 테라스나 공원에는 여름 햇살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파란 하늘 아래에 희다 못해 눈부시게 보이는 헬싱키 대성당, 활기가 넘치는 항구에는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노천 시장인 마켓 광장이 있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묵은 숙소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핀란드 사우나’가 있었는데, 사우나가 바다와 맞닿아 있어 사우나를 하다가 발트해 바닷속으로 들어가 언제든 몸을 식힐 수 있었습니다. 인구 550만 명의 핀란드에 약 230만 개의 사우나가 있다고 하니, 이들에게 있어 사우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캐릭터 ‘무민’, 핀란드가 낳은 음악가 시벨리우스, 감각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이딸라, 마리메꼬 등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기억들입니다.

이렇듯 당초 예상했던 여행 일정에서의,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하게 되는 순간이 켜켜이 쌓이게 되면 다시 그곳을 찾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핀에어가 내년 부산에도 취항할 예정인데, 많은 분이 저와 같이 뜻밖의 잊지 못할 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법 같은 순간들을 경험하기 위해서 늘 여행을 갈망하는 것일까요? 『여행의 이유』에서 김영하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호텔이 좋다.(…) 잠깐 머무는 호텔에서 우리는 ‘슬픔을 몽땅 흡수한 것처럼 보이는 물건’들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롭다.(…) 호텔에선 언제나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 그래서 일상사가 번다하고 골치 아플수록 여행지의 호텔은 더 큰 만족을 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문제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나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만 같다.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리셋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위 책에서 김영하는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흔히 말하는 삼십육계 줄행랑이지요. 그런데 사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여행은 그 자체로는 몸과 마음을 온전히 쉬게 만들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끔 여행하다 보면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기도 하고, 불쾌한 경험을 하기도 하며, 큰 비용을 치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집에서 조용히 음악을 듣고 책을 읽는 편이 훨씬 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여행을 통해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사람들은 내면의 변화를 당장은 알지 못할 수 있고 일상으로 복귀하고 나서야 천천히 그 의미를 알아가기도 할 것입니다.

3박 5일의 짧은 일정으로 이탈리아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알쓸신잡>에서 피렌체를 여행하는 것을 우연히 보고 머릿속으로만 피렌체를 생각하다가, 싼 비행기 티켓이 나오자 무리하여 여행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여행은 일정이 짧기도 했지만, 여행 이틀째 되던 날 누군가 지갑을 훔쳐가 버려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 피렌체 도심 변두리의 경찰서에서 4시간 정도 피해 사실을 진술하였는데, 그때의 막막함과 속상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일정대로 여행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어찌 보면 망친 여행이라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 법도 했지만, 한국에 돌아와 생각해 보니 피해 사실을 진술할 때 선뜻 통역을 맡아주었던 현지인 아주머니, 자신도 피렌체에 처음 왔을 때 절도 피해를 봤다고 말하면서 나를 위로해 주었던 호텔 직원, 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구글 검색기를 열심히 돌려가면서 조서를 작성해 주었던 경찰관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절도 피해 앞에서 무기력했던 나 자신이었지만,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행은 아무것도 아닌 나 자신을 경험하게 하기도 하고, 일상에서의 반복된 삶이 주는 감사함을 느끼게도 하며, 기대하지 못한 도움들로 인해 온 우주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따스함을 느끼게 되는, 그래서 다시 오늘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는 경험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마다 여행의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올여름 여러분의 여행은 어떠셨나요? 일상으로의 복귀가 힘들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다시 떠날 언젠가를 생각하면서 오늘도 힘차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회교 신비주의 시인 잘랄루딘 루미의 ‘여행’이란 제목의 시를 덧붙여 봅니다.

“여행은 힘과 사랑을 그대에게 돌려준다./ 어디든 갈 곳이 없다면 마음의 길을 따라 걸어가 보라./ 그 길은 빛이 쏟아지는 통로처럼 걸음마다 변화하는 세계./ 그곳을 여행할 때 그대는 변화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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