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심의관 코너] 이제는 헤어질 결심

조사심의관 코너

2023.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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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번역투와 헤어질 결심

글 윤민 조사심의관(법원도서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때 우리의 일상은 특별한 순간으로 변합니다. 그 공간과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함께 한 시간, 고마운 마음, 그 향기는 기억으로 감각 속에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기억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습니다.

물론 아름답고 따뜻한 시간만 기록되지는 않습니다.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에게는 일본말이 더 익숙했을지도 모릅니다. 광복 후 법률을 제정하고 사법 제도를 정비한 과정까지 생각해보면, 법률 용어와 판결문에 일본어 투가 남아있는 것은 그 어두운 시절의 흔적입니다. 정규 교육에서 영어를 배우게 되면서 우리말에 영어 번역 투도 더해집니다.

‘번역 투’란 외국어 문장을 그대로 우리말로 옮겨 적어 우리 어법과는 다른 문장 표현을 의미합니다. 외래어와는 다릅니다. 외래어는 국립국어원에서 표기법을 규정해 놓은 엄연한 ‘국어’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조사심의관 코너에서는, 이제는 ‘번역 투’와 헤어질 결심을 하고 읽기 쉽고 자연스러운 우리말을 찾아봅니다.

[여기서 잠깐!]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일본어 투?

작년 12월 카타르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을 확정 짓고 선수들이 흔든 태극기, 그에 담긴 문장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한편으로 위 문장이 일본어 투 표현이라는 의견도 있었는데요.
국립국어원은 ‘온라인 가나다’에서 “위 표현이 일본어 투 표현에서 왔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 ‘의’를 생략하고 동사로 풀어 쓰기
관형격 조사 ‘의’를 지나치게 많이 사용하는 것은 일본어 영향입니다. 일본어에서 명사와 명사를 연결할 때 우리말 ‘~의’ 혹은 ‘~인’에 해당하는 ‘の’를 사용합니다. 명사나 명사구를 ‘의’로 연결하면 문장이 짧아질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딱딱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고, 특히 주격이나 목적격 자리에 ‘의’를 사용하면 의미 파악도 어렵게 됩니다. ‘~와의’, ‘~에의’, ‘~로의’처럼 다른 조사와 결합하여 쓰는 경우도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의’를 생략하고 동사를 사용하여 풀어 쓰면 보다 자연스러운 문장이 됩니다.

◦    유죄의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    유죄 판결이 확정될 때까지
◦    이득의 박탈을 목적으로    ⇨    이득을 박탈할 목적으로
◦    그녀와의 대화    ⇨    그녀와 나눈 대화
◦    친구와의 약속    ⇨    친구와 한 약속

◑ ‘~에 있어서 / 대하여 / 관하여 / 의하여’를 바꾸기
‘~에 있어서’, ‘~에 대하여’, ‘~에 관하여’, ‘~에 의하여’는 일본어 번역을 통해 들어왔고, 조사와 동사 활용형이 굳어진 표현입니다. 이를 삭제하거나 다른 조사로 대체하면 문장의 의미가 더욱 명확해집니다. ‘~에 대하여’, ‘~에 관하여’는 서술 대상이나 목적을 나타낼 때 쓰고, 그렇지 않으면 문맥에 따라 생략하거나 ‘~에게’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일본어 투 ‘~에 의하면’ 대신에 ‘~에 따르면’을 쓸 수 있습니다.

◦    선정 과정에 있어서    ⇨   선정 과정에서
◦    근로자에 대하여 구속력 있는 지시를 하는 등    ⇨ 근로자에게 구속력 있는 지시를 하는 등
◦    시스템 운용에 관한 수수료    ⇨   시스템 운용 수수료
◦    다른 사정에 의하여 생긴 손해액    ⇨   다른 사정으로 생긴 손해액
◦    원심판결 이유와 기록에 의하면    ⇨   원심판결 이유와 기록에 따르면

◑ ‘~라 함은’, ‘~적(的)’ 없이 간명하게
‘하다’로 끝나는 동사에 ‘-ㅁ’을 붙인 어구, ‘~함에 있어서’, ‘~라 함은’도 일본어 투 표현입니다.
‘~라 함’ 대신에 ‘-하는 것’으로 풀어 쓰는 것이 현대 한국어 감각에 더 가깝습니다. 접미사 ‘-적(的)’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도 일본어 투 표현입니다. 1910년대 이후 소설에서 널리 사용되면서 퍼졌다고합니다.

◦    친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   행사할 때 / 행사하는 경우
◦    항고소송의 대상이 되는 행정처분이라 함은    ⇨   행정처분이란 / 행정처분이라는 것은
◦    구분소유자가 종국적으로 그 손실을 부담~    ⇨   구분소유자가 종국에는 그 손실을 부담~

◑ 시험을 위한 영어 구문, 이제는 잊자
이제는 영어 투 표현입니다. 학창 시절 번역 시험을 너무 열심히 준비했던 탓인지 우리말에 영어 투 표현도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무심코 쓴 문장이 영어 구문이나 영어 전치사를 직역한 표현은 아닌지 점검해 봅시다.

◦    임금의 양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   임금의 양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고
◦    두 차례 회합을 가진 행위    ⇨   두 차례 회합을 한 행위
◦    국내 또는 국외로부터 투자를 받을 경우    ⇨   국내 또는 국외에서 투자를 받을 경우
◦    유턴을 하기 위해    ⇨   유턴을 하려고
◦    의무위반 정도에 비해 과중한 제재    ⇨   의무위반 정도보다 과중한 제재

◑ 되도록 능동문을 쓴다
우리말은 일반적으로 사람을 주어로 하는 능동문으로 써야 자연스럽습니다. 영어 수동태 표현을 직역하거나 ‘~에 의하여’를 추가한 피동문은 자연스러운 우리말이 아닙니다. 되도록 능동문을 쓰되 부득이한 경우 피동 표현을 사용하더라도 이중 피동은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    입점상인들에 의해서 설립되는 대규모점포관리자
           ⇨    입점상인들이 설립하는 대규모점포관리자
◦    개발제한구역에 위치하여    ⇨   개발제한구역에 있어
◦    전문 지식을 필요로 하는 분야    ⇨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분야
◦    매매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    승용차의 진로가 막히게 되자    ⇨   승용차의 진로가 막히자

◑ 마지막 인사는 산뜻한 안녕
작년 연말, 짧은 문장과 그림을 활용해 장애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쓴 서울행정법원 판결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직관적 표현, 간단한 문장으로 쓰는 ‘쉬운 판결문’이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도 앞으로 판결문을 쓸 때 조금 더 명확하고 간결하게 쓰리라 다짐합니다.
또다시 만남과 헤어짐의 안녕이 있는 2월입니다. 저도 2년간 일산 청사에서 담았던 아름다운 사계절과 함께 ‘조사심의관 코너’를 마무리합니다. ‘안녕’이라는 말을 꺼내려니, 어느 순간 그 생각이 나의 마음에 닿고 내 생각이 또 다른 마음으로 연결되었던 경험이 저의 내면을 단단하게 하였음을 깨닫습니다.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 가사처럼 우리는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모퉁이’에 있으니까요. 저 길모퉁이를 돌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까요? 2023년, 때로는 고단하겠지만 일상의 소소함을 온전히 즐기고 행복을 나눌 수 있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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