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이야기]한국어 발음의 ‘뜨거운 감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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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4

우리말 이야기

우리 표준발음법은 표준어 규정 안에 1부 ‘표준어 사정원칙’에 이어 2부에 나온다. 우리 어문 규정이 ‘발음’보다 ‘표기’를 위주로 하는 정신에 입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의 읽기·말하기가 부족한 것도 그 근저에 이런 어휘, 문법, 독해 중심의 국어 규범이 자리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이번 호에는 잘못 발음되고 있는 우리말 사례를 다뤄본다.

표준발음법 앞부분에는 우리 자음과 모음의 발음법을 해설해 놓고 있다. 하지만 우리 자모(字母)를 반듯하게 발음하게 하려면, 자음 규정에서 ‘구개’니 ‘연구개’니, 모음 규정에서 ‘원순’이니 ‘평순’이니 할 게 아니다. 그림과 더불어 상세히 알기 쉽게 적시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고등교육을 받는 동안 우리 자모를 정확히 발음하는 방법을 익혔던가? 웬만한 헬스와 에어로빅도 시범 조교가 있는데 어쩌면 평생을 좌우할 한국어의 기본발음법을 소홀히 다루지는 않았는가 생각해볼 일이다.
우리 표준어에 해당하는 말을 영국에서는 ‘RP(Reserved Pronunciation)’라 부른다. 누구에게나 ‘인정 받고’, 누구나 ‘수용하는’ 표준발음이라는 뜻이다. 읽기와 말하기 시대에 우리도 상대적으로 발음 가치의 확장을 진지하고 절실하게 고민해야 한다.

모음상 잘못된 발음 사례
가장 큰 문제는 ‘ㅐ’와 ‘ㅔ’의 엉거주춤한 동거다. ‘ㅐ’를 ‘ㅔ’처럼, ‘ㅔ’를 ‘ㅐ’처럼 발음하는 경향이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심각하다. 이 두 모음을 올곧게 구분해 발음하는 것이야말로 정확하고 명료한 발음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사실 좋은 발음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모음의 음가(音價)를 정확히 내는 꾸준한 훈련이 필수다. 언제부턴가 입 주위 근육을 너무 안 쓴 탓에 모음을 제대로 발음하는 연습을 할라치면 흠칫 놀라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입을 크게 벌려야만 하느냐는 것이다. 답은 명백하다. 그렇다.
모음 훈련은 단언컨대 자신의 상상과 상식을 뛰어 넘는 입 벌리기의 체화가 관건이다. ‘ㅐ’는 치과에 갔다 상정하고 ‘ㅏ’하며 입을 크게 벌리고는 그 상태에서 ‘ㅐ’를 만들면 가능하다. 더 간편한 방법은 입을 벌려 손가락 검지와 중지를 가로 형태로 가볍게 넣은 다음 ‘ㅐ’하면 입 모양이 만들어진다. 이 때 입 모양의 좌우 형태에 신경을 많이 쓰곤 하는데 상하(上下)의 벌림이 더 중요하다. ‘대다’와 ‘데다’, ‘매다’와 ‘메다’, ‘배다’와 ‘베다’, ‘새다’와 ‘세다’를 발음부터 의미까지 모두 구별하는 청년을 본 일이 드물다. ‘재수(再修)’와 ‘제수(弟嫂)’, ‘채증(採證)’과 ‘체증(滯症)’같은 한자어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애로(隘路)’와 ‘에로(Ero物)’의 혼동이 빚어내는 혼돈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그림 설명: 검은 점이 혀끝의 위치다. 상하의 입 벌림에 유의하며 혼자 연습할 수 있다. 어려운 발음 중 하나인 ‘ㅢ’도 이 표를 보면 쉽다. ‘ㅡ’와 ‘ㅣ’의 합성이니 혀를 입천장 가까이 끌어올린 다음 적당히 뒤쪽에서 앞의 치아 쪽으로 밀면 ‘ㅢ’가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너희들이 게맛을 알아?”라고 했어야 게맛살버거로 알아들었을 텐데, ‘게’가 ‘개’로 들리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와 억측을 했던 CF를 기억하는가? 그 이전 경험은 더하다. 웬만한 장년층이라면 아련한 향수를 떠올리며 즐겨 부르는 노래, ‘메기의 추억’이 있다. 앵글로색슨 냄새 가득한 그 이름 ‘매기(Maggy, Maggie: Margaret의 애칭)’를 추억하는 미국 노래가 어느 발음 문외한의 손에 의해 ‘메기’로 표기되는 바람에 적지 않은 국민들이 엉겁결에 친화적인(?) 메기를 떠올리며 매운탕을 벗했다. 허탈함과 쓴웃음을 넘어 이쯤 되면 블랙코미디 감 아닌가?
‘ㅐ’와 ‘ㅔ’ 관문을 통과하면 ‘ㅙ’와 ‘ㅞ’와 ‘ㅚ’를 정복할 일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요즘의 발음현상은 ‘ㅙ’도 ‘ㅞ’처럼 ‘ㅚ’도 ‘ㅞ’처럼 가고 있어 걱정스러운 것이다. 이중모음 ‘ㅙ’는 발음의 끝에서 ‘ㅐ’ 입모양을 크게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중요하다. ‘ㅞ’는 같은 맥락에서 ‘ㅔ’로 마무리를 짓는다. 문제는 ‘ㅚ’다. ‘ㅚ’는 엄연한 단모음이라는 것이다. 단모음(單母音)이란 이를 테면 단번에 잡티 없이 깨끗이 나오는 발음을 뜻한다. ‘ㅏ’, ‘ㅗ’, ‘ㅣ’, 이런 것 말이다.
사달은 “‘ㅚ’와 ‘ㅟ’는 이중모음으로 발음할 수 있다.”는 표준발음법 제4항 붙임해설에서 비롯됐다. 학자들 중 누군가가 발음의 정밀성보다 현실발음의 편의를 좇자고 부추긴 타협의 결과다. 스스로가 ‘ㅚ’ 발음을 힘겨워하던 차에 일반 국민들의 수고로움 덜기라는 빌미로 무책임하게 대충 얼버무린 것이다. 어려운 발음이 있다면 그것을 제대로 발음하는 방법을 일깨우고 계도할 일이지, 엄연한 단모음의 정체성을 유사시에는 이중모음으로 바꾸라는 것이 과연 설득적인가? 이는 외래어 표기법의 정착과도 대척한다. 외래어의 정치(精緻)한 표기를 위해 한국어의 어문·문자 체계와는 거리가 먼 ‘튜(튜브)’, ‘블(블라우스)’, ‘뷔(뷔페)’ 등의 음절도 수용했고, 그런 표기로 한국인의 발음 스펙트럼의 확장이라는 뜻밖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ㅚ’만 보더라도 ‘뢴트겐 검사’, ‘뫼비우스의 띠’, ‘푄 현상’이 오롯한데 이를 ‘ㅚ’ 발음도 되고 ‘ㅞ’도 되면 무엇 하러 ‘ㅚ’로 적으란 말인가?
이 땅의 대성(大姓)인 수많은 최(崔) 씨(氏)들, 그리고 충북과 강원의 음덕 깊은 땅 괴산군(槐山郡)과 횡성군(橫城郡)의 주민들에게도 하루빨리 ‘ㅚ’의 본값을 선사해야 한다. 최소한 어두(語頭)에는 ‘ㅚ’를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어말(語末)에는 ‘ㅞ’를 인정하는 쪽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모국어의 단모음을 반듯하게 구사하려 노력하는 이들을 격려하지는 못할 망정 그 의욕을 묻히게 한다? 이건 아니다. 참고로 ‘ㅟ’와의 형평성을 지적하는 이들이 있지만, ‘ㅟ’는 우리말 모음에 그 음가를 혼란케 하는 다른 모음이 다행히 없어 문제가 없다.

