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여행] 대구 골목, 그리고 김광석길

테마법원

2019.11.06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쉬는
대구 골목, 그리고 김광석길

글. 최덕철 _ 사진. 김인규

‘대구’라고 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몇 가지 있다.

서문시장, 김광석길, 납작만두, 사과, 무더위... 앞으로는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면 좋을 것 같다. 바로 ‘골목’이다. 대구에는 우리나라 역사의 중요한 장면들과 함께한 가치 있는 골목이 여럿 있다. 5개 코스로 조성된 골목 투어 중 가장 인기가 있다는 2코스와 평소 들러보고 싶던 ‘김광석길’에 다녀왔다.

골목 속에 피어난 우리 근대문화

대구시가 조성한 대구근대골목 5개 코스 중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2코스인 ‘근대문화골목’이다. 동산 선교사 주택, 3.1만세운동길, 계산성당, 이상화·서상돈 고택, 진골목 등을 거쳐 화교협회에서 마무리되는 이 코스는 역사적인 가치가 클 뿐 아니라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될 만큼 접근성이 좋다.

서문시장에서 출발해 5분 정도 걷다 보면 2코스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는 청라언덕에 닿는다. 청라언덕은 대구 출생의 작곡가이자 ‘오빠생각’으로 유명한 박태준 선생의 가곡 ‘동무생각’(박태준 작곡/이은상 작사)의 실제 배경이 된 장소다. 이은상 시인이 대구 계성고 재학시절 인근 여고에 다니는 한 여학생을 짝사랑한 박태준 선생의 이야기를 듣고 노랫말을 만들었다고 한다.

청라언덕에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선교사 주택들도 볼 수 있어 관광객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곤 한다.

청라언덕에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특별한 길이 나온다. 3.1만세운동길이라 불리는 곳이다. 대구 3.8만세운동(1919년 3.1운동 때 경상북도 대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 당시 대구 시민들은 이 길을 통해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만세운동을 하러 나갔다. 이 길은 울창한 소나무숲이라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안성맞춤이었다. 대구 만세운동은 지식인과 고등학생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울창하던 숲은 사라졌지만, 이 90개의 계단길 양옆으로 걸린 태극기들과 만세 운동 당시 사진들이 우리 민족의 피 끓던 시절을 기억해내고 있다. 계단을 내려오며 만세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이 길을 지났던 우리 조상들의 사무친 울분과 뜨거운 결의를 잠시 떠올려봤다.

계단을 다 내려가면 맞은 편으로 아름다운 자태의 성당과 마주한다. 1902년 지어진 계산성당으로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이기도 하다. 2개의 종탑을 가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내부도 고풍스러워 결혼식 장소로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성당 입구의 성수대는 1984년 5월 대구를 방문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직접 축복한 것으로 유명하다. 계산성당은 영화 <검은 사제들>에도 등장한다.

저항시, 국채보상운동... 항일정신을 만나다

3.1만세운동길 외에도 2코스에는 근대 역사 속 우리 민족의 항일정신을 느낄 수 있는 공간들을 만날 수 있다. 이상화 시인의 고택과 서상돈 선생의 고택도 그중 하나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저항시로 유명한 이상화 시인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이 고택에 머물렀다고 한다. 한때 이 고택은 도시계획으로 인해 철거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 현재는 원형에 가깝게 보존돼 개방되고 있다.

바로 맞은 편에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 있다. 서상돈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운동으로 평가 받는 국채보상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다. 1900년대 초 일본은 우리나라 경제를 파탄에 빠뜨려 일본에 예속시키려고 우리나라에 고이율의 차관을 들여올 것을 강요했다. 교육제도의 개선, 금융기관의 확장정리, 도로 항만시설의 개수확충 등의 명목이었다. 일본의 집요한 차관 공세로 당시 우리나라는 원금만 1,650만 원이라는 당시로써는 매우 큰 금액의 채무를 지게 됐고, 이자 역시 해가 갈수록 크게 늘어났다.

우리나라는 이후 350만 원은 상환했지만 나머지 1,300만 원의 채무는 감당할 능력이 되질 못했다. 이 돈을 갚지 못할 경우 우리나라는 늘어나는 이자 때문에 일본에 국토를 빼앗기고 2천만 우리 민족 역시 그들의 노예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에 1907년 우리 조상들이 스스로 나서 돈을 모으는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됐다.

국채보상운동을 가장 먼저 제창한 이들은 대구 지방의 애국지사들이었다. 그 중심에 서상돈 선생이 있었다. 서상돈 선생을 포함한 애국지사들은 <국채보상 취지문>을 전국에 반포하며 전 국민적인 지지를 얻는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일어났고 고종황제 역시 동참하면서도 기세가 더욱 올랐다. 하지만 이후 일본의 방해로 국채보상운동은 점차 퇴조되기 시작한다.

국채보상운동의 의미는 값지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국민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당시 전국에서 모은 돈은 이후 우리나라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재정적 기초가 됐다. 대구 중구에는 국채보상운동의 시민정신을 기념하는 국채보상운동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서상돈 선생의 고택을 지나 약령시한의약박물관과 종로를 거치면 진골목에 닿는다. ‘긴 골목’을 뜻하는 진골목은 조선시대 때부터 대구의 부자들이 모여 사는 부촌이었다고 한다. 코오롱그룹 창업주 이원만 회장과 이동찬 명예회장, 향토 소주회사 금복주 창업주인 김홍식 회장 등의 저택도 이곳에 있었으며, 진골목에서 가장 부유했다던 서병국의 집터에는 현재 2코스의 마지막 공간인 화교협회와 화교소학교가 들어서 있다.

‘가객’ 김광석, 길로 기억되다

대구에 가면 꼭 들르겠노라 생각한 곳이 흔히 김광석길이라 부르는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이다. 천재 싱어송라이터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 가수 故 김광석(1964~1996)을 테마로 한 길이다. 이 길에 다다르면 자신도 모르게 좋아하는 그의 노래를 흥얼거리게 된다. 우렁차고 단단한 목소리로 기타 선율과 함께 울려 퍼지던 그의 음악은 여전히 많은 이들의 머리와 가슴에 남아 있다. 좋은 음악을 선사하고 떠난 뮤지션은 어떤 방식으로든 대중의 기억에 남는 듯하다. 그의 생전 모습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추억과 아련함으로, 뒤늦게 그의 음악을 접한 젊은 세대에게는 존중 또는 동경의 대상으로 말이다. 이곳을 방문했던 시기가 가을이라 그랬는지, 문득 그의 노래가 가을밤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혼자 남은 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너무 깊이 생각하지마’, ‘서른 즈음에’ 같은 노래를 떠올릴 때 유독 그랬다.

‘김광석다시그리기길’은 만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그가 살았던 대구 방천시장 인근 골목에 조성됐다. 그의 삶과 음악이 거리 곳곳에 녹아 있다. 대중음악인의 이름을 딴 거리는 이곳이 최초라고 한다. 쇠락해가는 방천시장 일원을 되살리기 위해 ‘별의별 별시장 프로젝트’와 ‘문전성시 프로젝트’를 거쳐 김광석을 사랑하는 예술가들의 노력과 열정으로 만들어졌다. 400m가 조금 넘는 거리에는 그를 떠올릴 수 있는 벽화와 음악들이 곳곳에 자리한다. 야외공연장, 사랑의 자물쇠, 골목방송 스튜디오, 독특한 인테리어의 카페와 식당 등도 있어 멋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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