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익숙해서 지나친 것들
글. 한지형 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
들어가며
사회학에서 많이 쓰는 개념인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은 한번 길이 만들어지면 사람들이 그 길로 가려는 경향을 일컫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드는 것이 쿼티(QWERTY) 키보드입니다. 수동 타자기 성능 문제로 일부러 불편하게 고안된 자판 배열을 따른 것인데 훨씬 편리하고 효율적인 배열이 개발된 후에도 사람들은 익숙함을 택하였다고 합니다.
익숙하다. 어떤 대상을 자주 보거나 겪어서 처음 대하지 않는 느낌이 드는 상태에 있다는 말입니다. 사전적 의미에서 알 수 있듯 익숙함과 옳고 그름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렇지만 익숙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혹시 틀린 건 아닌지 의문을 갖게 되고 무언가 찾아보게 되지만 익숙한 일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때로는 변화가 두려워 호기심이나 궁금증을 애써 외면하기도 합니다.
오늘 조사심의관 코너는 익숙해서 무심코 지나쳤지만 한번 생각해 볼 것들을 소개해드립니다.
8. 1.자 결정 vs. 8. 1. 자 결정
여러분은 “대법원 2021. 8. 1.자 판례공보”와 “대법원 2021. 8. 1. 자 판례공보” 중 어느 쪽이 더 익숙하신가요? 저에게는 전자의 표기 방식이 익숙합니다.
판결의 경우와 달리 결정이나 명령은 고지 일자가 반드시 명확한 것은 아니므로 ‘선고일’이 아닌 ‘결정서 작성일’로 특정하고 날짜를 뜻하는 ‘자’를 함께 사용하여 표시합니다. 법원도서관에서 발간한 『맞춤법 자료집』(전정판)에 따르면 이때 ‘자’는 앞말과 붙여 쓰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법정책연구원에서 발간한 『법률문헌의 인용방법 표준안』(증보판)이나 사법부 대표 학술지인 『사법』의 투고 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문을 갖지 않고 익숙하게 따라 왔습니다.
그러던 중 한 판사님의 제보를 계기로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면서 요즘 말로 ‘멘붕’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전에는 ‘날짜’를 나타내는 말이라는 뜻의 ‘자’가 “명사”로 등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접사나 어미로서의 ‘-자’에는 ‘날짜’의 뜻이 담긴 것이 없습니다. 명사라면 어문규범상 띄어 쓰는 것이 원칙인데,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1999년 발간 당시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표제어 ‘자’에 “날짜”를 나타내는 뜻풀이 자체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품사 표시도 없었고 명사로 보는 견해와 접사로 보는 견해가 혼재하였다고 합니다. 맞춤법 자료집도 그 시절, 아마도 다수설(?)에 따라 접사로 소개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2008년 표준국어대사전 개정판을 내면서 국어학자들의 논의를 거쳐 위와 같이 뜻풀이를 추가하고 명사로 정리하였다고 합니다. 어법에 맞게 고쳐야 할 것 같기는 한데, 많은 분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표현 방법이어서 망설여집니다.
징역 6월 vs. 징역 6개월
“징역 6월에 처한다.”와 “징역 6개월에 처한다.” 중에서는 어떠신지요? 저는 앞선 표현이 익숙합니다. 처음 법을 공부하면서 ‘징역 6월’을 접했을 때는 ‘6월에만 감옥에 있으라는 건가?’ 하며 피식 웃기도 하였지만 말입니다.
현행 형법 제42조는 징역형의 하한을 “1개월”로 정하고 있습니다. 1953년 제정 형법 이래 “1월”로 되어 있었는데 2010년 징역형의 상한을 상향 조정하면서 “달을 세는 단위”로 국민들에게 익숙한 ‘개월’로 문구를 수정한 것입니다. 그 전부터 법제처는 『알기 쉬운 법령 정비기준』을 통해 “기간을 나타낼 때에는 일상생활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는 ‘○개월’로 고쳐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법률 문언이 바뀌었으니 습관을 고쳐야 하나 싶기는 합니다. 사법연수원에서 발간한 『형사판결서 작성론』에도 “종래 실무상 판결 주문에 예컨대 ‘징역 6월에 처한다’라고 기재하였다. 그러나 2010. 4. 15. 위와 같이 형법 제42조가 개정된 이후 법문에 따라 ‘6개월’로 기재하는 예가 점차 많아지고 있다.”라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다만 모 법원에서 올 1월부터 6월까지 선고된 사건 중 “징역 6월에 처한다.”가 326건, “징역 6개월에 처한다.”가 78건인 것을 보니 아직까지는 익숙함의 동지가 많은 것 같습니다.