자음상 잘못된 발음 사례
자음은 소위 ‘경구개음(硬口蓋音: 센입천장소리)’인 ‘ㅈ, ㅊ, ㅉ’ 소리의 혼란이 문제다. 혀끝을 입천장에 대고 발음하라는 것인데 이것을 앞니 뒷면 잇몸인 치조(齒槽)의 위치에서 발음해 생기는 오류다. 쉽게는, 소리를 낼 때 혀의 위치를 어지간히 뒤에 위치시킨 상태에서 발음해야 할 ‘ㅈ, ㅊ, ㅉ’을 ‘ㅅ, ㅆ’ 소리를 낼 때처럼 앞에 놓아두어 제 음가를 못 낸다는 말이다. 그래서 순박하고 담백해야 할 우리의 무성음(無聲音: 성대의 진동이 없다는 말) ‘ㅈ, ㅊ, ㅉ’이 애꿎게 기름기 잔뜩 묻은 유성음화(有聲音化)로 변질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무례한 사람들을 만날 때면 혼잣말로 쓰는 말이 있다. “아이, 재수 없어!”. 요지엔 불만이 없다. 그러나 발음이 문제다. 거의가 로 소리 낸다. [제수업따]가 아니라 [재:수업:따]다. 또한 ‘치사하다’라는 표현의 경우, ‘치’도 입안 후방에서 나와야 제대로 된 ‘ㅊ’을 낼 수 있다. 청소년들은 “속상해요. 화가 나요. 울적해요. 우울해요”를 한데 뭉뚱그려 툭하면 “짜증 나.” 심지어 “짱 나.”라고 하는 게 일상이다. 바라기는 그 ‘ㅉ’를 발음만이라도 제대로 그윽하게 낼 일이다. ‘ㅈ, ㅊ, ㅉ’이 구미어(歐美語) 자음 [z]처럼 느끼하게 들리는 일, 제발 없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좋은 음성은 현대인에게 매력적인 경쟁력이다. 그러나 그건 다분히 선천적인 것이다. 발음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만들면 목소리가 좋은 것으로 인식되는 것 이상의 이미지를 얻는 효과가 있다.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당장 입 주변 근육을 풀고 입을 크게 벌릴 일이다.

글 강성곤(KBS아나운서실 방송위원,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방송언어분과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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