사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월’에 “달을 세는 단위. 기수 뒤에서는 주로 형을 선고하거나 구형할 때 쓴다.”라는 뜻풀이가 달려 있습니다. 1999년 발간 당시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수록되었고 2008년 개정 당시에도 변동이 없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용례까지 담겨 있고, 법이 바뀐 이후에도 그대로이니 핑계 삼아 ‘월’을 계속 쓰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러나 국립국어원에 문의한 바로는 이 경우만큼은 사전에 기대기 어려워 보입니다. 1999년 당시에도, 그 후에도 일반인에게 워낙 생소하여 개정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법조계에서 워낙 익숙하게 쓰고 있어 사전에 들어갔을 뿐 ‘개월’이 정착되면 언제든 수정하여야 할 대상이라고까지 합니다.
양괄호 먼저 vs. 반괄호 먼저
판결서의 항목 구분과 관련하여, 반괄호가 먼저 나오는 판결서[1.-가.-1)-가)-(1)-(가) 순]와 양괄호가 먼저 나오는 판결서[1.-가.-(1)-(가)-1)-가) 순] 중 어느 쪽이 익숙하신가요? 저는 반괄호를 우선하는 방식에 훨씬 익숙합니다. 판결서뿐만 아니라 일반 문서를 작성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처음 판례공보 작업을 하거나 발간 업무를 하다 양괄호를 우선한 경우를 접하고는 교정을 보아야 하나 생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문 규범에는 어느 괄호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판결서의 항목 구분을 규율하는 소송법이나 규칙도 없고 재판서 또는 판결서 관련 예규에서도 특정한 방식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법연수원에서 발간하는 민사실무 교재에서는 오래전부터 법원사무관리규칙 시행내규 제10조 등을 소개하면서 항목의 구분을 설명하고 있는데 위 내규가 2006년에 반괄호를 우선하는 것으로 개정된 것이 익숙함의 유래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법원사무관리규칙 시행내규를 그대로 좇아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과거 법원공문서규칙은 재판에 관한 문서에도 적용되는 것이었지만 1993년 위 규칙이 폐지되고 법원사무관리규칙이 제정되면서 재판서는 그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같은 해 별도로 법원재판사무처리규칙이 제정될 때 ‘재판서 등 재판사무에 관한 문서’의 양식 등에 관한 사항은 (위 규칙이 아닌) 대법원예규로 정한다고 규정하였는데, 관련 예규에서는 “번호와 제목을 적절히 붙일 것”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위 시행내규가 반괄호 방식을 도입할 때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행정부의 사무관리규정 시행규칙 개정(2003년경 반괄호 방식을 사용하는 것으로 개정) 당시 관보나 대법원규칙 성안 당시의 자료를 찾아보아도 깊이 있는 검토 내용이 없습니다. 특별히 논리 필연적이지 않다면 어떤 규정이 있다고 하여 무조건 따르기보다는 곰곰이 생각해본 다음 정하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법원도서관의 『알기 쉬운 판결서 작성 Handbook』에서도 같은 취지로 안내하고 있고 판례공보 등 작업 과정에서도 항목 구분은 가급적 수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출판사나 학술단체에서는 양괄호가 반괄호에 비해 눈에 잘 띈다는 이유로 양괄호를 상위 항목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입니다.
마치며
IT 전문가들은 AI 시대일수록 경로의존성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익숙하다고 해서, 다수가 옳다고 믿는다고 해서 그냥 따른다면 AI에 지배당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경로의존성을 극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학자들은 어떠한 외부의 힘이 적절히 가해져야 ‘경로 탈피’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드린 세 가지 사안 모두 선후배·동료 법관을 비롯한 법원 구성원들의 문제 제기로 고민하게 된 것들입니다. 소중한 의견이 익숙함에 가려진 눈을 뜨게 해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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